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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기를 잊지 말라(욥기 36장 17절~33절)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그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구름의 펴임과 그의 장막의 울리는 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그가 번개빛으로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이런 것들로 만민을 징벌하시며 이런 것들로 식물을 풍비히 주시느니라. 그는 번개빛으로 그 두 손을 싸시고 그것을 명하사 푯대를 맞추게 하시나니 그 울리는 소리가 풍우를 표시하고 육축에게까지 그 올라오는 것을 표시하느니라.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내가 만일 나이팅게일이라면
나이팅게일처럼 노래하고
내가 만일 종달새라면
종달새처럼 하늘을 날 터인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끝없이 하나님을 찬양하여
나의 창조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사람으로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인의 시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은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여기에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경륜의 목표가 있습니다. 누구를 어느 길로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십니다. 찬양을 온전케 하고, 찬양을 진실케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2년 전에 우리 교회 대학생들을 포함한 대학생 700여 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여름 수양회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한창 무덥고 비도 많이 오는 때였지만 학생들과 함께 많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바로 그날 저녁, 어느 분이 아들을 데리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이야기에 따르면 자기 아들이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하지 말라는 일을 부득부득 저지르고, 심지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았답니다. 그 아들이 수양회에 다녀와서는 아버지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서 말하더랍니다. "아버지, 그 동안 잘못했습니다. 속 많이 썩여 드린 것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를 사랑해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이게 얼마 만에 듣는 아버지 소리냐" 하면서 울고 울다가 아들 손목을 잡고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이제부터 이 아이를 따라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하시고는 과연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계십니다.
여러분, 부모가 되어서 자식한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어서 효도하기를 바랍니까? 출세해 주기를 바랍니까? 이것저것 다 없어도 좋으니 다만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합니다'하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한테 바라는 것이 그러하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또한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만을 원하시며.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다.' 목에 금메달을 걸었다고 해서 승자가 아닙니다. 자기 발 밑에 원수를 때려눕혔다고 해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웃어야 합니다. 웃어도 마지막에 웃어야 합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마지막에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라도 참으로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요 승리자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옳게 산 사람입니다.
찬양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중에서 웁니다. 원망합니다. 증오합니다. 그러나 형통(亨通)한 날에 가서는 교만합니다. 방탕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없던 것이 생기면, 부자가 되면, 직업이 생기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런 조건이 이루어졌을 때에 하나님 찬양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제 병을 고쳐 주시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하던 사람도 그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에 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지 술집으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주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남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려 들겠지만 이 사람 스스로는 남이 생각 못하는 것을 보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위로하러 갔던 사람이 도리어 위로를 받고 돌아오는 은혜가 많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남이 원망하는 대로 다 원망하고, 남이 욕하는 대로 다 욕한다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점에서 특별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원망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시다시피 원망하는 사람은 늘 원망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무엇합니까? 불평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데려다놓아도 불평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구제가 불가능한 체질입니다. 아무도 고치지 못합니다. 이러이러한 것만 해결되면 불평하지 않겠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더 불평하고, 더 원망합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디에서나 감사합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감사합니다. 환경이나 여건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욥기는 고난의 책입니다. 이 고난은 의로운 고난입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 욥기는 그러한 고난 속에서 신앙을 간증한 서사시(敍事詩)입니다.
욥은 동방의 갑부였습니다.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원수들이 와서 다 약탈해갔습니다. 다 불질러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욥은 열 남매를 둔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 남매가 의좋게 자라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맏형의 집에 모여 잔치를 하면서 먹고 마시다가 느닷없이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열 남매가 몰살을 당했습니다. 태풍에 집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부모의 자랑이요 기쁨이던 열 남매가 모두 죽었습니다. 이처럼 끔찍한 일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갑자기 당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배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지경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1:20)" 하면서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욥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지경에서도 "하나님,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찬양 돌리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 고통이 장기화(長期化)합니다. 고통이 더욱더 깊어갑니다. 마침내 그의 부인은 고난 당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주하면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이제 욥은 몸까지 병들기 시작합니다. 종처(腫處)가 낫지 않아서 기왓장으로 긁으면서 괴로워했고, 잿더미에 뒹굴었습니다. 몸에서는 구더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통 중에 있을 때에 그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고 했습니다마는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위로가 오히려 비난처럼 들려왔습니다. 저희들 딴에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말들이 저주처럼 들렸을 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 외롭게 고난받는 사람한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고통을 겪어보았습니까? 위로가 비난처럼, 친절한 말이 저주처럼 들리는 고통을 말입니다. 어떠한 위로도 통하지 않는 그러한 고통을 욥은 겪고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13:24)."
