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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의 신앙(여호수아 1장 1절~9절)

by 【고동엽】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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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의 신앙(여호수아 1장 1절~9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侍從)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한평생을 나그네로, 개척자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동안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좀 알고 싶어합니다. 그 궁금증 때문에 점쟁이들이 굶지 않고 밥을 먹고사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별로 믿지도 않으면서 혹시라도, 다소라도 알았으면 해서, 또한 점괘가 맞았으면 해서 미래에 대하여 점을 치는 것 같습니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마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평생 미지의 세계로, 불확실한 세상으로 우리는 오늘도 떠나가야 합니다.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존 브레들리 쇼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If you want to go, you have to be able to say good-bye" -- "변화와 성장을 원한다면 '안녕히'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good-bye를 깨끗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미련을 두지 마세요. 유행가 가사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 때문에'--이 말은 외국 사람들이 번역을 못합니다.

알 리가 없지요.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니까요. 그 끈끈한 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도대체가 우리는 냉정함이 부족합니다. 정말입니다.

언젠가 저는 어느 미국사람의 장례식을 한번 집례한 적이 있습니다. 부인은 그 남편의 임종이 가까움을 알고 병원에서 줄곧 옆에 지켜서 있다가 잠깐 집에 다녀오려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런데 그새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부인이 저에게 '죽은 남편이있는 곳에 혼자 들어가기가 좀 어려우니 한번 같이 가주시면 좋겠습니다'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병원에 가서 죽은 남편이 있는 곳에 막 들어서려고 하는데 의사가 부인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남편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 압니다." 이제 그 부인이 어떻게 하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방에 들어가서 시체가 되어버린 남편에게 정식으로 키스를 합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I love you"라고 말하고는 딱 돌아섭니다.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로 천연스레 장례식이니 뭐니 다 진행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아, 이것은 뭔가 좀 다른데……' 싶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에 어떻게 합니까? 죽은 사람이 있으면 들쳐보고 또 들쳐보고 또 들쳐보고…… 미련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이미 끝났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미래를 향하여 나가려 한다면 과거와의 관계가 깨끗해야 합니다. 딱 끊는 냉정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뻔히 안될 것을 알면서, 끝난 것을 알면서 또 들쳐보고 또 생각하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같은 미련을 떨 것입니까? 개척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애굽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애굽을 잊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40년의 광야생활에서 또 떠납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광야에서의 그 생은 아주 모질고 고달펐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끈끈해져서 여기서 떠나기를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개척자는 두려워합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로 가야 하니까요.

지도자는 고독합니다.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지고 결정을 해야 하니까요. 언제나 지도자는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믿고 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모세와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실하게 보았고,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입니다. 여호수아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실까? 지금 우리 민족과 함께 하실까? 그리고 우리의 미래와 함께 하실까? 특별히 나와 함께 하실까?'--분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고 근심 중에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옛날 가나안을 정탐했던 사람이요, 확실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마는 현재와 미래로 향하는 믿음에 있어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해주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그 첫 번째는 '내가 저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하신 그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3절)……"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신 두 마디 말씀을 믿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하나는 '내가 저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하심이요, 또 하나는 '너희 손에 붙였다' 하심입니다. 아직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끝난 것이다, 이제는 밀어붙여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저들은 나가 싸워 이겼습니다. 주변의 정황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원수가 많든, 무기가 많든, 정세가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그런 이야기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너희 손에 붙였느니라, 가라' 말씀하신 것만을 믿고 저들은 가서 싸워 이긴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약속이 있을 뿐입니다. 이 약속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미래적 사건을 현재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었습니다.

또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언뜻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지만 사실 어려운 말씀입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다 하셨으니까 이제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만사형통일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마는,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셨다는 말씀을 믿고, 가서, 발바닥으로 밟아야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1963년에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 생전처음으로 LA에 있는 할리우드에 가보았습니다. 길 양쪽으로 배우들의 이름이 씌어 있는 거리가 있는데, 그것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왔다갔다 걸어다녔습니다.

