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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라(호세아 6장 1~6절)

by 【고동엽】 202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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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라(호세아 6장 1~6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빚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바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하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잊으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려고 하는 노력이나 배우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잊으려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어차피 알아도 해결의 길은 없기 때문이며 개인이 무력해진 세상에 사는 까닭에 잠시라도 고통과 번뇌를 잊어 보려고 갖가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지 아니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안 것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문제들은 알지 아니하려는 부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흐린 정신을 맑게 하자는 것이 아니요 맑은 정신을 흐리게 하자는 것입니다. 면역이 그 과제가 되어버린 세대입니다. 지식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몰라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세대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해서 고민이 아니라 몰랐어야 할 것, 또는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 세대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성경에는 중대한 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 말씀이 곧 선교의 근본 철학이 되는 말씀입니다. 몰라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려야 하고 알리는 일이 곧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모르면 어렵고 알면 쉽습니다. 모르면 죽고 알면 사는 것입니다. 지식이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이 지식과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서 1장 18절에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식자우환(識者優患)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보신탕 집 앞을 지나다가 그 집 앞에 매어 놓은 개 5마리가 싸우면서 점심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개들이 비록 아무리 영리하다 할지라도 이 집이 어떤 집이란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저 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앞에 놓여질 비참한 운명을 미리 안다면 그 다가오는 운명 앞에 한 순간인들 어찌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까? 차라리 모르기가 다행입니다. 피난가는 어머니 등에서 고이 잠든 아이를 믿음이 있어서 평안하다고 말합니다만 은 실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실상 알아서 괴롭기보다는 오히려 모르는 편이 더욱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있어질 일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되겠습니까? 어떤 철학가는 말했습니다. "동물이 되어서 평안하기보다는 인간이 되어서 고민하며 살고 싶다"고.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고민의 이유는 사실 아닌 것에 쏠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일, 혹은 가능성은 50%도 안 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며 고민합니다. 한편으로는 전혀 없는 일,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생각하며 근심하며 기대하며 환상 속에서 번민하고 있습니다.

꿈과 현실을 혼돈 하는 몽유병 환자처럼 꿈에서 꿈으로 이어가면서 근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Reality)을 긍정해야 합니다. 종말적이며 결정적인 사실과 불가피한 실제적 사건에 대하여 냉정하게 생각할 줄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알아서 우환이라는 것은 사실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몰랐기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평화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어떤 날 장례식이 있어서 교회 장지에 갔다가 장의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어떤 트럭이 쌀가마니처럼 보이는 짐을 만재하고 저희가 탄 차를 앞질러서 가면서 속도를 높이는 때에 가마니 하나가 떨어졌는데, 트럭 운전사는 이 사실을 모르고 벌써 멀리 가버렸습니다.

그때 장의차 운전사가 차를 급정거하여 멈춰 놓고 내려가 그 쌀가마니를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동네 청년들이 이를 보고서 그들은 저희 동네에 떨어진 것이니까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여 한판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지혜있는 교우 한 분이 그 가마니를 열어 보았더니 쌀이 아니고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쌀이 아니고 소금이란 말을 듣고서야 싸움은 끝났습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 지도 모르고 그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왜?'라고 하는 물음을 어떻게 라는 물음에 자연스런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어떻게만 생각하고 '왜'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묻지 않고 있습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이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줍니다.

