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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믿는 자와 못 믿는 자(요한복음 5:37-4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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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믿는 자와 못 믿는 자(요한복음 5:37-4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을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세상에는 행복한 일도 불행한 일도 있으며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보더라도 행복할 때가 있고 불행할 때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도 있고 어리석은 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이런 말을 듣고 있고, 또한 느끼고 있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똑똑하고 머리 회전이 좋은 사람은 행복한 겁니까? 어리석은 자는 반드시 불행합니까? 출세하면 행복하고 낙오되면 불행합니까?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불행합니까? 성공하면 행복하고 실패하면 불행합니까? 반드시 이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청빈낙도'를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오히려 많이 가지면 불행하고 아무 것도 없을 때가 편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식자우환'이라고도 했습니다. 배우느라고 하지만 아는 것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거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못할 짓만, 불행한 일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행복하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여러분! 이론에 묻지 마시고 경험에 물어 보십시오. 정말 있었다고 행했습니까? 정말 많이 배웠다고 행복했으면 출세했을 때가 행복했습니까? 건강할 때가 행복했습니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일 수도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실 수 없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불행합니다. 운명이 기구합니다. 한편으론 요즘 같은 어려운 세상에 아주 어리숙한 사람이지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대로 남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행복합니까? 어리석은 사람이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고 미련한 사람에게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 사실은 시인해야 합니다. 가졌다는 것과 행복은 꼭같은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많이 공부해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적어도 행복이란 이런 것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단계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행복은 지성이나 소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좋은 것이지만 배우는 것, 즉 지식이 풍부해지는 것으로 인하여 믿음을 잃었다면 비참한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부해지는 것도 좋지만 이것 때문에 신의를 잃었다면 역시 불행한 일입니다. 성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 때문에 믿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면 이 성공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부와 성공이 어리석음과 가난함보다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라도 믿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 얻고도 믿음을 잃었다면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믿어야 할 줄 알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데 어찌합니까? 못 믿어서 불행함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믿어야 하는데 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웃을 믿어야 행복한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예수님께 찾아왔던 어떤 남자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어린 자식이 병들고 귀신들려서 아주 비참한 가운데, 여기 저기 좋다는 곳은 다 가보았지만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마저도 고칠 수가 없어 드디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무엇으로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너희와 얼마나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개탄하시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물론 이 아이의 아버지께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의사나 예수님의 제자 등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 마지막 남은 예수님을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 이 분만은 믿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못 믿는 사람입니다. 아니 안 믿는 사람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끔 제게 문제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단 말입니까? 못 믿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믿지 못합니다. 죽은 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구제 불능입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 스스로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에 보면 믿음 그 자체는 선물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주셔야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비롯하여 여로 곳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으니 어떡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믿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셨고, 말씀을 전하셨고, 여러 가지로 수고했지만 믿지 않는데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합니다. 이미 많은 이적과 능력을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또 표적을 구합니다. 또 기적을 구하며 굉장한 사건을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또 한 번 깜짝 놀랄 만한 일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일어난다면 믿겠습니까?

합리적인 이론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합리적인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증거가 믿음을 낳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증거를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치게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에 미쳐 있을 때는 그 상대방의 모든 것이 다 좋게만 보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라면 다 믿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귀하게 보입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좋고, 크면 큰 대로 좋고, 없으면 없는 것이 좋고,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좋습니다. 이 모든 조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학벌이 좋고, 성품이 좋고, 가문이 좋더라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증거 불충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따로 있으며 믿음에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먼저 있고 그리고 합리적인 이론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고마운 일뿐입니다. 신령한 눈을 떠서 보면 하나님의 역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새 소리를 들어도 하나님이 그 곳에 계시고 풀포기 하나를 보아도 이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길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이적을 구하겠습니까?

유대 사람들은 계속 표적만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 이외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주옵소서.