'어찌하여 나를 원수처럼 취급하십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고독하여 몸부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세 사람의 친구가 다녀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찾아와서는 세 가지 충고와 함께 한 가지 권면의 말을 합니다. 본문 말씀을 봅시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24절)." 어떤 형편,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 찬송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후는 욥한테 충고도 합니다. 먼저 18절을 봅시다.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욥은 재산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자녀가 다 죽어버리는 고난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가난과 질병, 손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고통을 모두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 의와 명예, 자기 도덕성과 결백성, 그리고 신앙심과 경건을 무시당하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병들고,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친구들이 찾아와서 '이 고통이 모두 너의 죄 때문이다' 라고 할 때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가 지금 저주를 받고 있는 것' 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욥은 분노합니다. 징책을 대적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하십니까? 왜 대적으로 여기십니까?' 이에 대하여 엘리후는 말합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이 고통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자비가 있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는 것을 알라,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잠시 동안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으나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러므로 이 징책을 대적할 생각은 말아라, 이 징책을 감수하라, 받아들이라, 믿음에서 떠나지 말아라.' 그렇습니다. 고난당할 때에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충고는 20절에 있습니다.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여기에 '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욥은 너무 괴로워서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 죽여주십시오' 합니다.
'내가 육신 밖에서 주를 뵈오리이다' 하고, 3장을 보면 심지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합니다. 어찌하여 태어났던고, 어찌하여 어머니가 젖을 먹였던고, 어찌하여 내가 죽어서 나오지 않고 살아서 나왔던고 하면서 생 자체를 불행하게 여깁니다. 죽음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음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 자체에 대해서 낙심하지 맙시다. 생의 의욕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절망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어느 때 어떤 경우에라도, 한숨을 쉬면서 죽기를 바라는 마음 ---- 생각만으로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죽기를 소원했다가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명을 빼앗기는, 그러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생 자체에 대해서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건강하게 살든 병든 몸으로 살든, 부자로 살든 가난하게 살든,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 높은 가치에 대해서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엘리후는 세 번째로 충고합니다.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21절)."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빼앗겼으니 빼앗은 자를 미워하고, 비난받았으니 나도 저를 비난하며, 배반당했기에 나도 배반한 자를 증오하는 것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은 말했습니다.
'두 개의 악이 하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Two wrongs do not make one right).'
때때로 우리는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항해서 의를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악한 사람 나쁜 사람을 고치겠다고 하다가 도리어 스스로가 더 나빠집니다. 악을 악으로 대항할 때에 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아무리 의를 지향한 행위라 하더라도 악은 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처한 이 고난과 역경, 이 모순과 부조리를 악한 방법으로 대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엘리후가 권면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24절)." '찬송'이란 히브리어로 '할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찬양하다, 칭찬하다, 자랑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할랄' 이외에도 '야다' '바락' 혹은 '자마르' 등 여러 가지 단어가 있는데 대체로 '감사한다, 고백한다, 하나님을 찬양한다, 송축한다, 찬송한다' 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랑과 감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한 응답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찬양은 조건반사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어떠한 여건이 갖추어져야만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반응입니다.
깊은 깨달음이 있을 때에는 어디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신앙을 바로 고백하는 순간에는 어디에서든지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찬송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은혜에 대한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과 여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맙시다.
'언젠가는 감사할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그럴 형편이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별천지가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만 나의 내적 존재의 문제입니다. 기쁠 때에 찬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찬양할 때에 기뻐하게 된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때에 찬양할 수 있겠지만, 찬양함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부인이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날마다 권면하지만 그는 술을 좋아해서 저녁마다 곤드레만드레 되어 간신히 집을 찾아 들어오는 형편입니다. 이런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라고 부인은 고생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도 역시 밤늦게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아니나다를까, 남편이 또 엉망으로 취해서 쓰러져 있습니다. 방으로 끌어다놓고 씻어주고 옷을 갈아 입혀주니 남편은 자리에 누워서 세상 모르고 자는 것입니다. 부인이 그 옆에서 기도를 하다가 생각해보니 신세타령이 나옵니다. 마음이 울적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러려고 결혼했나,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에, 이제 눈물까지 흐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감동하셔서 문득 지난주일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부인은 감사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작정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마는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감사할 것이 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속썩이는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지. 저렇게 술이 만취되어 가지고도 사고 당하지 않고 자기 집 찾아오는 것을 보면 장하지. 언젠가는 저 사람도 사람될 날이 오겠지.' 그뿐입니까? 술을 그렇게 많이 먹어도 아직까지 건강하니 감사하고 본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나까지 못 나가게 하는 것은 아니니 감사하고 ----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니 감사할 것 천지더랍니다.
