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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시편 139:1-2)

by 【고동엽】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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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시편 139: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Einstein, A)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가장 실제적인 것은 신비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이 신비스러움은 더 많이 발견된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더이상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더이상 감탄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죽은 것과 같다. 꺼진 촛불과 같다. 이것이 없는 자는 스스로 교만해진다.'

여러분,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발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발명''발견'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인간 지식 속에, 인간 경험 속에 발명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를, 그 무한한 지식을, 그 무한한 실재(實在)를 말미에서 몇 가지 알게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얻은 바 지식을 이렇게 저렇게 응용하여 생활에 편리함을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광대한 지식의 세계 안에서 우리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작습니다.

마치 태평양의 물을 조개껍데기로 퍼내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하찮은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를, 그 실체를 조금씩조금씩 깨닫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1965년에 프랑스의 바울 브로카라는 학자가 사람의 양쪽 두뇌가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학설을 발표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두뇌 기능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Brain research로 신경학, 뇌신경학, 심리학을 연결, 뇌의 기능을 연구하여 새로운 학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구구한 학설을 다 말씀드릴 필요는 없고, 여기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만을 살펴볼까 합니다.

사람의 왼쪽 대뇌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 언어장애를 일으키거나 기억이 상실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른쪽 대뇌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는 언어기능에 별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왼쪽 대뇌는 수학적 분석적 논리적 기능을 담당하고, 오른쪽 대뇌는 통합적 정서적 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대뇌는 예술적 기능인 창의력과 감정, 곧 비합리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부, 특히나 오늘날의 교육은 주로 왼쪽 대뇌가 담당합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하게 왼쪽 대뇌에 치중해서 많은 지식을 주입하므로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반면에 창의력이나 예술성 방면으로는 너무 소홀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교육계에서는 whole brain education이라는 과제를 내걸고 종합적인 정서교육과 실천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참지식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도대체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관(五官)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뇌의 기능을 최대한도로 발휘해서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상상하여 또 다른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진(無盡)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언제든지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어디까지, 언제까지 알 수 있는가 ---- 그 한계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젊었을 때에 기억력이DTXT킆좋습니다.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좀처럼 잊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 기억력이 없어집니다. 반면에 판단력과 의지력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칠십, 팔십된 분들이 대법원 판사와 같은 중책을 맡기도 합니다. 판단력이 젊은 사람들에 비하여 월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제 친구 하나가 뇌를 조금 다쳐서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찾아 가보니 참으로 보기 민망합디다. 이십 년, 삼십 년 전에 사귄 사람들이 찾아오면 다 알아보고 기억하는데, 근자에 만난 사람들은 도통 기억하지를 못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옛날에, 젊었을 때에 머리에 입력된 것은 남아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 입력된 것은 빨리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노인네들이 앉았다 하면 옛날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아는 것도 없을 뿐더러 보고 들어도 좀처럼 기억되지 않으니까요. 이렇듯 사람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고, 종합분석 하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내가 지식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내 선입관, 내 경험, 내 감정, 내가 가진 전() 이해가 나를 가로막을 때에, 내 욕심이 나를 가로막을 때에 지식이 올바로 입력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입력되었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지식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싹트고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의 주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알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습니다마는 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앎으로써 바른 지식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 공휴일에 유원지에 가서 바람이 나 쐬겠다고 아이들과 같이 나갔다가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고, 아무 것도 본 것 없이 사람구경만 잔뜩 하고 돌아왔다고 투덜대는 분들을 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해줍니다. "많은 사람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당신을 구경시킨 것입니다. 별로 잘생기지도 못한 사람을 하루종일 구경시키고 다닌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압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내가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보다 이미 그 지식 안에 내가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웅겔스마(Ungelsma)는 이렇게 말합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아는 ''가 있고, 다른 사람이 아는 ''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먼저 알고, 더 잘 알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수준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아는 내가 옳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내가 옳은 것입니까? 나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나됨을 오히려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는 내가 더 정확하다 ---- 이렇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인격자가 되고, 덕인(德人)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밑에 있는 사람에게 알려진 바의 나, 그 지식에 비쳐진 나를 바로 인식할 때에 비로소 바른 지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다윗은 다섯 번에 걸쳐서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알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나를 몰랐습니다. 나는 스스로가 이런 존재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욥기를 보십시오. 엄청난 고난 끝에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이제, 그는 자기 판단을 포기합니다. 자기 지식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식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나도 나를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아신다---이것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님의 초한계적인 지식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사실이 사실 아닌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모른다고 해서 사실이 사실 아닌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나도 저들도 다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사실(事實)은 우리의 지식과 관계없이, 내가 깨닫는 바와 관계없이 엄연히 실재(實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우리 혀의 말을 아시고, 말하기 전의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은밀하고 비밀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여러분,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밀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가만히 보면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자기만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진작 알았어야지요.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멍청하게 본인만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어쩌면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의 빛 앞에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다 하나님의 지식 앞에 노출된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비밀이 있다고 내가 착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히브리어로는 '야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야다'가 쓰인 재미있는 말씀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4:1)"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1:25)" ---- 여기서 '동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야다'입니다. '야다'는 본디 '안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알았다, 그랬더니 아들을 낳았다----이것이 '안다'라는 뜻으로, 아주 깊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요 아주 깊은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직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알다''야다'와 마찬가지로 깊은 체험을 통해서 얻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이것은 완전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비밀이 없습니다. 다만 이 지식 앞에서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다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지식, 그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에 대하여 모를 때에는 사랑하다가도, 알고 나면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밀이 지켜졌을 때에는 사랑하다가도 비밀이 드러났을 때에는 미워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 약점을 아는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인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진실이, 내 비밀이 알려졌을 때에 도망가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다 아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내 허물도, 내 죄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3:14)" ---- 내가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다고, 그런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한 남자를 만나 여러 해 동안 깊이 연애를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첫사랑인 그 남자가 그만 결혼식을 앞두고 차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시련을 딛고 그녀는 다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너무나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함으로 그 사랑이 깨어지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비밀을 숨긴 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가운데도 마음 한구석은 늘 괴로웠습니다. 언젠가 고백을 해야지, 생각하면서도 그 고백으로 지금의 아름다운 관계가 끊어질 것 같아서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십 년이 지났습니다. 남편은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해주었습니다. 그 진실되고 깨끗한 사랑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내게 엄청난 과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저렇듯 사랑하는구나'하는 생각으로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이 사랑이, 이 관계가 깨어지더라도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남편 앞에 과거를 털어놓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는 다정히 웃으며 말합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노라고.