엄격히 따져서 생각한다면 모든 죄와 악도 실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를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의 그 무서운 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평하셨습니다. 알았으므로 의에 이르고 모를 때에 죄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성을 내려다보시면서 다가오는 멸망의 날을 아시는 예수님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네 눈에 숨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는 모르기 때문에 화를 자청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성서는 이에 대하여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이 모든 문제에 해결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나를 아는 길이며 세상을 아는 길이 되고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나를 알고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여호와를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 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다"라고 의미 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자기를 아는 것이며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식은 결코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칼발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객체가 아니고 주체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 심지어는 있으나마나 한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바로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모르면 곧 나는 내가 아니며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질적이며 동시에 이러한 관련성 속에 있는 것이 인간 자신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대, 즉 성숙의 세대가 온다고 예언한 신학자가 있습니다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결국 절망의 세대에 이어서 미신의 세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이 설명을 다 못합니다. 보건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문제는 불가피적이요 필연적이며 어떤 뜻에서는 숙명적이고 근본적이며 절대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아는 지식은 진실로 근심을 더하며 하나님 없이 얻은 물질은 그 자신을 멸망케 하고 하나님 없이 가진 권력은 자기와 백성을 다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 넣는 요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기에 내 문제의 해결도 세계 문제의 해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떠한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까? 본문 속에서 다시 이 물음의 해답에로 발전시켜 보십시다. 본문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리시며 찢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의를 미워하시며 거짓을 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의하고 가증한 자의 제사를 거절하시며 외식하는 자의 예배를 물리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며, 행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기다려서 심판하시는 법과 같은 피동적 의가 아니고 나아가서 의를 이루시는 능동적인 의이시며, 관념상의 의가 아니라 자신이 실현하시는 살아 있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의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심판하시며 죄인의 생활에 직접 간섭하시사 불의를 꾸짖고 모든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스스로 불의를 떠나게 하며 거짓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바로 그것이 생동적인 하나님의 의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팔짱을 끼고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살아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곧 경건이 하나님을 아는 첩경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인간의 첫 반응은 곧 두려움인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진노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니 곧 의로운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넓고 높으며 깊은 사랑을 아는 것이 그 속에 있는 나와 세상을 아는 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 만물의 주인을 아는 것은 본래적인 철학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것이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곧 기독교입니다. 이 사랑은 구체적이요, 행동적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어서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사랑의 구체적인 표식입니다. 이 사랑은 진노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바르트).

이 사랑은 의롭고 현실적인 사랑이며 적극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생명의 근본이라는 뜻도 있으며 권위의 근본이요, 가치의 근본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가장 큰 뜻은 하나님의 진노적인 의로운 사랑을 가리킨 말입니다. 때리는 사랑, 무서운 매질 속에 깊이 있는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의 글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지 말고 어머니라 했으면 어떠냐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육신의 아버지가 너무 엄해서 자칫 잘못하면 때리거나 책망하고 해서 아버지의 인상이 너무 무섭게 들어 있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그 무서운 아버지가 생각나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기계적인 의가 아니고 인격적인 의이십니다. 니느웨 성을 40일 후에는 멸망시키기로 이미 정하시고 이곳에 요나를 보내어 통고까지 하셨으나 이제 그 성이 회개할 때 이를 취소하신 하나님이시며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죄로 아합왕에게 멸망이 작정되었었지만 그가 겸비하게 회개할 때 곧 그 작정을 고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의를 확증하셨고 사랑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길입니다. 죄악에 빠지며 끝내 회개하지 아는 백성을 치시며 포로 되게도 하시지만 기약이 차서는 반드시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른 비와 그리고 늦은 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른 비라고 하면 내 뜻대로 되며 내가 계획한 시간 앞에 내가 기대하는 대로 형통케 되는 은총을 말합니다. 그러나 늦은 비라고 하는 것은 나의 뜻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는 계획이나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서 되어지지 않는 은총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이제는 끝났다고 손을 들 때에 하나님은 역사 하시고 내가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바로 그 때에 늦은 비의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좁은 의견과는 달리 역사를 초월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모순도 부조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모든 악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니다.

늦은 비의 은혜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즉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을 어찌하여 미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주신 세상인데 어찌하여 절망하려 합니까? 하나님을 힘써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깊은 사랑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번제보다도 지식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만날만한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곧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이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힘써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fp미야 29장 13절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나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아는 길은 여기 있습니다.

① 성경을 통하여 입니다. 벌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것입니다.