그래서 얼굴이 점점 밝아지고 빛이 납니다. 옆에 누워 자던 남편이 목이 말라서 눈을 떠보니 울고 있어야 할 아내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아닙니까? "무엇이 좋아서 웃소?" 하고 물으니 그 부인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너무 고마운 것이 많아서 그래요." 그러면서 고마운 것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하더랍니다. "예수 믿어줄 테니 걱정 마시오."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이 어떤 사건 뒤에 나오는 것인 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기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앞에 예수님이 서 계시더랍니다. 예수님의 영접을 받고 기뻐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자기가 걸어온 길이 주욱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발자국이 네 개더랍니다. '혼자 걸어왔는데 어째서 두 사람 발자국이 생겼을까?' 생각할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자세히 보니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한 사람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저기에는 왜 발자국이 두 개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너무 힘들어하기에 내가 너를 업고 지나왔다."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내 힘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교만한 생각을 버립시다. 내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주를 잊을 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셨고, 내가 어려운 길을 갈 때에 주께서 나를 업어 옮겨주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 나를 지키고 보호하셔서 오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감사를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 찬양하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가장 으뜸가는 찬양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내일 아침 십자가 지실 것을 아시고도 저녁에 성만찬 예식을 행하십니다.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실 때에, 밤새워 마지막 기도를 하러 가실 때에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십니다(30절).
십자가의 길을 주님은 찬양하며 가십니다. 그러나 십자가는커녕 변변치 않은 괴나리봇짐 하나를 지고 가면서도 우리는 무슨 불평이 이다지 많은 것입니까? 무엇이 그리 원망스럽고, 무엇이 그리 복잡합니까? 주님은 그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찬송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찬송을 잊지 맙시다.
먼저 찬송할 것이요, 깊이 찬송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송을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진실한 찬송이 나오기까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주님의 경륜 안에서 역사 하실 것입니다.
깨닫고 찬송하고, 믿고 찬송하며, 경건하게 찬송합시다. 그때에 이 찬송이 능력으로 바꾸어져서, 빌립보 감옥의 문이 열린 것처럼 이 찬송의 능력으로 오늘을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욥기 36장 17절~33절)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그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구름의 펴임과 그의 장막의 울리는 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그가 번개빛으로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이런 것들로 만민을 징벌하시며 이런 것들로 식물을 풍비히 주시느니라. 그는 번개빛으로 그 두 손을 싸시고 그것을 명하사 푯대를 맞추게 하시나니 그 울리는 소리가 풍우를 표시하고 육축에게까지 그 올라오는 것을 표시하느니라.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내가 만일 나이팅게일이라면
나이팅게일처럼 노래하고
내가 만일 종달새라면
종달새처럼 하늘을 날 터인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끝없이 하나님을 찬양하여
나의 창조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사람으로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인의 시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은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여기에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경륜의 목표가 있습니다. 누구를 어느 길로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십니다. 찬양을 온전케 하고, 찬양을 진실케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2년 전에 우리 교회 대학생들을 포함한 대학생 700여 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여름 수양회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한창 무덥고 비도 많이 오는 때였지만 학생들과 함께 많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온 바로 그날 저녁, 어느 분이 아들을 데리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이야기에 따르면 자기 아들이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하지 말라는 일을 부득부득 저지르고, 심지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았답니다. 그 아들이 수양회에 다녀와서는 아버지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면서 말하더랍니다. "아버지, 그 동안 잘못했습니다. 속 많이 썩여 드린 것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를 사랑해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이게 얼마 만에 듣는 아버지 소리냐" 하면서 울고 울다가 아들 손목을 잡고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이제부터 이 아이를 따라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하시고는 과연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계십니다.
여러분, 부모가 되어서 자식한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어서 효도하기를 바랍니까? 출세해 주기를 바랍니까? 이것저것 다 없어도 좋으니 다만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합니다'하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한테 바라는 것이 그러하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또한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만을 원하시며.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다.' 목에 금메달을 걸었다고 해서 승자가 아닙니다. 자기 발 밑에 원수를 때려눕혔다고 해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웃어야 합니다. 웃어도 마지막에 웃어야 합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마지막에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라도 참으로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요 승리자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옳게 산 사람입니다.
