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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여 울지 말라(누가복음 7:11-1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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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여 울지 말라(누가복음 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 본문에서는 한 극적인 장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나인'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마을에 그 동네를 향해서 들어가는 행렬과 또 이 동네에서 성 밖으로 나오는 다른 행렬이 서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성밖으로 나오는 행렬은 슬픔의 행렬이었고, 성으로 들어가는 행렬은 기쁨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들어가는 행렬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극적으로 만나게 되고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건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약 2 천년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만 우리 인간의 역사를 종합해서 단면으로 말해주고 또 현재를 사는 우리를 향해서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인간의 고통입니다. 배고픔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의 아픔이 아니라 마음의 아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가장 큰 슬픔은 대체로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죽음과 관계되지 않는 슬픔은 그런 대로 견딜 만합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의 문제에서 가장 큰 기쁨도 생기고 가장 큰 슬픔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처럼 기쁜 일이 없는가 하면, 한 생명이 죽어 가는 일처럼 답답하고 괴롭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인간의 슬픈 일의 대부분이 사망의 그늘 속에 싸여 있는 것이라 봅니다.

또 하나는 이별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은 대단히 괴롭습니다. 이별 중에서도 사별이라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이별입니다.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다시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슬픔인가 말입니다.

이에 따라서 또 하나의 슬픔은 고독입니다. 사별하고 난 뒤의 적막감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가끔 장례식에 가 보면 유족들은 무던히도 참았던 슬픔을 장례가 다 끝나고 장지에서 집으로 막 들어섰을 때, 선뜻 빈집 같은 허전함에 어쩔 줄 몰라 목놓아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별 뒤에 오는 고독은 인간 고통의 극치라 보겠습니다.

심리학자가 발표한 것을 보면 인간의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자와 사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의 슬픔, 울음, 그의 비애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비애 중 절정이며,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슬픔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망의 근거인 남편을 영원히 사별하고 과부로 된 상황에서 이 슬픔도 큰 것인데 설상가상으로 남은 하나의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그녀가 믿고 의지해 온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십니까? 자식을 사별하는 데는 뼈를 깎는 아픔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압살롬을 잃어버리고도 울었습니다. 세상에 고약한 자식들이 있긴 합니다만 압살롬은 그 대표자입니다. 재산을 달라고 하는 자식, 유산을 미리 내어놓으라고 하는 자식, 부모의 재산을 강탈하는 자식, 부모를 매질하는 자식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런 유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왕의 보좌를 빼앗기 위하여 충신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고 아버지를 향하여 쳐들어갑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피하여 시골로 산중으로 도망 다니는데 아들은 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군사를 몰고 쫓아다닙니다. 이런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구약의 법대로 라면 이런 아들은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약한 아들이지만 다윗은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면"하고 울었습니다. 사무엘하 18:33에 이런 구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천하의 고약한 아들도 죽었을 때에 그 아비는 차라리 대신 죽지 못해 안타까워 울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남편도 없는 여인에게 유일한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이 아들이 죽은 슬픔이 얼마나 큰지 헤아리기 힘듭니다. 이것은 무슨 사업이 된다 안된다, 병이 든다 건강하다, 명예롭다 불명예다 하는 흔히 생각하는 그런 고통의 종류가 아닙니다. 이 고통은 정말 가눌 수 없는 종류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청년이 죽었다는 점입니다. 장례식에 가보면 팔구십 된 노인이 돌아가시면 잠깐 슬퍼하다가도 식이 끝나고 나면 호상이라고들 합니다. 살 만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가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큰 슬픔입니다. 무능하다는 것이 아니고 절단되었다는 뜻이고, 있다 없다의 이야기가 아니고 중단되었다는 허무를 뜻합니다.

