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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시대의 신앙(마가복음 9장 14절~24절)

by 【고동엽】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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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시대의 신앙(마가복음 9장 14절~24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현대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은 불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지식도 쌓았고 건설도 이루었으며, 소유도 늘어나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습니다만, 한편으로는 가장 큰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며, 친구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 사조가 날마다 더해 가는 실정입니다. 마침내는 이제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게까지 되었습니다. 또한 크게로는 동서의 대립을 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거의 일세기를 두고 계속 대립해서 오늘까지 서로 싸워 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냉전도 많았고 전쟁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전쟁은 이제 판정이 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공산주의가 판정패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변명의 여지없이 대체적으로 다 가난해서 이제 그들도 자유할 수밖에 없기에 바야흐로 수정해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도 좋다는 공산주의 경제 이론이나 강한 체제가 왜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불신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세계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믿지를 못할 뿐더러 공산주의자 자신들도 스스로를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 세계의 특징입니다. 서로 눈치를 보며 불안한 가운데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지식도 건설도 생산도 다 무너져서 인간성까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능력도 지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힘이란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차를 타고 오셨습니까? 차를 타려면 부득이 몇 가지 사항을 믿어야 합니다. 우선 신호등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신호등이 고장이 나서 양쪽이 동시에 파란 불로 켜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파란 신호등만 믿고 양쪽에서 달려오는 차들은 서로 부딪혀서 큰 사고가 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신호등을 믿고 운전을 합니다. 또한 신호등을 보는 내 눈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내 눈을 믿지 못해 푸른 등인데도 불구하고 붉은 등일 것이라고 의심하면 차를 탈 수 있겠습니까? 시력이 좋든 나쁘든 내 눈의 판단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동차가 길 한가운데서 고장날 것이라고 불안에 떤다면 역시 운전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어야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관습 중에는 음식을 먹을 때 고급용으로 은수저를 사용합니다. 특히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은수저 사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은수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수저는 도열(導熱)이 잘 되어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면 입을 다치기가 쉽고, 또한 쉽게 변색해서 여러 가지로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은수저를 사용하게 된 유래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 궁전에서 왕들은 신하가 바치는 음식을 믿지 못해 무슨 음식이든 일단 은수저로 검사를 해서 수저가 검게 변색이 되나 안 되나 하는 검사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불신입니까? 맛있게 먹어야 할 음식을 대할 때마다 은수저로 휘휘 저어보고 먹어야 한다면 차라리 안 먹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은수저의 유래가 좋지 않아 은수저에 대한 기분이 별로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예순이 넘었어도 여행할 때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딜 가서나 음식을 먹을 때 먼저 강아지에게 먹여서 이상이 없어야 먹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누가 독약을 넣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고 먹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알건 모르건 처음부터 믿음으로 시작했고 현재도 믿음 속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믿어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만약 믿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몸과 마음이 병들 뿐 아니라 사회도 병들고 마는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신보다도 의심을 많이 합니다. 믿어야 하는 일을 공연히 반신반의해서 갈등하게 되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임합니다. 이것이 되풀이되다 보면 병적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국의 39대 카터 대통령은 도덕 정치를 내세웠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이란 인질 문제로 기자 회견을 했었는데, 한 기자가 대뜸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으로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제 기억으로는 고의적으로 알면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권이나 국가적인 이익을 위하여 잠시 거짓말을 했다가는 그 후에 이 거짓말을 밝혀내기까지의 손실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정말 훌륭한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이 경제 때문입니까, 아니면 정치 때문입니까? 문제는 공신력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믿음은 정말 한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좀 심한 예화입니다만, 현대인들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어느 한 가정이 해수욕장에 놀러 갔습니다. 어린 아들은 수영하는 재미에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불안한 어머니는 심하게 꾸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불만이 가득해서, 왜 아버지는 깊이 들어가도 말리지 않으면서 자기만 야단하느냐고 투덜댔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아버지는 보험에 들었단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믿기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황금 만능주의 시대를 잘 대변해 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은행에 저축된 예금 통장을 믿습니까? 아니면 증권을 믿습니까? 황금 만능주의적인 신뢰처럼 맹랑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믿지 못할 것을 믿게 되면 가장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믿음의 과정에는 다음 4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 나는 믿어야 한다(Must)는 주관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경험에 근거를 둔 것으로 나는 믿을 수 있다(Can)고 하는 단계이며, 셋째는 나는 믿을 것이다(Will)라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나는 믿는다(Do), 즉 믿음의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믿음의 위탁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종교적인 신앙과 일반적인 믿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믿음이란, 내가 믿음의 대상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상대방이 믿을 만해서이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에게 믿음의 요소가 있어서 상대방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의심하려 든다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이 믿음은 주관적인 발상에 의해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믿는 자가 다른 사람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 믿음에 의해서 그 믿음으로 상대방을 보고 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주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믿음이란 