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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에는 알리라(요 13:1~11)

by 【고동엽】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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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에는 알리라(요 13:1~1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을 발을 씻기시어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우리는 지금 몹시도 피곤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계와 더불어 살지만, 때로는 기계와 싸우며 살아갑니다. 요란한 기계소리와 더불어 경쟁을 하듯이 다투어가며 사는 피곤한 생입니다.

가끔 시간에 쫓기며 운전을 하다보면 5분, 3분, 1분을 다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인지 시계가 주인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물질에 시달리고, 많은 공해에 시달리며, 특별히 사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만납니다. 반가운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반갑지 않는 사람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는 일도 해야만 하는 그런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몸도 피곤하지만 사실 마음이 더 피곤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습니다. 산이 높다고 우리는 탓합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산이 높을수록 더 좋다고 합니다. 스릴이 있고 영광과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거칠고 험하다고 우리는 탓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자는 오히려 거친 세상이라 더 살만하고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싫어합니다. 사실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잘하며 어떤 시험이든 잘 치러내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학생이라면 시험은 어려울수록 좋습니다. 많이 볼수록 좋습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이 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합니다. 세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합니다.

결국 이렇게 심약한 나 자신이기에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고 그래서 피곤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하는 일에 자신이 없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손에 쥐었어도, 은행에 맡겼어도 내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눈에 보여도 안 되고, 보증을 세웠어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루 아침에 재벌이 되기도 하고,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기도 하니 내일 일을 모릅니다. 무엇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아주 피곤한 생입니다. 이것을 현대 철학가는 허무(nihilism)라고 말합니다. 보람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물론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너무 근시안적이고 너무 소아병적입니다. 왜냐하면 가을을 기다리는 인내가 없습니다. 가을까지 가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조와 불안과 불신 때문에 한 시간이 바쁩니다. 너무 즉각적으로 만사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사(反射)를 기다립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가 되어지기를 바라고만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들이 한결같이 우리들에게 보여 준 것은 무엇입니까? 불과 몇 분간의 그 경기를 위해서 그들은 10년 내지 그 이상의 기간을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긴 기다림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놓고 긴긴 설교를 하십니다.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중요한 행사를 치루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 요한은 뒤늦게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요 13:1)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의미는 비록 내일 아침에 십자가를 질망정 오늘은 사랑했다. 즉, 죽기까지, 생명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기셨다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아주 딱하기만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결정적인 시간에도 그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허영에 들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못난 제자들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먼저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이 사랑과 수고와 봉사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고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을 예수님은 아셨고, 예고하셨습니다.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하게 될 것이다." "그 믿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전혀 공부한 적이 없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들을 앞에 놓고 유언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단다 그런 줄 알아라."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훌륭한 어머니이십니다. 어떤 여자는 한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서는 세상 남자 다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몇 사람이나 경험을 했는데 그런 말을 합니까? 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는 이 세상 사람 다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보편화라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보고서 다 보았다고 합니다. 한 사건을 통해서 전체를 다 아는 것처럼 보편화하는 것은 소아병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을 주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를 믿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오늘 뿌리는 씨가 반드시 결실하게 될 것이라고 가을을 믿었습니다.

