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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표지(3)(빌1장 3절~11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첫째 감사요, 둘째 선교요, 셋째기도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기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으면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답할수 있습니다. 또 누가 잘 믿고 누가 잘못 믿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기도하는 자세가 어떠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명상기도인가, 아니면 무당기가 많은 기도인가, 소원 성취를 위해 아무 것이나 따라다니며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도 자기 정욕적인 소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것들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평가하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의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은 편지 가운데에서 종종 기도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아니, 기도는 하나님께 조용히 하는 것이지 왜 내가 기도하노라고 소문을 내야하는가?" " 왜 그 기도의 내용까지 설명해야 하는가?"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 중에 가끔 기도를 쓰곤 했는데, 특히 에베소서에는 세 번이나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첫째, 이것은 가장 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멀리 출장 중인 남편, 군복무중인 아들, 혹은 1년에 몇 번밖에 찾아 뵙지 못하는 부모님께, 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띄워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씁니까? 사랑합니다, 보고 싶어 못살겠습니다, 잠도 못 잡니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아무리 써 보내도 상대방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참으로 귀한 편지는 '나는 당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라고 쓰는 것입니다.
그 말이 제일 무섭더라고 출장 다녀온 남편들이 말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도 이 말에는 가슴이 뭉클하더라고 합니다. 좀 위험하고 난처한 일을 당하게 되어도 집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큰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가장 큰사랑의 고백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그 제목 자체가 그 사람의 생활 철학, 이상, 생활 목표를 말해 줍니다. 이를테면 돈을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기도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소원이 무엇이며, 그의 생활 목표, 최종 목표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이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소원, 목적, 생활 철학이 어떠하다는 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알리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소원과 그 간절한 마음 가운데 있는 뜻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결국 바울 자신을 빌립보 교인에게 보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왜 자기 기도의 내용을 전부 말하였습니까?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도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입시생 본인은 공과대학을 가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고, 아버지는 의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 사람 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경우를 두고 서양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비서가 곤란하다고요. 셋 중에서 하나만 결재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서가 난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방팔방으로 산만하게 기도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하나로 모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며칠 금식을 하든 변론을 하든 하나로 모아 놓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우면 '내 주여 뜻대로 하소서' 해야지 따로따로 구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나의 기도 제목이 이러이러하니 너희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양쪽 기도가 합쳐져야 참기도가 외지 않겠느냐고 하는 구체적인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나는 네가 이렇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하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 되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나는 10년을 기도해서 너를 낳았다""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약속하고 낳았다"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목사가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죽어도 목사는 되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많은 시간을 합심하여 기도했는데 언젠가는 응답 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의 장래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그저 부모 혼자 막연히 '좋은 사람이 되도록, 대학이나 부고 보도록' 기도하면 소용없습니다. 좀더 구체성 있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이며 기도 제목인 자녀 본인에게 "나는 하나님 앞에 늘 이렇게 기도한다, 너도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되기를 힘쓰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도의 내용을 상대방에게 알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 이하에서 빌립보 교인을 향하여 그의 기도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첫째는 사랑에 대하여, 둘째는 분별력에 대하여, 셋째는 진실에 대하여, 넷째는 의에 대하여 다섯째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위하여입니다. 이 중 마지막 소원은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요, 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며, 출세나 부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기도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을 차례차례 순서대로 살펴봅시다.