이제 이 여인은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망의 문제요, 의미의 문제요, 가치의 문제입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끝이 났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어졌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한 아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말도 그를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장례식을 치러 줄 뿐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남편도 아들도 다 갔으니 팔자나 고치라고 말하겠지요. 새로운 길을 찾으란 말입니까? 그러나 상처가 너무 깊어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혹 어떤 이는 다 지나간 일이니 잊어버리라고 하겠지요. 망각을 권해 보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고통, 상처는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혹 어떤 이는 인생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즉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말입니다. 왔다가 가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니 당연지사로 돌리라고 말한다고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여인을 보신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께 위로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길에서 두 행렬이 마주쳤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울지 말라"고 했을 때 이 여인은 그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위로의 말로 예사롭게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흔히 하는 "참아라, 사랑하라, 봉사하라, 의롭게 살아라" 하는 말과는 달랐습니다. 보통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인간 윤리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울지 말라"에는 약속이 분명했고, 영원한 소망이 분명했기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이 엄연하기에 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서 듣던 말을 또 듣는다고 빈 소리로 넘겨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말씀은 깊고 오묘하고 약속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여 울지 말라"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은 뜨거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마다 그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가지셨습니다. 불쌍한 자의 마음과 자기를 동일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슬픔에 동참하는 마음입니다. 같은 아픔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이 여인의 아픔이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의 마음을 아시고 같은 아픔을 느끼며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울지 말라." 이 여인은 이제 그 뜻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어야 했습니다. 말은 같은 말이지만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다음 시체를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고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고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가집에 가면 보통 상주와 얘기를 합니다. 세상에 죽은 자와 얘기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시체를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생명입니다. 오직 생명에 아름다움이 있고, 오직 생명에 진리가 있고, 오직 생명에 선이 있습니다. 사망에 무슨 위로가 있고, 인생무상에 어떤 위로가 있겠습니까? 부활 생명에만 위로가 있습니다. 잘 사느냐 못 사느냐에 무슨 위로가 있습니까? 문제는 생명입니다. 이 여인에게 위로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뿐입니다.

여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상여를 붙잡았을 때 상여는 멈추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이 때에 "왜 상여를 멈추고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 고 역정을 내었다면 결과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행렬이 멈추었습니다. 이만한 믿음은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상여를 멈추고 울음을 잠깐 멈추는 믿음은 있어야 합니다. 왜 멈추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일단 순종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는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상여는 대체로 꽃으로 장식합니다. 서양에서는 고급 캐딜락 리무진을 상여차로 사용합니다. 아마 미국 사람들은 고급 승용차를 가지는 것을 소원하니 죽은 다음 소원 성취하라고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옛날 상여는 그 나름대로 또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아름답게 장식을 하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또 이 화려한 상여가 가는 방향은 어디입니까? 공동 묘지입니다. 현대의 문명을 비웃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대가 마치 이 장례 행렬 같은 것이 아닙니까? 굉장한 건물, 화려한 모든 것, 시끄러운 소리 이 모든 것들 속에는 썩은 시체가 있고 냄새가 납니다.

화려한 집, 큰 집일수록 문제입니다. 속은 썩었습니다. 도대체 이 크고 화려한 집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공동의 묘지로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세대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 상여의 행렬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주께서 상여를 잡으십니다. 상여를 멈추어야 하겠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고 아무리 격할지라도 잠시 울음도 멈추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주께서 하신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죽은 시체는 조용하고 시간시간 썩어만 갑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말입니다. 이제 가던 길을 멈춥시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도 울음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계획을 중단하고 조용히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 여인도 한 가닥의 희망을 땅에 묻어야 하는 이 순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울음을 멈추고, 조용히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러분! 용기의 문제도, 소유의 문제도, 지혜의 문제도 아닙니다.

죽음 앞에 무슨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절망과 고독과 허무,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울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은 보통 말씀이 아니고 생명이 있었고, 약속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슬픔으로 보였지만 예수께는 생명으로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선에는 시체가 없었고 다만,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상여의 행렬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십시다.

이렇게 나인 성에서 나오던 행렬이 예수를 만나서 행렬을 해체하고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서 그의 어머니와 손을 잡고 성으로 되돌아갑니다.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성 밖에 묘지로 가던 행렬이 다시 동네로 들어가는 기쁨의 행렬로 변했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행렬이 되었습니다. 절망으로 치닫던 행렬이 소망으로, 슬픔과 눈물만의 행렬이 이제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어져 이 소문이 온 유대에 퍼졌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살리신 그 생명의 역사를 만방에 전하는 선교 행렬로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의미도, 방향도, 소리도 바뀌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슬픔의 행렬 속에 끼었던 우리들, 다시 한 번 주의 음성을 듣고 이제 주께서 주신 생명의 은사를 널리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들을 뿐만 아니라 죽은 행렬을 일으키고 방향을 전환시키는,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꿔 놓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인아 울지 말라, 청년아 일어나라." 이 말씀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 자비하신 주님, 화려한 것 같으나 상여와 같고, 우리의 가는 방향이 마치 저 북망산 공동 묘지로 가는 행렬과 같은 세대에 삽니다.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장송곡같이 들려옵니다. 주여! 우리의 발걸음에 긍휼하심을 베푸시고 오늘도 주의 거룩한 은총, 다시 살리시는 창조의 역사가 여기에 나타나 주옵소서. 이 행렬이 방향을 돌리게 하시고 이 죄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씀의 능력이 이 가운데 나타나서 우리의 행렬이 소망의 행렬로 선교의 행렬로 바뀌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울음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시고 찬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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