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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행8 강해 중에서)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크게 울더라도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운다'라는 말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그리스도 인의 울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뒤에 다시 살아나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쨌든 나사로가 죽었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절). 물론 우리는 소망도 있고, 영생도 믿습니다.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 적인 정이 끊어지고,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을 이제는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처럼 왜 우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눈물을 흘리느냐, 라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셨으니까요. 우리가 그 깊은 뜻을 알건 모르건 간에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울음에 대한 휴머니즘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죽었을 때에, 젊은 사람, 용기 있는 사람, 할일 많은 사람, 믿음 굳은 사람이 이렇듯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 경건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울음은 길게 울어서는 안 되는 울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스데반을 위하여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얼마나 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이 울음 자체에 대 하여 한번 숙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왜 울었을까?'하는 질문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에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 :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위하여 울고 있는 저들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신학대학 다닐 때에 지금은 작고하신 박형용 박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신학자입니다. 언젠가 한번 그분이 고난주간에 설교를 하셨는데 그 설교제목이 좀 길었어요. 오늘의 이 본문말씀을 놓고,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여기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그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스데반은 가장 귀한 인생을 살았고 가장 고귀한 죽음을 맞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교란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러 분이 아무리 순교하고 싶다 하더라도 이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순교도 기회가 와야 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순교사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깨끗한 순교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만 잘못 걸려들어서 죽는 경우도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데반 같은, 그렇듯 깨끗한 순교는 하나의 지고하게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 들 앞에서 귀한 설교의 말씀을 길게 펴고, 천사의 얼굴로 돌에 맞아 죽는 장렬한 순교를 했습니다. 이런 죽음 앞에서 울어야 하겠습니까? 찬송을 드려야지요. 좀더 나아가 부끄러워해야지요. 저와 같이 죽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지요. 스데반과 같이 못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 순간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 특별히 저를 아껴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두 살 된 저를 안고 찍은 사진을 제가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 그 목사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남한에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뒤에 수소문해보니 나병환자들 속에 들어가서 목회활동을 하시고 있더군요. 언젠가 그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 아주 큰 일을 많이 하실 수 있는 분이 왜 서울 같은 곳에서 일하시지 않고 이런 벽지에 고생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목사님 아주 담담하게 그 이유를 들려주시더군요. "왜정 말년에 내가 신사참배를 했거든. 끌려가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신사참배를 했어. 그래서 죽음을 면했지. 그리고 해방된 후 감옥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역사 하는데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 지. 죽어야 할 시간에 죽지 못했으니 말이야. 죽지 못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내가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나. 그래서 아무도 오고 싶어하지 않는 이곳에 와서 일생을 살기로 했네."
여러분, 어떻습니까? 스데반을 위하여 울어야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죽지 못한 나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곽선희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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