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로 먹이신 이유(신명기 8장 11절~20절)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제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그가 제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흔히 쓰는 일반적 용어이면서 그리스도인만이 특별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특수한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시험'이라고 하는 낱말입니다. 이것은 흔히 쓰는 낱말입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사회인들이 자격시험 같은 것을 봅니다. 시험 가동이니 시험 운전이니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시험은 그런 의미의 시험이 아닙니다.
주로 '시험을 당한다'라고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이 시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평생토록 시험을 당하고 삽니다. 시험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생이란 한마디로 시험과 더불어 싸워나가는 긴 순례의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누구나 시험을 당합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시험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에 대하여 세 가지의 중요한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실패와 고통만을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무슨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시험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병들거나 실직 당하거나 사업이 그릇되거나 하면 시험에 들었다고 쉽게들 속단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병들었을 때보다는 건강할 때, 돈이 없을 때보다는 돈이 많이 생겼을 때, 실패했을 때보다는 성공을 했을 때야말로 위험한 때입니다. 그런 경우가 오히려 큰 시험이 됩니다. 그럼에도 이런 경우에는 시험에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은 형통(亨通)과 풍요(豊饒)가 큰 시험이 됩니다.
'시험'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타인 때문에 시험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의 원인이 나 아닌 어떤 사람이나 여건(與件)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가 시험이 되고, 경제가 시험이 됩니다. 환경이 시험이 되고 이웃이나 가족이 시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이 시험의 원인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시험은 자생적입니다.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셋째, 모두가 다 '나는 시험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또한 오해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가족을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원망합니다. 내가 시험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시험의 피해자입니다. 자기를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당신 때문에 내가 이처럼 나빠졌다'라고 원망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쉬우나,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하니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해자입니다. 내가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많은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니요,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행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니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으로 저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눈앞에 가나안땅을 바라봅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대로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지으며, 은과 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약속이 바로 눈앞에 현실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환희에 찬 순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계, 그 형통함과 풍요로움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경계하십니다. 그 땅에 들어 갈 때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왜 이러한 경고가 필요하겠습니까?
첫째, 새로운 세상을 만남으로써 일어날 새로운 변화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새로운 것과 접할 때에는 실수하기 쉽습니다.
새로운 변화, 혁신이라는 것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나쁜 쪽으로 변화될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New life style-새로운 삶의 방식에 무서운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 교우들 중에 유학을 가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찾아와서 "목사님, 기도 좀 해주십시오. 유학 가기 전에 권면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할 때마다 늘 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유학을 가면 전혀 딴세상,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환경 속에 들어가게 되겠는데 이때 문제되는 것은 문화충격(culture shock)이다. 내가 이제껏 살아온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다가올 때에 새로운 생의 방법을 취하게 된다. 거기에서 잘될 수도 있지만 아주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아라. 새로운 세상과 접하는 순간이야말로 참 위험한 시간이다'-이렇게 경고해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 가나안 복지를 약속하고 거기에 들어가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변화 속에 무서운 시험이 있음을 알라고 경고하십니다.
둘째, 만족함에 빠져들고 거기에 그만 도취되기 쉽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족-----이것이 좋은 것 같으나 실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공부를 곧잘 하는 해외 유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난히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갔으며 조교 일까지 보는 우수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 생각에 이만하면 머지않아 공부가 끝나겠지 했던 모양입니다. 슬그머니 부모를 졸라서 애인을 사귀더니 곧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쁜 아내를 맞이하고 보니 그만 신혼 재미에 푹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함께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고 하다가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는 저를 만나더니 이런 말까지 합니다. "목사님, 공부를 꼭 해야 되나요? 공부해도 별 볼일 없던데요?" 그의 결혼 주례를 섰던 사람으로서 제가 크게 책망을 했습니다. "공부해서 뭐하느냐고 묻지 말아라, 시작했으니 끝내라, 자네는 지금 큰 시험에 들었다"하고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사랑도 좋고 행복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즐기다가 자기 본분을 잊고 말았으니 이게 무슨 낭패입니까? 만족, 행복-이것 그리 좋은 것만은 못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을 상실하고 마침내 향락과 방종에 빠지며 은혜를 망각하게 됩니다. 