여러분, 진정 몰라서 모르는 척하는 줄 아십니까? 비밀이란 없습니다. 다만 기다려줄 뿐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진실을 찾기를 기다리고, 언젠가 깨끗한 마음으로 고백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비밀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다 알려져 있습니다. 몰랐다면 나 하나만 몰랐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모든 죄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설 때부터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모습으로 아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게 다 아는데 무슨 구구한 설명이 필요합니까? 아버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아가 하나님의 엄청난 지식 안에 내 현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몰라서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내 실패, 내 질병, 내 고통, 내 역경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르시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 알고 사랑하십니다. 다 알고 사랑하시는 그 안에 내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 밖에 버려진 존재로서의 나의 현실이 있다고 착각하지는 말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그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때문에 평생을 고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이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깨닫습니다. 그 자신 자칫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라고, 이 고통을 주신 것이라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나는 나를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다 아시고 나를 당신의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마침내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현실이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다 패어 개놓은 장작을 한데 쌓아놓더니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이 장작을 부엌으로 날라야겠는데 좀 도와주지 않겠니?" ", 그러지요."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아버지가 놓아주는 장작을 받습니다. 수북히 올려놓은 장작을 들고 부엌으로 가는 아이를 본 동네 어른이 "조그만 체구에 너무 많이 들고 가는구나. 무겁지 않니?"하고 묻습니다.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니요. 내가 얼마나 들 수 있는지 아버지가 잘 아시거든요."

여러분,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은 내게 필요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몰라서 이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가 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하기에, 그 적당한 분량 만큼의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내 약함도, 내 능력도 다 아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이 지식이 곧 능력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방탕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로 가겠노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완강하게 이를 만류했습니다마는, 그는 끝내 자신의 뜻대로 로마로 갑니다. 당시 그 어머니는 몹시도 괴롭고 걱정스러웠지만,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에 가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른세 살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뒤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를 로마로 보내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를 가출시키신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 알고 계셨기에, 그 길을 통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에 왜 사십 년을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르셔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아시기에 사랑으로 주시는 시련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Omniscience, Omnipotence, Omnipresence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이 있습니다. 전지, 전능, 무소부재--하나님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한 나의 깨달음 만큼 그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두려워 벌벌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세상사람 다 몰라줘도 좋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신다면 나는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내가 나를 몰라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니까요. 여기에 참평안이 있고, 참 능력의 사람 되는 길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에 대한 지식 만큼의 능력 있는 생을, 평안한 생을, 행복한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시편 139: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Einstein, A)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가장 실제적인 것은 신비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이 신비스러움은 더 많이 발견된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더이상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더이상 감탄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죽은 것과 같다. 꺼진 촛불과 같다. 이것이 없는 자는 스스로 교만해진다.'

