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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장 26~38절)

by 【고동엽】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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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장 26~38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때때로 장례식에 참석해 보면 유가족들이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이 우는 중에도 출가했다가 돌아온 딸이 더 울고, 그 중에도 가장 슬프게 우는 자는 돌아가신 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며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였던 자녀가 몹시 슬퍼하며 뉘우치면서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리를 내며 무엇이라고 중얼거리기도 하며 때로는 몸부림을 치면서 우는 자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구석에 말없이 서 있는 미망인을 봅니다. 정말로 슬픈 사람은 소리도 말도 없이 눈물도 없이 울고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는「눈물이 말라 버린 세대」라 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큰 일들을 당하며 살아 왔기에 놀라지도 않고 너무나 울고 울어서 지쳐버린 나머지 이제는 어떤 일을 당해도 울 줄을 모릅니다. 감정이 다 말라버리고 더욱 이것이 굳어져서 무관심의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들어도 울지 않고,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와도 놀라지도 않고 죽음을 보아도 눈물이 없고 무서운 죄와 멸망을 보아도 하등의 감각이 벗고 반응이 없는 것을 더욱 슬프게 생각합니다. 때로는 묘지의 적막 같은 고요함을 느낍니다. 본문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3년간 이스라엘의 메시아적인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일하시던 청년 일꾼인 유대인의 소망이었던 예수께서 죽어갔습니다. 그 능력과 신비의 선지자가 비참하게도 십자가를 지고 죽어갔습니다. 십자가란 파사 나라에서 유래된 극형 법인데 건강한 자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일주일씩이나 살아서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다는 무서운 형벌 법이었습니다. 더욱 비참하고 잔인한 것은 본인이 매달려 죽은 십자가 형틀을 본인 자신이 메고 처형장까지 가야 한다는 전례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형틀을 메시고 골고다라는 언덕을 향해 가시고 계셨습니다.

힘에 지쳐서 쓰러질 때마다 로마 군인들은 더욱 매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이 있어도 이 때에 나타나서 대신 지려하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이 고난의 시간에 나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나약한 여인들만이 특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예수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관을 쓰시고 처형장을 향해 가시는 예수를 뒤따르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모진 고통 중에서도 자신의 아픔보다도 제자들을 생각하셨고, 그 백성의 장래를 생각하셔서 하신 귀중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는「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 없는 의인 예수가 왜 저처럼 비참하게 죽어야 하나?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직접적인 장본인은 내용에 있어서 제사장 가야바였던 것을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대표자인 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여기 크나큰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 하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제자 가롯 유다에게 팔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지혜에 의심을 가집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무죄를 판명하고 석방해 주면 예수님의 신변은 온전히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죄한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입니까?

예수에게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었는데 오늘은 왜 변명 한마디 없이 무능하게 죽어 가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선생님을 이별하는 제자들의 마음도 아프지만 그 고통이 너무나도 심한 것이며 그 죽음이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를 동정하며 울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나를 위해서는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순 같으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진리가 무너지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으며 포악과 무력 세계의 승리 같으나 그 속에 사랑의 개선이 있는 것을 확실히 믿고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서는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감추는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는 것을 아시는 주님, 반드시 진리가 승리할 것을 믿는 주님,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인해서 망할 것을 분명히 내다보시는 주님께서는 이를 위하여는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진리는 가르치신 주님은 그 가르치신 대로 땅에 떨어져 죽어 가는 순간 자체를 결코 슬퍼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죽는 것 같으나 살고 고통같이 보이나 이것은 해산의 수고요, 모순 같으나 엄연한 진리이고, 절망 같으나 소망적이고, 사망 같으나 부활이 있고, 끝으로 보이나 이제 시작이 된 것인즉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울라고 하십니다.「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심각한 교훈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즉 비참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의로운 고난을 위해서는 울지 말고 불의의 권세와 영광, 그리고 부정한 향락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의 고난을 위해 울 것이 아니라 현재는 영광 같으나 장차 있을 멸망 그것을 위해 울라는 뜻입니다.