내게 쏟아지고 있는 많은 기대마저 저버립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형통함과 풍요함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교만 때문입니다.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형통할 때에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존 트랍(John Trapp)이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다른 죄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도망가는 죄이지만, 교만죄만은 하나님 앞에 대드는 죄다.' 교만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교만 죄는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형통한 때에 특히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바로 왕이 그랬고, 산헤립이 그랬고, 느부갓네살이 그랬습니다. 헤롯 왕이 그랬고, 제사장이 그랬으며, 바리새인도 그랬습니다. 교만죄,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는 까닭은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풍요에 만족하고 교만해지면 끝내 하나님을 저버리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에 그 빈 자리는 우상이 들어가 앉습니다. 어느 사이에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여러분, 인류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상하게도 풍요함이나 넉넉함이 있었던 때에는 어느 민족이든 모두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배부르고 여유있는 사회에 가보면 교회가 텅비어 있습니다. 잘사는 사람, 잘사는 사회가 하나님을 떠나고 무신론자, 우상숭배자가 되어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큰벌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이와 반대로 역경 속에서 인류 역사가 발전해온 것을 봅니다. 역경 속에서 오히려 영적으로 갈급해지고 진실해지며, 하나님의 사람들로 온전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사는 것이 좀 나아졌다고, 이것으로 인해 만족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만족은 아주 위험합니다. 오히려 그런 때일수록 더 조심스럽게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은 풍요와 형통함, 이 부요(富饒)함 속에서 무서운 시험에 빠지지 아니할 수 있는 처방을 말씀합니다. 과거에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의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의의 역사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해방자로서 애굽에서 건져내신 일이요, 둘째는 40년이라는 긴 광야 생활을 인도하심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목마른 자들을 위하여 반석에서 생수를 내신 일이며, 넷째는 하늘로서 만나를 주어 먹고살게 하신 역사입니다. 이 네 가지 모두 철저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에 전부 특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이 모두가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네 가지 역사 모두 이스라엘 스스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수도 없고, 광야를 통과할 수도 없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기적의 성격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제 저녁 어느 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미국에 가서 강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동차도 주시고 양식도 주시고 넓은 땅도 주셨다고, 우리에게 참 많은 복을 주셨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한 젊은이가 질문하더랍니다. "자동차는 우리가 만든 것인데요?" 장로님은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하셨더군요. "자동차를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자. 휘발유도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자.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공기가 필요한데, 공기도 사람이 만들었나?" 청년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건 아닌데요……" 하더랍니다. 그것만 아닙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동차도 하나님이 만드신 거요, 물도 기름도 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겸손한 자가 생각해보면 모두가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만큼 내게 기회를 주셨기에 내가 재물도 얻고 공부도 하고 오늘의 풍요를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역사적 사건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지난날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의미 없는 일이 있었습니까? 다 교육적입니다. 내가 손해본 것도 교육적이요 병든 것도 교육적입니다. 내게 일어난 사건 하나 하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려고 합니다. 나를 어디론가 인도하시며 안타깝게 가르쳐주고자 하시고,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하십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어떤 작품을 만들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그 세심한 의도와 뚜렷한 목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다 하나님의 확실한 교과 과정입니다.
셋째, 역경을 통해서 복을 주신다는 뜻이 그 네 가지 역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경을 통해서 지혜를 주시고 순수함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화목을 주시고 하나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그 어려운 40년동안의 광야생활을 주셨고, 그 속에서 당신의 귀한 뜻을 이루어 가시지 않았습니까? 광야 40년은 곧 복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6절)." 모든 것을 합하여 복을 주려 하신다-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만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만나는 하늘로서 이슬처럼 내려온 떡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어차피 주실 것이면 한달이든지 일년이든지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게 주시지, 왜 매일 아침 걷어다 먹어야 되도록 하셨을까요? 하루치보다 조금만 더 걷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모아두지 못하고 매일매일 걷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리하셨을까요? 또 농사도 짓지 말고 만나만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매일 아침 그 떡가루를 보내주셨는데, 도대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오직 은혜로 살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만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만나에는 하나님의 '선물성'이 있습니다.
만나는 아주 우수한 선물입니다. 초월적인 것입니다. 시편 78편 25절에서는 이것을 '권세 있는 자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angel's food'라고 합니다. 천사의 음식, 참으로 하늘에서 온 신령한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만나에는 '희귀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특별한 것이라고 여러번 강조합니다. '너희 조상들은 본 일도 없고 먹어본 일도 없다. 이것은 너희에게만 주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보편적인 것입니까? 물론 보편적인 은혜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내게도 주셨습니다.