② 성령 안에서 압니다. 성령의 역사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성경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③ 구체적인 현실을 통하여 압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 안에서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에 순종하며 이미 주신 말씀을 실천하면서 몸으로 부딪쳐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멍에를 메고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문제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없어서도 몰라서도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써서 여호와를 알 것입니다. 그 때에 생명의 길, 소망의 길은 찬란히 열릴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라(호세아 6장 1~6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빚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바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하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잊으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려고 하는 노력이나 배우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잊으려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어차피 알아도 해결의 길은 없기 때문이며 개인이 무력해진 세상에 사는 까닭에 잠시라도 고통과 번뇌를 잊어 보려고 갖가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지 아니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안 것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문제들은 알지 아니하려는 부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흐린 정신을 맑게 하자는 것이 아니요 맑은 정신을 흐리게 하자는 것입니다. 면역이 그 과제가 되어버린 세대입니다. 지식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몰라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세대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해서 고민이 아니라 몰랐어야 할 것, 또는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 세대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성경에는 중대한 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 말씀이 곧 선교의 근본 철학이 되는 말씀입니다. 몰라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려야 하고 알리는 일이 곧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모르면 어렵고 알면 쉽습니다. 모르면 죽고 알면 사는 것입니다. 지식이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이 지식과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도서 1장 18절에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식자우환(識者優患)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보신탕 집 앞을 지나다가 그 집 앞에 매어 놓은 개 5마리가 싸우면서 점심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개들이 비록 아무리 영리하다 할지라도 이 집이 어떤 집이란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저 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앞에 놓여질 비참한 운명을 미리 안다면 그 다가오는 운명 앞에 한 순간인들 어찌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까? 차라리 모르기가 다행입니다. 피난가는 어머니 등에서 고이 잠든 아이를 믿음이 있어서 평안하다고 말합니다만 은 실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실상 알아서 괴롭기보다는 오히려 모르는 편이 더욱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있어질 일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되겠습니까? 어떤 철학가는 말했습니다. "동물이 되어서 평안하기보다는 인간이 되어서 고민하며 살고 싶다"고.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고민의 이유는 사실 아닌 것에 쏠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일, 혹은 가능성은 50%도 안 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며 고민합니다. 한편으로는 전혀 없는 일,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생각하며 근심하며 기대하며 환상 속에서 번민하고 있습니다.

꿈과 현실을 혼돈 하는 몽유병 환자처럼 꿈에서 꿈으로 이어가면서 근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Reality)을 긍정해야 합니다. 종말적이며 결정적인 사실과 불가피한 실제적 사건에 대하여 냉정하게 생각할 줄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알아서 우환이라는 것은 사실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몰랐기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평화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어떤 날 장례식이 있어서 교회 장지에 갔다가 장의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어떤 트럭이 쌀가마니처럼 보이는 짐을 만재하고 저희가 탄 차를 앞질러서 가면서 속도를 높이는 때에 가마니 하나가 떨어졌는데, 트럭 운전사는 이 사실을 모르고 벌써 멀리 가버렸습니다.

그때 장의차 운전사가 차를 급정거하여 멈춰 놓고 내려가 그 쌀가마니를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동네 청년들이 이를 보고서 그들은 저희 동네에 떨어진 것이니까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여 한판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지혜있는 교우 한 분이 그 가마니를 열어 보았더니 쌀이 아니고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쌀이 아니고 소금이란 말을 듣고서야 싸움은 끝났습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 지도 모르고 그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왜?'라고 하는 물음을 어떻게 라는 물음에 자연스런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어떻게만 생각하고 '왜'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묻지 않고 있습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이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줍니다.