그런데 LA라는 데가 말이예요, 겨울이라 해도 어떤 사람은 밍크 코트를 입었고 어떤 사람은 맨발로 걸어다닙니다. 추운지 더운지 잘 모르겠다 싶은 그런 곳입니다. 어쨌든 그 때에 어떤 노인 한 분이 그 추운 날씨에 맨발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걸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가다가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손을 들고 중얼거리고, 또 가다가는 멈추어 서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같이 가던 미국인 친구에게 "저 사람 왜 저러는 거야?"하고 물었더니 '바로 저 사람이 Jew'라고 합니다. Jew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 노인은 이 말씀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맨발로 밟아야 발바닥으로 밟는 것이지, 신발을 신고 밟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맨발로 땅을 밟고 남의 집 문턱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땅을 내게 주세요. 제가 발바닥으로 밟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허, 참…… 그 믿음이 대단합디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발바닥으로 밟아야 비로소 내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마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자,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따라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 절박한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쳐서 건너가라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사람들 앞에서 지팡이로 홍해를 딱 쳤습니다. 그런데 물은 까딱도 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당황했습니다. 그 때, 모세 옆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여호수아라고 합니다. 청년이 모세에게 말합니다. "모세여, 치고 건너가라고 하셨는데, 왜 가만히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들은 모세가 물 속으로 첨벙 들어가니까 그 때에 물이 쫙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전설을 믿고 싶습니다. 그 쪽이 더 마음에 들거든요. 발바닥으로 밟아야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계가 내게로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가 세계로 가야 합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기를 바라면서 정작 스스로는 공부 안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어떻게 못하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운전을 배우는 사람이 운전 잘하기만을 바라면서 차에 올라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운전을 배우겠습니까? 여러분, 잊지 말 것입니다. 흔히들 돈 벌기를 바라면서 재수가 좋기만을 바라지, 부지런하지는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어떻게 돈이 주어집니까? 발바닥으로 밟아야 합니다. 성경은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거저 주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그곳을 내가 네게 주었다, 네 손으로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리라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발바닥으로 밟지 않고 나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무엇인가 되어지기를 바라고 세계가 내게로 오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도둑 심보예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네가 가서 발바닥으로 밟는 그 곳을 내가 네게 이미 주었다, 그런고로 너는 가서 발바닥으로 밟아서 저 땅을 소유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하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9절)" -- '내가 함께하리라'입니다. 모세에게처럼 함께하고, 과거에 함께하던 것처럼 함께하고, 지금도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 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십니다. 이제 뛰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가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읽으면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르시고, 다음은 능력을 주시고, 마지막으로 보내십니다.

'부르시고, 주시고, 보내시고'--부르시고 보내신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주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그것은 '권능을 주시고'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고 나아가서 귀신을 위하여 소리를 지르고 병자를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저 능력이 여기서 나타나기를 바라고 저기서 나타나기를 바라는, 이런 어리석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부르시고, 주시고, 보내시고'--여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현실적인 내용으로 살펴보자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용기를 가지라, 담력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에 대해서나 세상 돌아가는 것, 미래에 대한 것은 다 내 손에 있는 것이다. 네가 가져야 할 것은 다만 용기이다.'

시거니 해리스의 수상록(隨想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패자는 시간에 끌려 산다. 승자는 시간을 붙잡고 달리고, 패자는 시간에 쫓겨서 달린다. 승자는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패자는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하며 산다'--여러분, 승자와 패자가 따로 있습니까? 문제는 그의 용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적 용기, 도덕적 용기, 그리고 지성적 용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이제 순종하라, 그리고 행동하라'하고 말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8절)……"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 하심입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공허해지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날 때에 용기를 잃게 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말했습니다. '일생을 두고, 최일선에 있을 때에도 성경 한 장을 보지 않고 잠자리에 든 일은 없다.'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급한 때일지라도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어서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명상해서 그것이 내 마음에 가득할 때에 비로소 용기의 사람, 지혜의 사람, 능력의 사람, 형통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용기는 내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는 말씀이 주는 은사요, 말씀과 성령이 함께할 때 내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7절)"--'지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말씀 그대로 지켜 행하라.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리하면 길이 있으리라. 그리하면 어디를 가든지 너희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하시는 말씀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남긴 기도문 하나를 소개합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 처해서도 겁을 내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에 처해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인생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겁장이가 되고 싶지 않사오니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기쁠 때에나 성공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픈 때에도 하나님께서 내 손목을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러분, 세상이 달라지기를 기도하지 마십시다. 내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 주변사람들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남에게 달라진 사람으로 대할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이제 새해 첫주일을 맞았습니다. 다시금 우리는 미지의 세계로 갑니다. 아무도 미래를 점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정세와 환경, 우리가 처한 미래의 환경…… 아무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마십시다. 문제는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때때로, 계속해서, 사사건건, 매일매일 순종해 나간다면 분명코 용기의 사람, 지혜의 사람, 말씀의 사람, 형통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를 당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 발바닥으로 밟는 곳, 그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분명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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