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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차원(고린도전서 1:4-9)

by 【고동엽】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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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차원(고린도전서 1:4-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종은 쳐서 소리가 날 때 비로소 종이 됩니다. 만일 힘껏 쳤는데도 종이 울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순한 쇠붙이일 뿐 종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축복에는 항상 감사가 따르며, 감사가 없는 축복은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참 신앙이란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미신에는 간절한 기원만 있고 감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감사의 종교, 희망과 희락의 종교라고 하며, 또한 이를 잔칫집에 비유하였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 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한량없는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마냥 울적해 하고 불평 불만이나 원망으로 가득찬 마음 때문에 추호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풍족한 물질의 소유만이 축복은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만이 진실한 의미에서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욕망과 불안을 불러 일으키고 공포와 새디즘적인 자만을 촉구한다면 어찌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이웃이 구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몹시 빈곤하다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 그의 생활에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면 축복은 바로 이런 자의 소유가 아니겠습니까? 주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주님의 축복이라 생각하지 않는 소유는 절대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진정한 의미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감사의 차원입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물량적이나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가 궁극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감사에는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우선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에, 혹은 하는 일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차원입니다. 이것 역시 귀중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만이 감사는 아닙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내가 본래 소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명예든가 아니면 돈이었든가? 본래 소망했던 것이 명예였던 사람이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거금을 모았다고 가정할 때, 겉으로 보기에 그는 굉장히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생의 목표가 뚜렷하고 소원이 확실한 사람만이 한 가지의 일에서나 또는 한 걸음 전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진실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저 바람이 부는대로 확고한 생의 목적이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떠한 은혜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우연이며 감사할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받은 것에 대하여 기쁨과 감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에게 축복을 준 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같은 도우심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르는 사람도 역시 감사할 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나의 땀과 피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감사할 줄 모릅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밭을 가는 농부가 손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아무리 땅을 파고 물을 주고 씨를 뿌려도 일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면 그해 농사는 아주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애써 피땀을 흘리며 노력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도우심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약간 차원을 달리하여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35에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어린아이는 받음으로써 기뻐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줌으로써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받을 때에만 기뻐하고 복되다고 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입니다.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고 좋은 옷을 입었다는 사실로써 기쁨을 얻기보다는 남을 대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기를 원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을 대접하고 도와줄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합시다. 받는 자는 불평과 원망이 있을 수 있지만 주는 자의 마음은 오로지 지극한 기쁨과 감사만이 넘쳐흐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남을 정성껏 대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주는 차원에서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성장된 인격의 소유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다음을 생각해볼 차원은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감사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으며 감사 또한 이 깨달음에 있습니다. 많은 은혜 중에 살다가 은혜 속에 죽는다 해도 깨달음이 없으면 역시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제 친구가 차를 몰고 강원도에 갔답니다. 가는 도중에 가파르고 꾸불꾸불하여 위험한 대관령 고개를 다 넘어와서 검차장 하나가 있는데, 그 가까이 에서 어떤 사람을 피하기 위해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더니 갑자기 브레이크가 터져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면서 섬뜻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만일 이 브레이크가 험준한 대관령 고개 한가운데서 터졌다면…." 그는 그만 고개를 다 내려와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사실을 너무나 감사해서 다음 주일에 하나님께 감사 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생활은 깨닫고 보면 모두가 기적입니다.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지만 깨달음이 없으면 이 기적을 알지 못하며 더불어 감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이성(異性)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성이 없다면 인간은 동물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이성이란 깨달음입니다. 똑같이 먹고 마시고 살지만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의 정성과 사랑을 깨닫고 기쁨과 감사를 느끼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간, 즉 이성을 갖지 못한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항상 수고함과 정비례합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얻은 부와 행복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눈물로 기도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새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은 단순히 '참 좋다'란 감정밖에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새 교회를 짓기 위하여 기도와 헌금을 하고 가끔 나와서 돌도 나르던 사람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교회를 보면 기쁨 이상의 감격과 경건과 감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성하고자 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가가 문제입니다. 그 깊은 깨달음 속에서 높은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본래 그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모색해 보기도 하고 지혜를 모아 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도리 없이 감옥에 갇힌 바 되었습니다. 갈 때에는 불평과 원망도 있었겠지만 그가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새로워지고 열렬해지며 전도열이 뜨겁게 불붙는 것을 보고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라고 말하며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 당함이 전도사업과 하나님의 역사에 손해나 실패가 아니고 진보임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그 순간 기쁨과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6․25사변 당시 남쪽으로 피난 나올 때였습니다. 수많은 피난민 속에 섞여 내려오는데 서로 얘기들을 나누는 중에 어떤 사람이 "난 가난이 이렇게 큰 축복인 줄 몰랐네. 만약 내가 부자였더라면 정성껏 모은 재산에 미련이 있어 집 떠날 결심을 선뜻 못했을 것 아닌가"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행복은 절대로 많은 것을 소유한 양적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강도가 들어올까 두려워하고, 유괴 당할까 두려워 함부로 밖에 내보낼 수도 없고, 사기 당할까봐 일단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면 이것이 어찌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까? 때로는 가난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현실이지만 이 모든 것이 다 축복이었음을 깨닫고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달을 때 그 속에 깊은 감사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노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선물이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고 또 부족함 없이 은사로 채워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상하고 세밀한 은사적인 축복이 없으면 단 일초라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는 사람에겐 신비로운 은혜와 감사가 충만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감사의 차원은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풍족한 은혜를 누린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역시 불안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풍요롭지만 내일은…? 금년은 이렇게 풍년이 들었지만 내년은? 또 내가 사는 동안은 행복했지만 죽으면? 이런 등등의 의심은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만을 고조시킬 것입니다.
항상 위기 의식을 느끼며 마음껏 기뻐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일촉즉발인 한반도의 정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미군이 계속 한국을 방어해 줄 것인가?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믿지 못하고 또 미국을 이토록 의존하며 살았습니까?
그보다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 하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언약을 온전히 믿는 마음가짐으로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는 끝까지 견고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끝날 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우리는 오직 감사드리는 일에 열중하도록 합시다.
약속과 믿음, 이것만이 진실한 감사의 차원입니다. 믿음과 감사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 속에 소망과 새로운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축복을 받으면 그의 가슴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고, 스스로 우러나오는 감사는 또한 승리를 약속해 줍니다. 울며불며 원망하고 애원하는 기도보다는 감사 찬송을 부르며 자신이 수고한 첫 열매를 정성껏 바치는 그 마음에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그 마음 위에 주님은 더 큰 감사의 제목을 선물로 주심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승리란 정복도 아니요 많은 소유도 아닙니다. 이 진정한 승리란 끝없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 그뿐 아니라 그 속에 축복과 승리의 기쁨이 있음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우리들을 치열한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끝날 까지 감사의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감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 앞에 다시금 기도와 영광과 찬송을 드립니다.
눈이 있으되 볼 수 없는 저희들은 주님의 놀라운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드리지도 못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주님의 성령을 허락하시어 주님의 축복을 깨닫고 감격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감사와 더불어 기도하고 감사와 더불어 승리하여 오로지 주께 영광 돌리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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