여러분,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발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발명''발견'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인간 지식 속에, 인간 경험 속에 발명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를, 그 무한한 지식을, 그 무한한 실재(實在)를 말미에서 몇 가지 알게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얻은 바 지식을 이렇게 저렇게 응용하여 생활에 편리함을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광대한 지식의 세계 안에서 우리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작습니다.

마치 태평양의 물을 조개껍데기로 퍼내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하찮은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를, 그 실체를 조금씩조금씩 깨닫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1965년에 프랑스의 바울 브로카라는 학자가 사람의 양쪽 두뇌가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학설을 발표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두뇌 기능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Brain research로 신경학, 뇌신경학, 심리학을 연결, 뇌의 기능을 연구하여 새로운 학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구구한 학설을 다 말씀드릴 필요는 없고, 여기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만을 살펴볼까 합니다.

사람의 왼쪽 대뇌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 언어장애를 일으키거나 기억이 상실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른쪽 대뇌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는 언어기능에 별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왼쪽 대뇌는 수학적 분석적 논리적 기능을 담당하고, 오른쪽 대뇌는 통합적 정서적 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대뇌는 예술적 기능인 창의력과 감정, 곧 비합리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부, 특히나 오늘날의 교육은 주로 왼쪽 대뇌가 담당합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하게 왼쪽 대뇌에 치중해서 많은 지식을 주입하므로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반면에 창의력이나 예술성 방면으로는 너무 소홀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교육계에서는 whole brain education이라는 과제를 내걸고 종합적인 정서교육과 실천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참지식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도대체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관(五官)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뇌의 기능을 최대한도로 발휘해서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상상하여 또 다른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진(無盡)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언제든지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어디까지, 언제까지 알 수 있는가 ---- 그 한계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젊었을 때에 기억력이DTXT킆좋습니다.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좀처럼 잊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 기억력이 없어집니다. 반면에 판단력과 의지력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칠십, 팔십된 분들이 대법원 판사와 같은 중책을 맡기도 합니다. 판단력이 젊은 사람들에 비하여 월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제 친구 하나가 뇌를 조금 다쳐서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찾아 가보니 참으로 보기 민망합디다. 이십 년, 삼십 년 전에 사귄 사람들이 찾아오면 다 알아보고 기억하는데, 근자에 만난 사람들은 도통 기억하지를 못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옛날에, 젊었을 때에 머리에 입력된 것은 남아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 입력된 것은 빨리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노인네들이 앉았다 하면 옛날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아는 것도 없을 뿐더러 보고 들어도 좀처럼 기억되지 않으니까요. 이렇듯 사람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고, 종합분석 하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내가 지식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내 선입관, 내 경험, 내 감정, 내가 가진 전() 이해가 나를 가로막을 때에, 내 욕심이 나를 가로막을 때에 지식이 올바로 입력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입력되었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지식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싹트고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의 주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알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습니다마는 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앎으로써 바른 지식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 공휴일에 유원지에 가서 바람이 나 쐬겠다고 아이들과 같이 나갔다가 많은 사람에게 시달리고, 아무 것도 본 것 없이 사람구경만 잔뜩 하고 돌아왔다고 투덜대는 분들을 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해줍니다. "많은 사람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당신을 구경시킨 것입니다. 별로 잘생기지도 못한 사람을 하루종일 구경시키고 다닌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압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내가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보다 이미 그 지식 안에 내가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웅겔스마(Ungelsma)는 이렇게 말합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아는 ''가 있고, 다른 사람이 아는 ''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먼저 알고, 더 잘 알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수준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아는 내가 옳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내가 옳은 것입니까? 나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나됨을 오히려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아는 내가 더 정확하다 ---- 이렇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인격자가 되고, 덕인(德人)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밑에 있는 사람에게 알려진 바의 나, 그 지식에 비쳐진 나를 바로 인식할 때에 비로소 바른 지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다윗은 다섯 번에 걸쳐서 "주께서 나를 아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알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나를 몰랐습니다. 나는 스스로가 이런 존재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욥기를 보십시오. 엄청난 고난 끝에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이제, 그는 자기 판단을 포기합니다. 자기 지식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식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나도 나를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아신다---이것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님의 초한계적인 지식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사실이 사실 아닌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모른다고 해서 사실이 사실 아닌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나도 저들도 다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사실(事實)은 우리의 지식과 관계없이, 내가 깨닫는 바와 관계없이 엄연히 실재(實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우리 혀의 말을 아시고, 말하기 전의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은밀하고 비밀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여러분,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밀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가만히 보면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자기만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진작 알았어야지요.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멍청하게 본인만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어쩌면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의 빛 앞에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다 하나님의 지식 앞에 노출된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비밀이 있다고 내가 착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히브리어로는 '야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야다'가 쓰인 재미있는 말씀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4:1)"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1:25)" ---- 여기서 '동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야다'입니다. '야다'는 본디 '안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알았다, 그랬더니 아들을 낳았다----이것이 '안다'라는 뜻으로, 아주 깊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요 아주 깊은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직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알다''야다'와 마찬가지로 깊은 체험을 통해서 얻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이것은 완전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비밀이 없습니다. 다만 이 지식 앞에서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다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지식, 그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에 대하여 모를 때에는 사랑하다가도, 알고 나면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밀이 지켜졌을 때에는 사랑하다가도 비밀이 드러났을 때에는 미워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 약점을 아는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인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진실이, 내 비밀이 알려졌을 때에 도망가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다 아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내 허물도, 내 죄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3:14)" ---- 내가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다고, 그런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한 남자를 만나 여러 해 동안 깊이 연애를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첫사랑인 그 남자가 그만 결혼식을 앞두고 차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시련을 딛고 그녀는 다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너무나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함으로 그 사랑이 깨어지게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비밀을 숨긴 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가운데도 마음 한구석은 늘 괴로웠습니다. 언젠가 고백을 해야지, 생각하면서도 그 고백으로 지금의 아름다운 관계가 끊어질 것 같아서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십 년이 지났습니다. 남편은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해주었습니다. 그 진실되고 깨끗한 사랑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내게 엄청난 과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저렇듯 사랑하는구나'하는 생각으로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이 사랑이, 이 관계가 깨어지더라도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남편 앞에 과거를 털어놓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는 다정히 웃으며 말합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노라고.