계시성이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내게 다가오면서 믿음을 요구하는 객체 주도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D똕TXT즯당신 자신이 우리를 향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보여 주시면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시를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믿으라, 알라, 그리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너희들도 이 능력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채널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이 사건화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믿어야만 지식이 생기고 이 지식이 능력을 알게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가는 40여 년 동안, 하나님은 시종일관 그 백성들을 가르치십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구원했고, 지금도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으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내 능력과 사랑에 의해서 너희가 살아 갈 것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됨을 알라. 내 사랑을 알라"고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 과정입니다. 요한복음 20 : 31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모든 이적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시면서 계속적으로 "믿으라, 믿으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며 또 다른 능력과 증거를 보여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내게로 올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사실 믿음은 증거 부족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적 기사를 통해서 그가 오늘 우리를 향하여 계시하고 있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가령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면 그 이적의 놀라움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적을 행사한 자가 누구냐, 즉 누가 이 병을 고쳤느냐, 왜 고쳤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지식이 성립되고, 지식이 성립되면서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안에 사건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오늘 이곳에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채널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제삼자의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인의 믿음이 중요하고 그 믿음에 의해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지만 제삼자의 믿음으로 인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정신병자 어린아이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믿음에 의해서 병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런 예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누이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청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사로에게 나타났습니다. 또한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병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했을 때 (마 8장), 그 백부장의 믿음에 의하여 그 하인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에 의해 죽은 딸이 살아났고(막 5장), 지붕을 뚫고 달아내린 환자의 친구들의 믿음에 의해 환자가 낫게 되는 역사도 있습니다. 본인의 믿음이 아니더라도 그를 극진히 사랑하는 자나 또한 제삼자의 믿음에 의해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믿음이 있고서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아버지의 믿음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단계가 참 아름답고도 교과서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아들에게 정신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파리해졌으며, 또한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뛰어 들게 했으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여기서 그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병을 고쳐야겠는데 어디인가 길이 있을 것이라고 자기 필요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첫 동기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믿음을 찾아 헤매는 것은 믿음 자체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믿고자 했고 믿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좋다는 곳은 다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에게 왔는데, 유감스럽게도 제자들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실망합니다. 이제 모두에게 배신당한 느낌으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은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 때에 주님은 책망하시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지고 있는 종속적 불신현상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태도입니다. 지금까지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는 한순간만의 불신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믿어야 하고 그리스도는 믿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순간일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지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이애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어느 짓궂은 재주꾼이 이 폭포 위의 양쪽 벼랑에 가느다란 쇠줄을 걸어 놓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줄을 타는 묘기를 몇 번이나 보여주었습니다. 강가에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외바퀴 수레를 줄 위에 놓고 붙들고 왔다갔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군중들에게 묻기를 "제가 다시 한번 더 이 줄 위를 가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여 주었기 때문에 다들 가능하다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재주꾼은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느 한 분이 이 수레에 올라타십시오"라고 말하며 구경꾼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누구 한 사람도 그의 재주를 믿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나왔습니다. 그는 성큼 올라앉아 신나는 듯이 줄을 타는 것이 아닙니까? 구경꾼들은 대단히 놀랐지만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재주꾼의 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다 그 사람을 믿지 못했어도 그의 딸만은 아빠의 재주를 믿은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지 못했다고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비록 불신 시대에 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은 새로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되고 그리고 사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나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역사의 방향을 믿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누군가 그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믿거나 남편을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 안에서 남편을 믿고 아내를 믿습니다. 그럴 때에 새로운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미 불신 환경, 불신 경험, 불신 체질화된 우리일지라도 다시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믿음을 얻게 됩니다. 