의와 함께 당하는 자랑스러운 고난과 손해, 실패 이것을 위해서 울지 말고 불의와 함께 당하는 부끄러운 영광, 더러운 명예, 헛되고 치욕적인 성공 이것을 위하여 울라는 뜻입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자신의 죄와 그에 따르는 죄의 종 된 부끄러운 생과 그 결과인 사망을 생각하고 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 불의로 끌려가는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라고 하십니다. 활짝 핀 웃음과 명랑한 가슴을 한번도 가져 보지 못하고 찌푸린 얼굴과 어두움에 끌려서 그늘진 양심으로 부자유한 그 처절한 자기 모습을 바로 보고 울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그 언젠가 한번도 광명한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 갈 자기 모습을 보고 울라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의 길에서 진리를 마음과 생각으로 동경할 뿐 바로 따르지 못하며 감상에 끌리고 행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의 정체를 알라는 것입니다. 불의를 막지 못하고 썩어지는 물건에 시원한 방부제 역을 바로 못하고 쓰러지는 집의 대들보와 기둥 역을 다 못하고 어두움이 밀려올 때에 적은 호롱불 역할 하나도 못 감당하여 기어이 악의 세계와 불의의 세대로 만들고 마는 나 자신의 연약함을 꾸짖으면서 이제 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말이 없고, 생각이 있으나 행동이 없는, 무능한 자신을 직시하고 울라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깊은 뜻의 울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세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막지 못하고 불의의 승리를 견제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을 막지 못하고 대신 지지도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는 같이 죽기라도 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지 아니하도록 그 원수를 막든지 또 이것을 못하면 대신 죽어서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시지 않도록 할 것이며 이도 못했거든 예수님께서 죽을 때 같이 죽기라도 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제 와서 울기만 하면 무엇할 것입니까? 그런즉 같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며 함께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를 위해 탄식할 것입니다. 함께 죽지 못하면 배신자요, 배교자며 또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겁한 모습과 그 비참한 나약성을 스스로 한하며 이제 이를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려의 충신이 이조시대 때 살아남아 있다면 그 신하는 살아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치욕거리가 되며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과 거짓의 세대 안에서 이를 꾸짖지도 못하며 막지도 못하며 그 안에 살고 있다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벌써 죄를 용납했던지, 불의와 타협했던지, 아니면 묵인하며 외면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자기 자신을 바로 알라 그리고 그 장래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불의로 인하여 망하게 될 그의 나라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며 울고 울어서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운 것만이 아니라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외치고 그 길을 막았습니다.

기어이 그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애굽으로 갈 때 그는 따라가서 외치다가 결국 애굽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자신을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장 26~38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때때로 장례식에 참석해 보면 유가족들이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이 우는 중에도 출가했다가 돌아온 딸이 더 울고, 그 중에도 가장 슬프게 우는 자는 돌아가신 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며 또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였던 자녀가 몹시 슬퍼하며 뉘우치면서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리를 내며 무엇이라고 중얼거리기도 하며 때로는 몸부림을 치면서 우는 자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구석에 말없이 서 있는 미망인을 봅니다. 정말로 슬픈 사람은 소리도 말도 없이 눈물도 없이 울고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는「눈물이 말라 버린 세대」라 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큰 일들을 당하며 살아 왔기에 놀라지도 않고 너무나 울고 울어서 지쳐버린 나머지 이제는 어떤 일을 당해도 울 줄을 모릅니다. 감정이 다 말라버리고 더욱 이것이 굳어져서 무관심의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슬픈 이야기를 들어도 울지 않고,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와도 놀라지도 않고 죽음을 보아도 눈물이 없고 무서운 죄와 멸망을 보아도 하등의 감각이 벗고 반응이 없는 것을 더욱 슬프게 생각합니다. 때로는 묘지의 적막 같은 고요함을 느낍니다. 본문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3년간 이스라엘의 메시아적인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일하시던 청년 일꾼인 유대인의 소망이었던 예수께서 죽어갔습니다. 그 능력과 신비의 선지자가 비참하게도 십자가를 지고 죽어갔습니다. 십자가란 파사 나라에서 유래된 극형 법인데 건강한 자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일주일씩이나 살아서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다는 무서운 형벌 법이었습니다. 더욱 비참하고 잔인한 것은 본인이 매달려 죽은 십자가 형틀을 본인 자신이 메고 처형장까지 가야 한다는 전례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형틀을 메시고 골고다라는 언덕을 향해 가시고 계셨습니다.

