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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부활의 실제(로마서 6장 1절~11절)

by 【고동엽】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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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실제(로마서 6장 1절~1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복음이란 죽어 가는 자가 죽어 가는 자에게 전하는 생명의 말씀이다'-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인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목사는 복음의 진수(眞髓)를 이같이 단적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표현입니다. '죽어 가는 자'-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잠재하고 있는 가장 심각하고 큰 문제가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결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적이요 현실적인 문제이자 어떤 면에서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세계가 어떻고 인류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부 이야기, 잘사는 이야기, 흔히 말하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인들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추상적인 어떤 학술 이론인들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죽어 가는 사람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죽음일 뿐입니다. 생명의 문제일 뿐입니다. 부활, 생명, 소망-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하고많은 문제에 부닥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가령 봉사에 대한 교훈이랄지, 인내에 대한 가르침이나 사랑에 대한 가르침, 겸손에 대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임종을 눈앞에 둔 사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말씀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 한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간증을 남겼습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게 가장 필요한 말씀은 내가 가장 심상히 여기고 등한시했던 말씀, '예수의 보혈이 나를 모든 죄에서부터 깨끗케 하셨다'고 하는 복음이다."

성경은 생명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 오래 사느냐 일찍 죽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문제를 부활로 답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풀 수 없는 생명의 신비가 바로 이 부활사건에서 해답되고 있습니다. 이 부활 사상에 대해서 몇 가지 잘못된 견해들이 있습니다마는, 그것들을 죽음의 개념에 따라 분석해보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활을 생명의 자연 현상으로 일반화해서 이해하려는 견해입니다. 땅에 씨앗을 심으면 그것이 썩어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듯이 생명은 하나의 과정(life process)이라는 것입니다. 죽었으니 살고, 살았다가 또 죽는 일반적 과정으로서의 생명으로 부활을 설명하는 것은 기독교의 부활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 견해입니다. 철학 용어로 이른바 'immortality,' 영혼불멸설입니다. 흔히 말하는 톨스토이적 부활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이요 관념적인 부활은 있지만 실제적 부활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기독교의 부활로 오해합니다. 마음을 고쳐먹고 사람이 바로 되는 수는 있지만 다시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고 현실의 생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정신 혹은 영혼만이 영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기독교의 부활을 환생(還生)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사로처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나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사로가 부활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났다고 말씀할 뿐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뒤에 다시 죽었습니다. 그저 조금 특별한 병에서 깨어났을 뿐입니다. 조금 더 썩었다가 살아난 것뿐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우스갯소리도 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면 이팔청춘 좋은 나이에 죽을 일이다. 그래야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 아닌가.' 다 늙어버린 모습대로 부활한다면 다시 살아갈 맛이 나겠느냐는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어려서 죽든 늙어서 죽든 육체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힐 때에 그것으로 부활이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생명이 없는 것 같은 계란이 깨지면서 병아리가 나온다고 하여 이것으로 부활을 설명하려들지 마십시다. 또 사라처럼 생리적으로 아주 단산된 사람이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그 사람 부활했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구제할 길 없이 파손된 인격이 중생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부활했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이러한 것들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그것뿐입니다. 만일에 신학적으로 부활의 개념을 명확히 사전에 등재(登載)하려거든 이렇게 쓰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부활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오로지 여기에만 부활의 의미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묘를 가끔 찾아보면「○○○之墓」라 쓴 묘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빈 무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첫 메시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 24:5-6)!" 여기 계시지 않다-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첫마디입니다. 빈 무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토대입니다. 기독교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사건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부활절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기독교를 만들었고 그리스도인을 존재케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로 실망을 하곤 합니다. 첫째는 시대가 너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이천 년이나 지난 사건을 오늘에 가서 찾아보려 하니 흔적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셨다는 길이 지금은 잡화상이 가득한 거리로 변했습니다. 겟세마네동산은 히피족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실망거리입니다. 두 번째로 빈 무덤을 보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빈 무덤이야말로 기독교의 터전이요 뿌리인 것입니다. 부활은 실제입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도 설화도 아닙니다.