또한 가룟 유다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아십니다. 불과 몇 시간 후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할 것도 훤히 알고 있으면서 그의 발을 씻기셨고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깨끗하니라. 다는 아니니라." 만약 예수님께서 감정적으로 혼돈을 하셨다면 가룟 유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다른 제자들까지도 다 나쁘게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가령 "네 제자들 다 못믿겠다. 한심한 것들이다"라고 말씀하셨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는 가룟 유다요, 베드로는 베드로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 하나 때문에 나머지 열 한 제자들에게 결코 실망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나무라시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들 역시 한심한 상태였습니다. 네가 크냐, 내가 크냐 하며 서로 시기와 질투와 욕심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자리 다툼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는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여기에 신앙이 있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이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믿음입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게 되면 그 때는 부모들의 진실된 마음을 알게 됩니다. 후에는 반드시 알게 됩니다. 너무 초조하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지 맙시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미래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 믿음이 없는 봉사, 그리고 허무한 희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의미가 있고, 믿음이 있고, 아니 믿음을 주고 그리고 봉사하며 사랑하는 사람은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발을 씻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 훗날 제자들이 당신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으시며 그들의 발을 씻기고 계신 것입니다. 짐작컨데 이제 9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런 절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위해 끝까지 봉사하셨습니다. 그가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고, 저가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오늘 하셨습니다. 응답이 없는 무지한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물러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거절을 합니다. 제자인 자기가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지 못한 죄책감이었습니다.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합니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좀 다혈질이라 성미가 급합니다. 상관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조급하게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제자인 네가 지금 나를 모르고 있다고 책망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고 믿으시며 부지런히 씻겼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탓하지 맙시다. 반응이 없다고, 인사가 없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 지금 내가 하면 족합니다. 아내가 되었습니까? 아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십시다. 남편 일까지 뭐라고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남편입니까? 남편 구실만 착실하게 하십시다. 좋은 아내니, 나쁜 아내니, 평가하지 맙시다. 부모의 위치에 있습니까? 부모 노릇만 잘 하십시다. 먼 훗날 자식들이 고맙게 여러분의 노고를 알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대상을 원망치 말고 지금 할 일만 열심히 합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나무라시지 않고 이 후에는 알 것을 믿으시며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고민으로 옆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란 큰 고민이 앞에 있었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지금해야 할 일에만 몰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봉사였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고 주님이 하실 일만 하셨을 뿐입니다. 마치 농부가 부지런히 씨를 심고 가꾸듯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와 능력에 완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 것이고, 깨달을 것이고, 보답할 것이며 그리고 위하여 순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썩어지는 밀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새 밀알은 말이 많습니다. 썩어지지는 않고 썩어질 것이라고 소리만 지릅니다. 말없이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언젠가 먼 훗날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가끔 오늘 당장 수고하고 내일 바로 기념비를 세우고 있습니다. 기념비란 그 분이 돌아가신지 몇 백 년 뒤에 세워야지, 산 사람의 기념비를 세우고 있으니 될 법한 일입니까? 너무 조급하게 서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신 "이 후"라는 말은 결코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대를 거는 운명론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시간입니다. 이후에라는 말은 사건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죽은 바로 후에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모르나 내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성령 강림하면 그 때는 알리라는 뜻입니다. 이 복음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의 밀알이 썩어서 죽어가면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희생하고 나면 그 때는 압니다. 아직 희미한 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또는 알고자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깨끗이 죽어지면 반드시 이 후에는 알 것입니다.

우리는 피곤한 시대에 삽니다.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확실하게 합시다. 순수한 사랑을 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 십자가 뒤에 있는 능력, 십자가 뒤에 있는 놀라운 주의 역사를 우리는 바라보면서 주의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기도 사랑의 주님, 이 후에는 알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오늘까지 참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간구하오니 지금 주님의 크신 말씀의 뜻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과 내 발을 씻기며 인내하신 것과 그리고 우리를 믿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제 오늘은 그 사랑에 보답하며 오늘은 주를 위하여 우리가 희생할 수 있고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 나 자신을 제물로 바쳐 희생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1~1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을 발을 씻기시어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우리는 지금 몹시도 피곤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계와 더불어 살지만, 때로는 기계와 싸우며 살아갑니다. 요란한 기계소리와 더불어 경쟁을 하듯이 다투어가며 사는 피곤한 생입니다.

가끔 시간에 쫓기며 운전을 하다보면 5분, 3분, 1분을 다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인지 시계가 주인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또한 물질에 시달리고, 많은 공해에 시달리며, 특별히 사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만납니다. 반가운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반갑지 않는 사람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는 일도 해야만 하는 그런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몸도 피곤하지만 사실 마음이 더 피곤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습니다. 산이 높다고 우리는 탓합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산이 높을수록 더 좋다고 합니다. 스릴이 있고 영광과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거칠고 험하다고 우리는 탓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자는 오히려 거친 세상이라 더 살만하고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싫어합니다. 사실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잘하며 어떤 시험이든 잘 치러내고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학생이라면 시험은 어려울수록 좋습니다. 많이 볼수록 좋습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이 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합니다. 세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합니다.

결국 이렇게 심약한 나 자신이기에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고 그래서 피곤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하는 일에 자신이 없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손에 쥐었어도, 은행에 맡겼어도 내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눈에 보여도 안 되고, 보증을 세웠어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루 아침에 재벌이 되기도 하고,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기도 하니 내일 일을 모릅니다. 무엇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아주 피곤한 생입니다. 이것을 현대 철학가는 허무(nihilism)라고 말합니다. 보람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물론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너무 근시안적이고 너무 소아병적입니다. 왜냐하면 가을을 기다리는 인내가 없습니다. 가을까지 가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조와 불안과 불신 때문에 한 시간이 바쁩니다. 너무 즉각적으로 만사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사(反射)를 기다립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가 되어지기를 바라고만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들이 한결같이 우리들에게 보여 준 것은 무엇입니까? 불과 몇 분간의 그 경기를 위해서 그들은 10년 내지 그 이상의 기간을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긴 기다림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놓고 긴긴 설교를 하십니다.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중요한 행사를 치루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 요한은 뒤늦게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요 13:1)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의미는 비록 내일 아침에 십자가를 질망정 오늘은 사랑했다. 즉, 죽기까지, 생명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크리소스톰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기셨다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아주 딱하기만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결정적인 시간에도 그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허영에 들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못난 제자들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먼저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이 사랑과 수고와 봉사가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고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을 예수님은 아셨고, 예고하셨습니다.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하게 될 것이다." "그 믿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전혀 공부한 적이 없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들을 앞에 놓고 유언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단다 그런 줄 알아라."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훌륭한 어머니이십니다. 어떤 여자는 한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서는 세상 남자 다 못 믿겠다고 말합니다. 몇 사람이나 경험을 했는데 그런 말을 합니까? 한 사람에게 배신당하고는 이 세상 사람 다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보편화라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을 보고서 다 보았다고 합니다. 한 사건을 통해서 전체를 다 아는 것처럼 보편화하는 것은 소아병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을 주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를 믿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오늘 뿌리는 씨가 반드시 결실하게 될 것이라고 가을을 믿었습니다.