힘에 지쳐서 쓰러질 때마다 로마 군인들은 더욱 매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이 있어도 이 때에 나타나서 대신 지려하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이 고난의 시간에 나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나약한 여인들만이 특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예수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관을 쓰시고 처형장을 향해 가시는 예수를 뒤따르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모진 고통 중에서도 자신의 아픔보다도 제자들을 생각하셨고, 그 백성의 장래를 생각하셔서 하신 귀중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는「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 없는 의인 예수가 왜 저처럼 비참하게 죽어야 하나?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직접적인 장본인은 내용에 있어서 제사장 가야바였던 것을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대표자인 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여기 크나큰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 하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제자 가롯 유다에게 팔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지혜에 의심을 가집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무죄를 판명하고 석방해 주면 예수님의 신변은 온전히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죄한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입니까?

예수에게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었는데 오늘은 왜 변명 한마디 없이 무능하게 죽어 가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선생님을 이별하는 제자들의 마음도 아프지만 그 고통이 너무나도 심한 것이며 그 죽음이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를 동정하며 울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나를 위해서는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순 같으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진리가 무너지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으며 포악과 무력 세계의 승리 같으나 그 속에 사랑의 개선이 있는 것을 확실히 믿고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서는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감추는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는 것을 아시는 주님, 반드시 진리가 승리할 것을 믿는 주님,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인해서 망할 것을 분명히 내다보시는 주님께서는 이를 위하여는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진리는 가르치신 주님은 그 가르치신 대로 땅에 떨어져 죽어 가는 순간 자체를 결코 슬퍼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죽는 것 같으나 살고 고통같이 보이나 이것은 해산의 수고요, 모순 같으나 엄연한 진리이고, 절망 같으나 소망적이고, 사망 같으나 부활이 있고, 끝으로 보이나 이제 시작이 된 것인즉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울라고 하십니다.「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심각한 교훈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즉 비참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의로운 고난을 위해서는 울지 말고 불의의 권세와 영광, 그리고 부정한 향락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의 고난을 위해 울 것이 아니라 현재는 영광 같으나 장차 있을 멸망 그것을 위해 울라는 뜻입니다.

의와 함께 당하는 자랑스러운 고난과 손해, 실패 이것을 위해서 울지 말고 불의와 함께 당하는 부끄러운 영광, 더러운 명예, 헛되고 치욕적인 성공 이것을 위하여 울라는 뜻입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자신의 죄와 그에 따르는 죄의 종 된 부끄러운 생과 그 결과인 사망을 생각하고 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서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 불의로 끌려가는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라고 하십니다. 활짝 핀 웃음과 명랑한 가슴을 한번도 가져 보지 못하고 찌푸린 얼굴과 어두움에 끌려서 그늘진 양심으로 부자유한 그 처절한 자기 모습을 바로 보고 울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그 언젠가 한번도 광명한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 갈 자기 모습을 보고 울라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의 길에서 진리를 마음과 생각으로 동경할 뿐 바로 따르지 못하며 감상에 끌리고 행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의 정체를 알라는 것입니다. 불의를 막지 못하고 썩어지는 물건에 시원한 방부제 역을 바로 못하고 쓰러지는 집의 대들보와 기둥 역을 다 못하고 어두움이 밀려올 때에 적은 호롱불 역할 하나도 못 감당하여 기어이 악의 세계와 불의의 세대로 만들고 마는 나 자신의 연약함을 꾸짖으면서 이제 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말이 없고, 생각이 있으나 행동이 없는, 무능한 자신을 직시하고 울라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깊은 뜻의 울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세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막지 못하고 불의의 승리를 견제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을 막지 못하고 대신 지지도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는 같이 죽기라도 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지 아니하도록 그 원수를 막든지 또 이것을 못하면 대신 죽어서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시지 않도록 할 것이며 이도 못했거든 예수님께서 죽을 때 같이 죽기라도 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제 와서 울기만 하면 무엇할 것입니까? 그런즉 같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며 함께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를 위해 탄식할 것입니다. 함께 죽지 못하면 배신자요, 배교자며 또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겁한 모습과 그 비참한 나약성을 스스로 한하며 이제 이를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려의 충신이 이조시대 때 살아남아 있다면 그 신하는 살아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치욕거리가 되며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과 거짓의 세대 안에서 이를 꾸짖지도 못하며 막지도 못하며 그 안에 살고 있다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벌써 죄를 용납했던지, 불의와 타협했던지, 아니면 묵인하며 외면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자기 자신을 바로 알라 그리고 그 장래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불의로 인하여 망하게 될 그의 나라를 위하여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며 울고 울어서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운 것만이 아니라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외치고 그 길을 막았습니다.

기어이 그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애굽으로 갈 때 그는 따라가서 외치다가 결국 애굽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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