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앙인의 삶의 자세(창세기 39장 1절~6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뉴욕 타임즈」지의 조사에 따르면 179주간 동안, 즉 3년이 넘도록 비 소설계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이 쓴「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우리말로는「성공한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고 번역됩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분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주도적 성격입니다. 둘째는 목표를 확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셋째는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는 습관입니다. 넷째는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습관입니다. 자기 이익만 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함께 구합니다. 또 하나, 말을 할 때에는 꼭 듣는 것부터 먼저합니다. 먼저 경청하고 그 다음에 설득합니다. 듣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창조적 협력의 원칙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심신을 단련하는 사람입니다.
이 중에 제일 중요한 특징은 주도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주도성에 있습니다. 이 책은 그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책 가운데서 잠언 4장 23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마음을 지키라, 마음이 중요하다, 주도적인 성격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공은 그 재능과 지식과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있다는 것입니다.
빅토르 프랭크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태인 600만이 죽은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가스실(gas chamber)에까지 들어갔다가 살아 남은 사람입니다. 이후 그가 온 세계에 당시의 비참한 모습을 증거 했습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는 그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중심적 가치가 있다. 그 첫 번째는 경험적 가치다. 누가 어떤 경험을 하든지 버릴 것이 없다. 자기가 만나는 사건마다 그 경험한 것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
거기에 가치가 있다. 두 번째는 창조적 가치다. 어떤 경우에든지 새로운 일을 창조하는 창조적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태도적 가치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병 걸려 죽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어떻게 하면 고칠까 몸부림칠 것도 없습니다. 죽는다고 하는 사건 앞에서, 이제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내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태도적 가치, 이것이 매우 귀한 것이라고 그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환경을 지배합니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하는 환경을 언제나 최선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도적 인간입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누구 때문에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가 주인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도합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그러한 태도와 자세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간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신앙적인 삶의 한 패러다임(paradigm)으로 우리는 요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습니다. '제발 요셉같이'하는 소원이 있어서입니다. 왜 요셉이냐?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는 17세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것도 자기의 사랑하는 형님들에 의해 팔려갑니다. 세상에 억울하다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순이라면 어처구니없는 모순이요 죄악이라면 최악의 죄악입니다. 차라리 죽여버릴 것이지. 일생동안 쇠사슬에 묶여서 노예 생활하다 죽어 가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생 때 같은 한 사람의 귀한 생애를 일순간 노예로 만들어버리다니 이런 비참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7세에 노예로 팔려가고, 13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합니다마는 마침내 당시 최대의 강국인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야말로 해피 앤드(happy end)입니다. 가장 크게 성공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패러다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일생 동안 언제나 세 가지 질문에 도전을 받고, 이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한다." 첫째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지식에 대한 도전입니다. 세상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건마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서 잘못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많은 지식의 세계에서 내가 꼭 알아야 할 것을 알 때,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 때, 꼭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 때에 그 운명은 각각 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강한 도덕성의 도전입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너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많이 해놓고 나서 뒤에 가서 후회하고 뉘우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어차피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해야 할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지혜와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하는 질문의 도전입니다. 소망을 재정비해야 할 것입니다. 내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엮어가는 현실이 미래적 의미를 가진 것입니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항상 소망을 새롭게 하라--그것이 바른 인간의 가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요셉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우리는 요셉의 얼굴을 못 보았지만 요셉의 인격을 본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복장이 터질 노릇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받던 요셉이 형님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해졌습니다.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지난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노예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분명히 노예요, 확실한 노예였습니다 마는 노예된 과거로부터 그 마음은 항상 자유 했습니다. 보세요. 그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을 수도 없는 엄청난 과거, 이로 인해서 억울하고 한이 맺힙니다. 그러나 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잘못된 것--그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아무 일도 못해요. 이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어요. 저는 가끔 권투시합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봅니다. 그런데 평소에 잘하던 사람이 오늘따라 시원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해설자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 빨리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말이 진리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몇달 전에 그 선수가 어떤 경기에 나갔다가 크게 당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이 나서 한대 맞으면 또 쓰러질까봐 겁이 나서 자꾸 뒤로 물러서다 보니 영 형편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의 늪에서 빨리 자유해야 되는데 그 누구를 원망하고, 그 생각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원한과 억울함과 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과거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미래가 문제입니다. 모든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노예는 노예입니다. 일생 노예입니다. 노예로 죽을 것입니다. 참 비참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기능 가운데 아주 소중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성은 판단능력과 추리능력을 가졌습니다.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이성에 있습니다. 또한 이성은 미래를 추리합니다. 이렇게 되면 저렇게 될 것이다, 내일이 어떻고, 내년이 어떻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생각하는, 추리하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이성이 병들고, 이성이 타락하고, 이성이 악마의 손에 있을 때에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언제나 절망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해보나마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절약하지 않는 것은 다 모아봤자 얼마나 되겠느냐, 까짓 것 마셔버리고 말지, 라고 미리 다 생각해버리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개 보면 소위 문제아라는 아이들이 머리가 좋습니다. 미리 일생을 다 살아버렸습니다. 이러이러하니까 장가도 못 가고, 취직도 못하고, 뭐 어떻고…… 지레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의 생활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요셉, 그는 노예입니다.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갈 사람이었지만 그는 미래를 암담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적 삶의 자세입니다.