여러분, 진정 몰라서 모르는 척하는 줄 아십니까? 비밀이란 없습니다. 다만 기다려줄 뿐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진실을 찾기를 기다리고, 언젠가 깨끗한 마음으로 고백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비밀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다 알려져 있습니다. 몰랐다면 나 하나만 몰랐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모든 죄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설 때부터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모습으로 아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게 다 아는데 무슨 구구한 설명이 필요합니까? 아버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아가 하나님의 엄청난 지식 안에 내 현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몰라서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내 실패, 내 질병, 내 고통, 내 역경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르시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 알고 사랑하십니다. 다 알고 사랑하시는 그 안에 내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 밖에 버려진 존재로서의 나의 현실이 있다고 착각하지는 말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그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때문에 평생을 고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이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깨닫습니다. 그 자신 자칫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라고, 이 고통을 주신 것이라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나는 나를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다 아시고 나를 당신의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마침내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현실이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다 패어 개놓은 장작을 한데 쌓아놓더니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이 장작을 부엌으로 날라야겠는데 좀 도와주지 않겠니?" ", 그러지요."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아버지가 놓아주는 장작을 받습니다. 수북히 올려놓은 장작을 들고 부엌으로 가는 아이를 본 동네 어른이 "조그만 체구에 너무 많이 들고 가는구나. 무겁지 않니?"하고 묻습니다.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니요. 내가 얼마나 들 수 있는지 아버지가 잘 아시거든요."

여러분,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은 내게 필요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몰라서 이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가 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하기에, 그 적당한 분량 만큼의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내 약함도, 내 능력도 다 아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이 지식이 곧 능력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방탕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로 가겠노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완강하게 이를 만류했습니다마는, 그는 끝내 자신의 뜻대로 로마로 갑니다. 당시 그 어머니는 몹시도 괴롭고 걱정스러웠지만,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에 가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른세 살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뒤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를 로마로 보내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를 가출시키신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 알고 계셨기에, 그 길을 통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에 왜 사십 년을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르셔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아시기에 사랑으로 주시는 시련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Omniscience, Omnipotence, Omnipresence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이 있습니다. 전지, 전능, 무소부재--하나님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한 나의 깨달음 만큼 그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두려워 벌벌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세상사람 다 몰라줘도 좋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신다면 나는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내가 나를 몰라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니까요. 여기에 참평안이 있고, 참 능력의 사람 되는 길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에 대한 지식 만큼의 능력 있는 생을, 평안한 생을, 행복한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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