부활의 세 가지 실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전한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아주 단순한 언명입니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 즉 내가 보았다, 죽으시는 모습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도 만나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한다'-따라서 핍박을 받든 위협을 받든, 가난하든 부하든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것이 초대교인들이 전한 질박한 증거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부활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개연적(蓋然的) 사실이냐 아니냐,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 형태가 어떠할 것인지도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손을 만져 보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는 자가 되라." 성경을 읽다보면 그 역사적 사건을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의심하는 자가 많았다는 그 말씀이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어떻게 죽으셨음을 저들이 아는데,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화끈하게 믿었더라'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닙니까? 성경은 이런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함으로써 오히려 분명하게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개입입니다. 부활은 창조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 이성의 비판이나 인간들의 확신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요, 알거나 모르거나 실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사실만을 기록함으로써, 믿는 자가 되라고 권하고 있을 뿐입니다.

둘째는, 우리 부활의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이 명백하듯 부활도 명백하리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된 몸의 형체를 입는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영광된 몸처럼 변화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추한 모습, 병들고 찢기고 상한 마음과 정신으로 다시 산다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마는, 우리는 예수의 부활하신 모습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덤을 앞에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죽음은 과거지사(過去之事)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죽음을 알고 사는 것은 '철학'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나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며 사는 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벌써 죽었습니다. 따라서 무덤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이 생이 언제 끝나도 이미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무덤을 뒤로하고 앞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형체와 같이 변화되는 바로 그 순간을, 그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었으니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죄의 문제, 부조리의 문제, 근심의 문제들이 부활로써 해답을 얻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기에 그의 부활이 우리 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부활사건의 의미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 능력의 실제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실제를 말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와 함께 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의 보증으로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의 대리자(agent)입니다. 따라서 나는 오늘 그리스도와 동행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셔서 나와 더불어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는 사망의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과 죄의 노예 된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 합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이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 능력의 실제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있기에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것이요, 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고 환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20세기 인도의 유명한 전도자 선다 싱(Sundar Singh)에 얽힌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선다 싱이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사람들을 헤집고 들여다보니 수도승 한 사람이 팔을 쳐들고 앉아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지은 죄가 많아 스스로 그 손을 벌하는 것이랍니다. 그 모양이 하도 측은해서 선다 싱이 이렇게 타일렀다 합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벌서본들 그 손이 깨끗해지겠소?" 손뿐 아니라 온몸을 매질한다 해서 새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옛말에도 '개꼬리 삼 년 묻어도 황모(黃毛) 안된다'하지 않습니까? 개꼬리와 황모는 종자가 다른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명상이니 수양이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로 옛사람이 새사람 되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극기(克己)나 수도(修道)를 통해서 회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말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온전히 함께 죽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바로 그 죽음에서부터 생명이 비롯됩니다.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적 생명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또 다른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처럼 경험하고 듣고 살아가는 실제인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 교인이 된 어느 가정의 일입니다. 남편 되는 사람이 못된 성질을 가져서 아내를 몹시도 괴롭힙니다. 남이 보기에도 잔인하다 싶을 만큼 괴롭힙니다. 아내가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피해갔습니다. 난처한 일이지요. 그런데 남편이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고 이제 바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마는, 아무리 사정을 이야기해도 아내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할수 없이 제가 아내 되는 사람을 설득하러 나섰습니다. 서로 십여 년을 함께 산 사람이요, 이제는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 함께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 대답이 단호합디다. "예수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 절대 사람 안됩니다." 그래서 어디 한번 더 속는 셈치고 한 달간만 계약하고 살아 보라 했고,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마침내 이 두 사람은 다 세례를 받았고 지금껏 원만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능력, 부활 신앙의 실제를 믿으십시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부활 신앙의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비겁했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 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부활 능력을 체험하자 어떻게 변했습니까? 예수를 증거 한다고 자기를 잡아죽이려 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기탄 없이 외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사도행전 4:19)." 그는 마침내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박으려 하자 그는 아주 여유만만하게 말했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감히 내가 어찌 제대로 십자가에 달릴 수 있겠소? 나를 거꾸로 매달아 못박으시오." 비겁한 베드로가 어떻게 하여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는 예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또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기 위해 다메섹까지 쫓아가던 잔학한 사람 사울은 또 어떻습니까? 그가 성 바울로 되지 않았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건 하나로, 그토록 완악한 사울이 바울로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까?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탓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부활 신앙에 접할 때,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절)." 자신을 대할 때에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이웃을 대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안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을 살다가 장차 이 부활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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