이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응답해야 엄청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과 동기 위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 중심이요 그리스도 중심이며, 말씀 중심임을 말합니다. "믿기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우리는 믿음을 더하게 하여 주십사고 간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행사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불신 시대의 신앙(마가복음 9장 14절~24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현대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은 불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지식도 쌓았고 건설도 이루었으며, 소유도 늘어나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습니다만, 한편으로는 가장 큰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며, 친구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 사조가 날마다 더해 가는 실정입니다. 마침내는 이제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게까지 되었습니다. 또한 크게로는 동서의 대립을 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거의 일세기를 두고 계속 대립해서 오늘까지 서로 싸워 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냉전도 많았고 전쟁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전쟁은 이제 판정이 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공산주의가 판정패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는 변명의 여지없이 대체적으로 다 가난해서 이제 그들도 자유할 수밖에 없기에 바야흐로 수정해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도 좋다는 공산주의 경제 이론이나 강한 체제가 왜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불신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세계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믿지를 못할 뿐더러 공산주의자 자신들도 스스로를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 세계의 특징입니다. 서로 눈치를 보며 불안한 가운데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지식도 건설도 생산도 다 무너져서 인간성까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능력도 지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힘이란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차를 타고 오셨습니까? 차를 타려면 부득이 몇 가지 사항을 믿어야 합니다. 우선 신호등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신호등이 고장이 나서 양쪽이 동시에 파란 불로 켜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파란 신호등만 믿고 양쪽에서 달려오는 차들은 서로 부딪혀서 큰 사고가 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신호등을 믿고 운전을 합니다. 또한 신호등을 보는 내 눈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내 눈을 믿지 못해 푸른 등인데도 불구하고 붉은 등일 것이라고 의심하면 차를 탈 수 있겠습니까? 시력이 좋든 나쁘든 내 눈의 판단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동차가 길 한가운데서 고장날 것이라고 불안에 떤다면 역시 운전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어야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관습 중에는 음식을 먹을 때 고급용으로 은수저를 사용합니다. 특히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은수저 사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은수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수저는 도열(導熱)이 잘 되어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면 입을 다치기가 쉽고, 또한 쉽게 변색해서 여러 가지로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은수저를 사용하게 된 유래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 궁전에서 왕들은 신하가 바치는 음식을 믿지 못해 무슨 음식이든 일단 은수저로 검사를 해서 수저가 검게 변색이 되나 안 되나 하는 검사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불신입니까? 맛있게 먹어야 할 음식을 대할 때마다 은수저로 휘휘 저어보고 먹어야 한다면 차라리 안 먹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은수저의 유래가 좋지 않아 은수저에 대한 기분이 별로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예순이 넘었어도 여행할 때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딜 가서나 음식을 먹을 때 먼저 강아지에게 먹여서 이상이 없어야 먹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누가 독약을 넣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고 먹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알건 모르건 처음부터 믿음으로 시작했고 현재도 믿음 속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믿어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만약 믿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몸과 마음이 병들 뿐 아니라 사회도 병들고 마는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신보다도 의심을 많이 합니다. 믿어야 하는 일을 공연히 반신반의해서 갈등하게 되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임합니다. 이것이 되풀이되다 보면 병적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국의 39대 카터 대통령은 도덕 정치를 내세웠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이란 인질 문제로 기자 회견을 했었는데, 한 기자가 대뜸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으로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제 기억으로는 고의적으로 알면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권이나 국가적인 이익을 위하여 잠시 거짓말을 했다가는 그 후에 이 거짓말을 밝혀내기까지의 손실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정말 훌륭한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이 경제 때문입니까, 아니면 정치 때문입니까? 문제는 공신력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믿음은 정말 한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좀 심한 예화입니다만, 현대인들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어느 한 가정이 해수욕장에 놀러 갔습니다. 어린 아들은 수영하는 재미에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불안한 어머니는 심하게 꾸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불만이 가득해서, 왜 아버지는 깊이 들어가도 말리지 않으면서 자기만 야단하느냐고 투덜댔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아버지는 보험에 들었단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믿기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황금 만능주의 시대를 잘 대변해 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은행에 저축된 예금 통장을 믿습니까? 아니면 증권을 믿습니까? 황금 만능주의적인 신뢰처럼 맹랑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믿지 못할 것을 믿게 되면 가장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믿음의 과정에는 다음 4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 나는 믿어야 한다(Must)는 주관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경험에 근거를 둔 것으로 나는 믿을 수 있다(Can)고 하는 단계이며, 셋째는 나는 믿을 것이다(Will)라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나는 믿는다(Do), 즉 믿음의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믿음의 위탁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종교적인 신앙과 일반적인 믿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믿음이란, 내가 믿음의 대상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상대방이 믿을 만해서이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에게 믿음의 요소가 있어서 상대방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의심하려 든다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이 믿음은 주관적인 발상에 의해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믿는 자가 다른 사람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 믿음에 의해서 그 믿음으로 상대방을 보고 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주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믿음이란 계시성이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내게 다가오면서 믿음을 요구하는 객체 주도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D똕TXT즯당신 자신이 우리를 향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보여 주시면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시를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믿으라, 알라, 그리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너희들도 이 능력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채널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이 사건화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믿어야만 지식이 생기고 이 지식이 능력을 알게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가는 40여 년 동안, 하나님은 시종일관 그 백성들을 가르치십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구원했고, 지금도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으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내 능력과 사랑에 의해서 너희가 살아 갈 것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됨을 알라. 