또한 가룟 유다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아십니다. 불과 몇 시간 후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할 것도 훤히 알고 있으면서 그의 발을 씻기셨고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깨끗하니라. 다는 아니니라." 만약 예수님께서 감정적으로 혼돈을 하셨다면 가룟 유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다른 제자들까지도 다 나쁘게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가령 "네 제자들 다 못믿겠다. 한심한 것들이다"라고 말씀하셨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는 가룟 유다요, 베드로는 베드로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 하나 때문에 나머지 열 한 제자들에게 결코 실망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나무라시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들 역시 한심한 상태였습니다. 네가 크냐, 내가 크냐 하며 서로 시기와 질투와 욕심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자리 다툼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는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여기에 신앙이 있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이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믿음입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게 되면 그 때는 부모들의 진실된 마음을 알게 됩니다. 후에는 반드시 알게 됩니다. 너무 초조하게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지 맙시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미래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 믿음이 없는 봉사, 그리고 허무한 희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의미가 있고, 믿음이 있고, 아니 믿음을 주고 그리고 봉사하며 사랑하는 사람은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발을 씻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 훗날 제자들이 당신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으시며 그들의 발을 씻기고 계신 것입니다. 짐작컨데 이제 9시간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이런 절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위해 끝까지 봉사하셨습니다. 그가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고, 저가 할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오늘 하셨습니다. 응답이 없는 무지한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물러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거절을 합니다. 제자인 자기가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지 못한 죄책감이었습니다.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합니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좀 다혈질이라 성미가 급합니다. 상관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조급하게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제자인 네가 지금 나를 모르고 있다고 책망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고 믿으시며 부지런히 씻겼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탓하지 맙시다. 반응이 없다고, 인사가 없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해야 할 일, 지금 내가 하면 족합니다. 아내가 되었습니까? 아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십시다. 남편 일까지 뭐라고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남편입니까? 남편 구실만 착실하게 하십시다. 좋은 아내니, 나쁜 아내니, 평가하지 맙시다. 부모의 위치에 있습니까? 부모 노릇만 잘 하십시다. 먼 훗날 자식들이 고맙게 여러분의 노고를 알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대상을 원망치 말고 지금 할 일만 열심히 합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나무라시지 않고 이 후에는 알 것을 믿으시며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고민으로 옆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란 큰 고민이 앞에 있었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지금해야 할 일에만 몰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봉사였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하고 주님이 하실 일만 하셨을 뿐입니다. 마치 농부가 부지런히 씨를 심고 가꾸듯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와 능력에 완전히 위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 것이고, 깨달을 것이고, 보답할 것이며 그리고 위하여 순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썩어지는 밀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새 밀알은 말이 많습니다. 썩어지지는 않고 썩어질 것이라고 소리만 지릅니다. 말없이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언젠가 먼 훗날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가끔 오늘 당장 수고하고 내일 바로 기념비를 세우고 있습니다. 기념비란 그 분이 돌아가신지 몇 백 년 뒤에 세워야지, 산 사람의 기념비를 세우고 있으니 될 법한 일입니까? 너무 조급하게 서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신 "이 후"라는 말은 결코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대를 거는 운명론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시간입니다. 이후에라는 말은 사건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죽은 바로 후에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모르나 내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성령 강림하면 그 때는 알리라는 뜻입니다. 이 복음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의 밀알이 썩어서 죽어가면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희생하고 나면 그 때는 압니다. 아직 희미한 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또는 알고자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깨끗이 죽어지면 반드시 이 후에는 알 것입니다.

우리는 피곤한 시대에 삽니다.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확실하게 합시다. 순수한 사랑을 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 십자가 뒤에 있는 능력, 십자가 뒤에 있는 놀라운 주의 역사를 우리는 바라보면서 주의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기도 사랑의 주님, 이 후에는 알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오늘까지 참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간구하오니 지금 주님의 크신 말씀의 뜻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과 내 발을 씻기며 인내하신 것과 그리고 우리를 믿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제 오늘은 그 사랑에 보답하며 오늘은 주를 위하여 우리가 희생할 수 있고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 나 자신을 제물로 바쳐 희생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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