다 같은 은혜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특별합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곽선희, 내가 받은 은혜는 특별하다. 다른 사람들한테 없는 것, 아주 특별한 은혜를 나만은 받았다.' 저는 이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역사에도 없고 과거에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신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은혜를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역사에 단 한번 있었던 단회적(單回的)이요 창조적인 사건입니다. 또한 하늘로부터 내려와 광야에서 급식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기에 계시적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우리가 당신의 돌보심과 날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은혜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당신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몇 번 기도합니까? 어떤 분한테 물으니 보통 세 번 한다고 합니다. "언제 언제 하십니까?" "식사때마다 합니다." 앞으로 이분은 하루에 식사를 열 번은 해야 할 것입니다. 식사때에만 기도하니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이 아니고 매일매일 먹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그때마다 감사하고, 그때마다 깨닫고 그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하루종일 제멋대로 뛰어다니다가도 배고프면 엄마 찾아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늘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고, 늘 당신께만 의뢰하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내려온 만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만나를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며, 날마다 하나님께 찬양드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에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뭐니뭐니해도 사랑은 현재적입니다. 현재적으로 고백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옛날 결혼 사진이나 수 십 년 전의 처녀 때 사진을 보면서 "당신 이때만 해도 참 예뻤는데……" 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욕입니다. 옛날에는 예뻤지만 지금은 별로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이 더 예뻐" "당신 이제 보니 정말 아름답구려"하고 언제든지 현재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합니다. 현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과거도 부인합니다. 현재의 은혜를 부인하는 사람은 과거의 은혜도 부인합니다. 미래의 소망까지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현재가 중요합니다. 언제나 오늘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오늘 주님을 찬양하고, 오늘 행복을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만이 은혜를 깨닫습니다.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가 은혜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아무 것도 은혜 되지 않습니다. 은혜는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곧 겸손에서 나옵니다. 겸손한 자만이 그 가치를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겸손한 자만이 은혜를 은혜로 받고, 은혜를 간직합니다. 또한 은혜로 인하여 지혜를 얻습니다. 강하게 됩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즐기게 됩니다.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도 지극정성으로 열심히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세 가지만 들어주마." 이 사람은 굉장히 기뻐하면서 무슨 소원을 아뢸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사람은 아마도 자기 아내가 퍽 싫었던 모양입니다. 첫 소원으로 "지금 마누라 데려가시고 새 마누라를 얻게 해주십시오" 했던 것입니다. 소원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인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부인 장례식을 치르는데, 문상객들이 많이 와서 하는 소리가 "아이고, 그 좋은 분이 돌아가셨군요. 남들 몰래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참 좋은 일 많이 하셨는데, 그렇게 착하고 복된 분이 돌아가셨군요" 합니다. 이구동성으로 죽은 부인을 칭찬합니다.
이사람이 가만히 문상객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부인을 생각해보니 후회스럽고 안됐다 싶습니다. '아이구 그런 사람이 죽어서 되겠나'하고 하나님께 "다시 살려주십시오" 했더니 부인이 살아났습니다. 벌써 두 가지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으니 무엇을 구할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하나 남은 소원을 투자할 만큼 귀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제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라." 이렇게 해서 그는 세 번째로 정말 좋은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내 처지 이대로 좋습니다. "이대로도 분에 넘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이렇게 간증하는 사람만이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한테는 마귀도 손을 못 댑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늘 승리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저 앞에 있는 가나안의 약속, 그 귀한 약속을 믿고 나아갈 때 소망 중에 모든 현재 문제를 다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을 때에 진정한 승리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축복관에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복 자체보다 복 주시는 분에 대하여, 곧 복의 근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복을 바라기보다 복받는 사람의 자세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는지, 복받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셋째, 복받은 후에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넷째, 잘못하면 복받는 것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합니다. 다섯째, 이기심과 교만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알고,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섯째, 복을 받을수록 더욱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섯을 가지고 교만하면 그 그릇에는 다섯을 담을 수 없습니다. 다섯일 때 겸손했으나 열을 주실 때에 교만해진다면 그 그릇은 다섯들이 그릇밖에 못됩니다.
참으로 은혜를 아는 사람은 높아질수록, 더 주실수록 점점 더 고개를 숙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얼마든지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끝으로 일곱째, 복은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위를 얻었습니까? 재산, 명예, 건강을 얻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큰 책임을 맡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이 무겁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16절 말씀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은혜를 더하고자 하심이요, 겸손케 하고 낮추시려 하심이요, 마침내 더 큰 복을 주시려 하심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내게 주신 매일매일의 은혜,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더 큰 은혜의 길이 될지 여러분 모두가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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