내 사랑을 알라"고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 과정입니다. 요한복음 20 : 31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모든 이적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시면서 계속적으로 "믿으라, 믿으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며 또 다른 능력과 증거를 보여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내게로 올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사실 믿음은 증거 부족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적 기사를 통해서 그가 오늘 우리를 향하여 계시하고 있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가령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면 그 이적의 놀라움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적을 행사한 자가 누구냐, 즉 누가 이 병을 고쳤느냐, 왜 고쳤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지식이 성립되고, 지식이 성립되면서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안에 사건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오늘 이곳에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채널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제삼자의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인의 믿음이 중요하고 그 믿음에 의해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지만 제삼자의 믿음으로 인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정신병자 어린아이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믿음에 의해서 병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런 예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누이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청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사로에게 나타났습니다. 또한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병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했을 때 (마 8장), 그 백부장의 믿음에 의하여 그 하인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에 의해 죽은 딸이 살아났고(막 5장), 지붕을 뚫고 달아내린 환자의 친구들의 믿음에 의해 환자가 낫게 되는 역사도 있습니다. 본인의 믿음이 아니더라도 그를 극진히 사랑하는 자나 또한 제삼자의 믿음에 의해서 주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믿음이 있고서야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아버지의 믿음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단계가 참 아름답고도 교과서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아들에게 정신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파리해졌으며, 또한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뛰어 들게 했으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여기서 그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병을 고쳐야겠는데 어디인가 길이 있을 것이라고 자기 필요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첫 동기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믿음을 찾아 헤매는 것은 믿음 자체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믿고자 했고 믿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좋다는 곳은 다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에게 왔는데, 유감스럽게도 제자들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실망합니다. 이제 모두에게 배신당한 느낌으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은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 때에 주님은 책망하시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지고 있는 종속적 불신현상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태도입니다. 지금까지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는 한순간만의 불신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믿어야 하고 그리스도는 믿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순간일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지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이애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어느 짓궂은 재주꾼이 이 폭포 위의 양쪽 벼랑에 가느다란 쇠줄을 걸어 놓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줄을 타는 묘기를 몇 번이나 보여주었습니다. 강가에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외바퀴 수레를 줄 위에 놓고 붙들고 왔다갔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군중들에게 묻기를 "제가 다시 한번 더 이 줄 위를 가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여 주었기 때문에 다들 가능하다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재주꾼은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느 한 분이 이 수레에 올라타십시오"라고 말하며 구경꾼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누구 한 사람도 그의 재주를 믿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나왔습니다. 그는 성큼 올라앉아 신나는 듯이 줄을 타는 것이 아닙니까? 구경꾼들은 대단히 놀랐지만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재주꾼의 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다 그 사람을 믿지 못했어도 그의 딸만은 아빠의 재주를 믿은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지 못했다고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비록 불신 시대에 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은 새로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믿게 되고 그리고 사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나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역사의 방향을 믿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누군가 그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믿거나 남편을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 안에서 남편을 믿고 아내를 믿습니다. 그럴 때에 새로운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미 불신 환경, 불신 경험, 불신 체질화된 우리일지라도 다시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전혀 다른 시각으로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믿음을 얻게 됩니다. 이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응답해야 엄청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과 동기 위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 중심이요 그리스도 중심이며, 말씀 중심임을 말합니다. "믿기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우리는 믿음을 더하게 하여 주십사고 간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행사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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