또한 현재적으로 요셉을 보세요. 그는 노예입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는 노예입니다. 제가 요셉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예는 노예인데 우등생 노예입니다.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아서 주인의 신임을 받는 노예입니다. 여러분, 노예가 주인 되려고 바득바득 애쓸 필요 없어요. 노예는 노예된 생을 일단 마스터해야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학년도 마치지 않고 대학으로 뛰겠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있어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현실을 가장 귀한 기회로 사용해서, 현실 안에서는 최선의, 우등생적인 생을 살아야 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울 학교든 시골 학교든, 좋은 학교든 나쁜 학교든 상관없이 어디서든지 우등생은 우등생입니다. 있는 처지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청년이 목사님한테 와서 상담을 합니다. 그는 소위 일류대학을 나오고, 큰 회사의 취직 시험에 합격하여 들어갔는데 다른 누구보다 진급이 빨랐습니다. 기적적으로 높이 승진하여 이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이제껏 전공했던 과목과 업무와는 관계없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면서 그는 회사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목사님 앞에 와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호소합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생을 질적으로 사세요. 양적으로 보지 말고 질적으로 보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남다른 각오를 하고 어떤 회사에 수위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인생 공부를 합니다. 나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면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아, 인생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마침내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직접 회사의 일은 하지 않지만 이 회사의 직원들이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어서 오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하고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회사의 회장님이 늘 보아도 그 청년 얼굴이 너무 좋으니까 불러놓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청년에게 당신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 회사의 이사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결국 청년은 그전보다 더 좋은 회사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실화입니다. 여러분, 실직했습니까? 실직자로서 우등생이 되세요. 내게 주어진 현실을 원망하지 마세요. 그 자리에서 우등생이 되세요. 며느리는 며느리로서의 우등생,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하면 부한 대로 현실 속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제도로 돌아가 보면 그실 노예에게는 도덕성이 없습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됩니다. 노예 주제에 무슨 종교니 진실이니를 말하는 것입니까? 노예는 도덕이 없어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죽으라면 죽고, 죽이라면 죽이는, 이것이 노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노예된 자기 신분에 상관없이 자기 정직함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요셉입니다. 요새도 보면 가난하기 때문에 나는 도덕과 관계없다, 너무나도 많이 빼앗기고 억울하기 때문에 나는 도덕에서 예외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보세요. 가난하고, 눌리고, 억압받는 사람은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억울한 생활이 자기의 부당한 생활을 다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현재의 신분으로 봐서는 도덕이나 진실, 신앙을 물을 것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성실했습니다. 파스칼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질서를 갖는다. 신체의 질서--돈과 쾌락과 권력을 목표로 한다. 정신적 질서--지식과 진리를 추구한다. 사랑의 질서--이것은 오직 신앙 지향적인 세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목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매--이렇게 계속 강조됩니다. 요셉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 보디발이 이것을 알아봅니다. 분명히 저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불과 17세의 소년이 그 집의 총무가 됩니다. 집안의 모든 것을 맡아하는, 신임 받는 노예가 됩니다. 믿을 수 있는 노예, 진실한 노예가 됩니다. 그리고 이 코스가 끝날 때, 분명 그는 총리라고 하는 또 다른 코스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신앙으로 모든 것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온유하고 충성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항상 자유 했습니다.
누가 하라 해서가 아니고, 시켜서가 아닙니다. 무서워서도 아닙니다.
다만 신앙적 인격으로, 주도적으로, 자원적으로, 창조적으로 살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5절에 그의 유명한 신앙간증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이리로 보내신 것입니다.'--요셉은 팔렸다는 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나의 현실, 그 앞에 처한 나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언제까지 절망하며, 언제까지 원망할 것입니까? 성공은 자유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이런 신앙적 자세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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