그러면 족하겠습니다."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무엇을 다시 보기를 원하느냐고 대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만나서 심문을 해 보았으나 끝끝내 믿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에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말을 남기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많은 기적, 그 많은 놀라운 말씀을 다 듣고, 보고했던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지 않은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사실은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믿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이 강팍하고 굳어버렸기 때문에 아무 이야기가 그들에게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들려진다면 비뚤어지게 들릴 뿐입니다. 잘못 들려지는 데는 오해가 있고 반항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아서 이제 못 하게 되었고, 들을 수 있을 때 듣지 않아서 이제 못 듣게 되었고, 알 수 있을 때 알지 않았으므로 이제 모르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성경의 증거를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9절에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보다 더 귀한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적 예수를 믿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그의 오심도 그의 사역도 그의 십자가도 그의 부활도 성경이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도, 누가도, 마가도, 베드로도, 요한도 계속 성경을 들어 말했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언을 말하고 그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예언하며 역사적 사건을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영원한 의미를 소개합니다. 내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해주며 역사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이 증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고요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하여금 내게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와 함께 마음문을 열고 성경을 대하면 성경은 조용히 내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안에서 계속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 말씀은 나를 심판하기도 하고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새로운 약속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생산합니다. 묻지만 말고 성경적 증거와 함께 성경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믿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성경을 대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믿음이기 때문에 믿지 아니하면 사랑도 없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 믿고 잘 속습니다. 잘 속는 약점을 지닌 사람이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첫째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차라리 어리석어서 믿고 사랑하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끝까지 믿고 전체를 믿어 봅시다. 자기보다 상대방을 더 믿고 생명을 걸고 믿어 봅시다. 합리적인 이론을 다 버리고 믿습니다. 그리고 자기 전부를 위탁하고 믿읍시다.

세상에 제일 속이기 쉬운 자가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말은 믿습니다. 열 번을 속았어도 또 한 번 믿습니다. 끝까지 믿어 줍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집에 숨었다가 끌려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부모는 형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마음이요, 어머니만은 내 아들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들 말을 믿지 않아도 그 어머니만은 아들 말을 믿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현대 어머니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내가 믿을 줄 아니? 내가 속을 줄 아니?" 이러다간 아이들과 멀어집니다. 속지 않는다고 현명한 어머니입니까? 속지 않겠다고 하는 어머니가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믿음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믿게 됩니다. 끝까지 믿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이롭게 하고, 자기 지혜를 자랑하고, 자기 교만에 빠지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자주 결혼 주례를 합니다. 두 사람이 팔을 끼고 나가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발 무사히 살아주길……" 분명히 사랑한다고 서로 서약했으나 현대인들은 자존심이 너무 높아 한 치도,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자존심을 살려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데 과연 사랑이 있느냐 말입니다. 사랑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모르고 산다는 것처럼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애에 치우쳐서 사랑하지도 못하고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무한히 믿고 무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믿어지지 않고, 모세를 따랐지만 그 진의를 모르고, 하나님을 믿노라 했지만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믿음도 사랑도 없기에 불행만이 있습니다. 자기가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내 눈에 별빛이 보이지 않아도 별빛은 어딘가에 비치고 있습니다. 내 손에 가진 것은 없어도 은총은 있습니다. 내 비록 실패하였어도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로 보증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절대로 의심하지 맙시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믿고, 믿을 때에 은혜 안에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불신은 교만한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안 믿어서 못 믿게 되는 불행에 살지 말고, 믿어서 강하고 믿어서 지혜롭고 믿어서 행복한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그렇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지 아니하기로 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본 적으로 족합니다. 이제 더 볼 것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경험한 것으로 족합니다. 이미 들은 것으로도 족합니다. 아무 증거도 필요치 않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 보지 아니하기로 하고 믿는 자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주의 부르심에 응하여 믿음으로 여기까지 나왔사오니 주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굽어 살피시사 너무나도 속았기에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이 불쌍하고 처절한 형편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믿을 수 있는 곳과 처지에서 믿음을 심어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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