찬양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중에서 웁니다. 원망합니다. 증오합니다. 그러나 형통(亨通)한 날에 가서는 교만합니다. 방탕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없던 것이 생기면, 부자가 되면, 직업이 생기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런 조건이 이루어졌을 때에 하나님 찬양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제 병을 고쳐 주시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하던 사람도 그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에 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지 술집으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가지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주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남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려 들겠지만 이 사람 스스로는 남이 생각 못하는 것을 보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위로하러 갔던 사람이 도리어 위로를 받고 돌아오는 은혜가 많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남이 원망하는 대로 다 원망하고, 남이 욕하는 대로 다 욕한다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점에서 특별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원망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시다시피 원망하는 사람은 늘 원망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무엇합니까? 불평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데려다놓아도 불평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구제가 불가능한 체질입니다. 아무도 고치지 못합니다. 이러이러한 것만 해결되면 불평하지 않겠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더 불평하고, 더 원망합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디에서나 감사합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감사합니다. 환경이나 여건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욥기는 고난의 책입니다. 이 고난은 의로운 고난입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 욥기는 그러한 고난 속에서 신앙을 간증한 서사시(敍事詩)입니다.
욥은 동방의 갑부였습니다.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원수들이 와서 다 약탈해갔습니다. 다 불질러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욥은 열 남매를 둔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 남매가 의좋게 자라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맏형의 집에 모여 잔치를 하면서 먹고 마시다가 느닷없이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열 남매가 몰살을 당했습니다. 태풍에 집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부모의 자랑이요 기쁨이던 열 남매가 모두 죽었습니다. 이처럼 끔찍한 일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갑자기 당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배에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지경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욥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1:20)" 하면서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욥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지경에서도 "하나님,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찬양 돌리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 고통이 장기화(長期化)합니다. 고통이 더욱더 깊어갑니다. 마침내 그의 부인은 고난 당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주하면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이제 욥은 몸까지 병들기 시작합니다. 종처(腫處)가 낫지 않아서 기왓장으로 긁으면서 괴로워했고, 잿더미에 뒹굴었습니다. 몸에서는 구더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통 중에 있을 때에 그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고 했습니다마는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위로가 오히려 비난처럼 들려왔습니다. 저희들 딴에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말들이 저주처럼 들렸을 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 외롭게 고난받는 사람한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고통을 겪어보았습니까? 위로가 비난처럼, 친절한 말이 저주처럼 들리는 고통을 말입니다. 어떠한 위로도 통하지 않는 그러한 고통을 욥은 겪고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13:24)."
'어찌하여 나를 원수처럼 취급하십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고독하여 몸부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세 사람의 친구가 다녀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찾아와서는 세 가지 충고와 함께 한 가지 권면의 말을 합니다. 본문 말씀을 봅시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24절)." 어떤 형편,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 찬송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후는 욥한테 충고도 합니다. 먼저 18절을 봅시다.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욥은 재산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자녀가 다 죽어버리는 고난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가난과 질병, 손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고통을 모두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 의와 명예, 자기 도덕성과 결백성, 그리고 신앙심과 경건을 무시당하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병들고,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친구들이 찾아와서 '이 고통이 모두 너의 죄 때문이다' 라고 할 때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가 지금 저주를 받고 있는 것' 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욥은 분노합니다. 징책을 대적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하십니까? 왜 대적으로 여기십니까?' 이에 대하여 엘리후는 말합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이 고통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자비가 있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는 것을 알라,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잠시 동안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으나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러므로 이 징책을 대적할 생각은 말아라, 이 징책을 감수하라, 받아들이라, 믿음에서 떠나지 말아라.' 그렇습니다. 고난당할 때에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충고는 20절에 있습니다.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여기에 '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욥은 너무 괴로워서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 죽여주십시오' 합니다.
'내가 육신 밖에서 주를 뵈오리이다' 하고, 3장을 보면 심지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합니다. 어찌하여 태어났던고, 어찌하여 어머니가 젖을 먹였던고, 어찌하여 내가 죽어서 나오지 않고 살아서 나왔던고 하면서 생 자체를 불행하게 여깁니다. 죽음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음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 자체에 대해서 낙심하지 맙시다. 생의 의욕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절망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어느 때 어떤 경우에라도, 한숨을 쉬면서 죽기를 바라는 마음 ---- 생각만으로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죽기를 소원했다가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명을 빼앗기는, 그러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생 자체에 대해서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건강하게 살든 병든 몸으로 살든, 부자로 살든 가난하게 살든,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 높은 가치에 대해서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엘리후는 세 번째로 충고합니다.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21절)."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빼앗겼으니 빼앗은 자를 미워하고, 비난받았으니 나도 저를 비난하며, 배반당했기에 나도 배반한 자를 증오하는 것 이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은 말했습니다.