엄격히 따져서 생각한다면 모든 죄와 악도 실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를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의 그 무서운 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평하셨습니다. 알았으므로 의에 이르고 모를 때에 죄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성을 내려다보시면서 다가오는 멸망의 날을 아시는 예수님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네 눈에 숨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는 모르기 때문에 화를 자청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성서는 이에 대하여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이 모든 문제에 해결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나를 아는 길이며 세상을 아는 길이 되고 따라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는 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나를 알고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여호와를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 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다"라고 의미 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자기를 아는 것이며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식은 결코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칼발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객체가 아니고 주체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 심지어는 있으나마나 한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바로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모르면 곧 나는 내가 아니며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질적이며 동시에 이러한 관련성 속에 있는 것이 인간 자신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대, 즉 성숙의 세대가 온다고 예언한 신학자가 있습니다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결국 절망의 세대에 이어서 미신의 세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이 설명을 다 못합니다. 보건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문제는 불가피적이요 필연적이며 어떤 뜻에서는 숙명적이고 근본적이며 절대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아는 지식은 진실로 근심을 더하며 하나님 없이 얻은 물질은 그 자신을 멸망케 하고 하나님 없이 가진 권력은 자기와 백성을 다 절망의 수렁으로 몰아 넣는 요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기에 내 문제의 해결도 세계 문제의 해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떠한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까? 본문 속에서 다시 이 물음의 해답에로 발전시켜 보십시다. 본문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리시며 찢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의를 미워하시며 거짓을 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의하고 가증한 자의 제사를 거절하시며 외식하는 자의 예배를 물리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며, 행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기다려서 심판하시는 법과 같은 피동적 의가 아니고 나아가서 의를 이루시는 능동적인 의이시며, 관념상의 의가 아니라 자신이 실현하시는 살아 있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의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심판하시며 죄인의 생활에 직접 간섭하시사 불의를 꾸짖고 모든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스스로 불의를 떠나게 하며 거짓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바로 그것이 생동적인 하나님의 의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팔짱을 끼고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살아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곧 경건이 하나님을 아는 첩경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인간의 첫 반응은 곧 두려움인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깊이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진노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니 곧 의로운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넓고 높으며 깊은 사랑을 아는 것이 그 속에 있는 나와 세상을 아는 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 만물의 주인을 아는 것은 본래적인 철학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것이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곧 기독교입니다. 이 사랑은 구체적이요, 행동적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어서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사랑의 구체적인 표식입니다. 이 사랑은 진노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바르트).

이 사랑은 의롭고 현실적인 사랑이며 적극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생명의 근본이라는 뜻도 있으며 권위의 근본이요, 가치의 근본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가장 큰 뜻은 하나님의 진노적인 의로운 사랑을 가리킨 말입니다. 때리는 사랑, 무서운 매질 속에 깊이 있는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의 글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지 말고 어머니라 했으면 어떠냐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육신의 아버지가 너무 엄해서 자칫 잘못하면 때리거나 책망하고 해서 아버지의 인상이 너무 무섭게 들어 있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그 무서운 아버지가 생각나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기계적인 의가 아니고 인격적인 의이십니다. 니느웨 성을 40일 후에는 멸망시키기로 이미 정하시고 이곳에 요나를 보내어 통고까지 하셨으나 이제 그 성이 회개할 때 이를 취소하신 하나님이시며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죄로 아합왕에게 멸망이 작정되었었지만 그가 겸비하게 회개할 때 곧 그 작정을 고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의를 확증하셨고 사랑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길입니다. 죄악에 빠지며 끝내 회개하지 아는 백성을 치시며 포로 되게도 하시지만 기약이 차서는 반드시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른 비와 그리고 늦은 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른 비라고 하면 내 뜻대로 되며 내가 계획한 시간 앞에 내가 기대하는 대로 형통케 되는 은총을 말합니다. 그러나 늦은 비라고 하는 것은 나의 뜻과는 달리 내가 생각하는 계획이나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서 되어지지 않는 은총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이제는 끝났다고 손을 들 때에 하나님은 역사 하시고 내가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바로 그 때에 늦은 비의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좁은 의견과는 달리 역사를 초월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모순도 부조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모든 악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니다.

늦은 비의 은혜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즉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을 어찌하여 미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주신 세상인데 어찌하여 절망하려 합니까? 하나님을 힘써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깊은 사랑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번제보다도 지식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만날만한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곧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이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힘써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fp미야 29장 13절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나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아는 길은 여기 있습니다.

① 성경을 통하여 입니다. 벌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것입니다.

② 성령 안에서 압니다. 성령의 역사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성경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③ 구체적인 현실을 통하여 압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 안에서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에 순종하며 이미 주신 말씀을 실천하면서 몸으로 부딪쳐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멍에를 메고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문제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없어서도 몰라서도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써서 여호와를 알 것입니다. 그 때에 생명의 길, 소망의 길은 찬란히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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