'두 개의 악이 하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Two wrongs do not make one right).'
때때로 우리는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항해서 의를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악한 사람 나쁜 사람을 고치겠다고 하다가 도리어 스스로가 더 나빠집니다. 악을 악으로 대항할 때에 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아무리 의를 지향한 행위라 하더라도 악은 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처한 이 고난과 역경, 이 모순과 부조리를 악한 방법으로 대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엘리후가 권면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24절)." '찬송'이란 히브리어로 '할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찬양하다, 칭찬하다, 자랑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할랄' 이외에도 '야다' '바락' 혹은 '자마르' 등 여러 가지 단어가 있는데 대체로 '감사한다, 고백한다, 하나님을 찬양한다, 송축한다, 찬송한다' 와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랑과 감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한 응답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찬양은 조건반사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어떠한 여건이 갖추어져야만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반응입니다.
깊은 깨달음이 있을 때에는 어디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신앙을 바로 고백하는 순간에는 어디에서든지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찬송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은혜에 대한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조건과 여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맙시다.
'언젠가는 감사할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그럴 형편이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별천지가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만 나의 내적 존재의 문제입니다. 기쁠 때에 찬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찬양할 때에 기뻐하게 된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때에 찬양할 수 있겠지만, 찬양함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부인이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날마다 권면하지만 그는 술을 좋아해서 저녁마다 곤드레만드레 되어 간신히 집을 찾아 들어오는 형편입니다. 이런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라고 부인은 고생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도 역시 밤늦게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아니나다를까, 남편이 또 엉망으로 취해서 쓰러져 있습니다. 방으로 끌어다놓고 씻어주고 옷을 갈아 입혀주니 남편은 자리에 누워서 세상 모르고 자는 것입니다. 부인이 그 옆에서 기도를 하다가 생각해보니 신세타령이 나옵니다. 마음이 울적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러려고 결혼했나,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에, 이제 눈물까지 흐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감동하셔서 문득 지난주일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부인은 감사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작정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마는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감사할 것이 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속썩이는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지. 저렇게 술이 만취되어 가지고도 사고 당하지 않고 자기 집 찾아오는 것을 보면 장하지. 언젠가는 저 사람도 사람될 날이 오겠지.' 그뿐입니까? 술을 그렇게 많이 먹어도 아직까지 건강하니 감사하고 본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나까지 못 나가게 하는 것은 아니니 감사하고 ----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니 감사할 것 천지더랍니다.
그래서 얼굴이 점점 밝아지고 빛이 납니다. 옆에 누워 자던 남편이 목이 말라서 눈을 떠보니 울고 있어야 할 아내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아닙니까? "무엇이 좋아서 웃소?" 하고 물으니 그 부인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너무 고마운 것이 많아서 그래요." 그러면서 고마운 것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하더랍니다. "예수 믿어줄 테니 걱정 마시오."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이 어떤 사건 뒤에 나오는 것인 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기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앞에 예수님이 서 계시더랍니다. 예수님의 영접을 받고 기뻐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자기가 걸어온 길이 주욱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발자국이 네 개더랍니다. '혼자 걸어왔는데 어째서 두 사람 발자국이 생겼을까?' 생각할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자세히 보니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한 사람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저기에는 왜 발자국이 두 개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너무 힘들어하기에 내가 너를 업고 지나왔다."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내 힘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교만한 생각을 버립시다. 내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주를 잊을 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셨고, 내가 어려운 길을 갈 때에 주께서 나를 업어 옮겨주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에 나를 지키고 보호하셔서 오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감사를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 찬양하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가장 으뜸가는 찬양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내일 아침 십자가 지실 것을 아시고도 저녁에 성만찬 예식을 행하십니다.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실 때에, 밤새워 마지막 기도를 하러 가실 때에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십니다(30절).
십자가의 길을 주님은 찬양하며 가십니다. 그러나 십자가는커녕 변변치 않은 괴나리봇짐 하나를 지고 가면서도 우리는 무슨 불평이 이다지 많은 것입니까? 무엇이 그리 원망스럽고, 무엇이 그리 복잡합니까? 주님은 그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찬송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찬송을 잊지 맙시다.
먼저 찬송할 것이요, 깊이 찬송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송을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진실한 찬송이 나오기까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주님의 경륜 안에서 역사 하실 것입니다.
깨닫고 찬송하고, 믿고 찬송하며, 경건하게 찬송합시다. 그때에 이 찬송이 능력으로 바꾸어져서, 빌립보 감옥의 문이 열린 것처럼 이 찬송의 능력으로 오늘을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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