첫째, 사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원문대로 보면 사랑이 성장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사랑이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질적으로 점점 더 높아지기를, 그리고 사랑이 말이나 감상만이 아니라 행동화되고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내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주시옵소서' - 이것이 우리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만 크게 성장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다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되 여기에서 몇 가지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과 총명입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먼저, 지식은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 입니다. 원래 지식은 그노시스인데 에피그노시스는 좀더 충만한 지식을 뜻합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full knowledge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특수한 단어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앙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처럼 신령한 지식 안에서 사랑이 점점 더 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세상적으로 보면 열렬히 사랑했다가도 서로 더 잘 알고 친해지기 시작하면 그 첫사랑이 식어집니다. 그래서 사람과 그림은 멀리서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을 감상할 때 가까이 서 보면 그냥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가까워지면 몰랐던 단점들이며 모순된 성품이 드러나서 실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인격이란 가까이 갈수록 더욱 존경하게 되는 인격입니다. 사귈수록 더 사랑하게 되어야 그것이 온전한 사랑입니다. 모르고 사랑하고, 알고 미워하고, 멀리서 사랑하다 가까이 가서 내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신앙적인 인격과 신앙적인 사랑은 갈수록 더 사랑하고 더 존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인 지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 없을 때 사랑하던 것, 신앙을 가지고 보니 후회가 됩니다. 인간적으로 사랑하다가 기도하면서 뉘우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기도하면서 만난 사랑, 기도하면서 깊어지는 사랑, 성경 공부하면서 완전해지는 사랑, 신령한 지식과 함께 커지는 사랑 - 그 사랑만이 진정한 것입니다. 의에서 떠난 사랑, 술집에서 만난 사랑 - 이런 것들은 다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영적인 지식과 함께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음, 총명-아이스데시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지각(perception)을 뜻합니다. 영적인 통찰력과 영적인 지각이 있어야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지게 됩니다. 몽롱할 때 사랑하고, 정신차리면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지각과 함께 점점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을 위해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성장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바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의 성장과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나는 부동자세로 가만히 서 있어도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주시고, 내게 선물 주게 하시고, 저 사람이 내게 친절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기도는 우리의 사랑이 풍성해져서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같은 기도를 해봅시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맙시다. 그 누구도 탓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식과 함께 영적인 통찰력을 주셔서 내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 사람을 꼭 사랑하게 해주소서. 저 원수도 사랑하게 해주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둘째,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분별력은 헬라어로 도키마제인 시험한다(test)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위조지폐인가 아닌가를 시험해 볼 때, 또 이 제물이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제사장이 시험해 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요즘은 참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엑설런트(excellent)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즘처럼 지고선(至高善), 절대 선을 알 수 없었던 때가 예전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부 혼미해져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학생 말을 들어야 하는지 선생 말을 들어야 하는지, 사장 편을 들어야 하는지 사원 편을 들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우리는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 선이 있는지, 또 어느 선이 최우선적인선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 철학적으로 말하면 최고선, 지고선, the best, 그것을 알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순간에든 '이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위해 목숨을 버려도 좋다'하는 선을 우리가 분간할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우리는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본문 말씀의 요지는 사랑이 풍성해져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곧 높은 수준으로 사랑할 때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식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식은 사랑 가운데서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워하면 그 지식이 사라집니다. 미워하면 점점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려고 한다면 먼저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존중하고 사랑하면 그 사람을 좀더 깊이 알 수 있지만, 미워하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다 몰라지게 됩니다. 사랑만이 참 지식의 근원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열릴 때 상대방도 세상도 나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은 것입니다. 사랑하면 총명이 생기지만, 미워하고 증오하는 동안은 몸도 마음도 점점 뒤틀리고 어두워집니다. 총명이 흐려지고, 판단력이 없어지고,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극히 선한 것을 아는 분별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점점 풍성해져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셋째, 진실을 위한 기도입니다.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잠언 30장 7절에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이것은 종말론적 소원입니다. 이어 8절에서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솔로몬은 온 백성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위와 명예를 지키려고 거짓말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위선자가 되지는 않을까, 진실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사실, 사람이란 지위와 명예가 높아질수록 진실하기가 어렵습니다. 지위도 없고 명예도 없는 사람은 차라리 솔직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예로 들어볼까요? 집안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잘한다 잘한다' 소리만 듣고 기대를 모으며 자란 아이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숨기려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선생님과 급우들이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제 잘못입니다'하고 나서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아이는 굳이 거짓말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나는 원래 그런 아이이고, 또 모두 그런 줄 알고 있으니까……'하는 배짱 비슷한 심리도있겠지요. 솔로몬은 이 딜레마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제 기도합니다. '하나님, 거짓말하지 않게 해주세요.
남은 시간만이라도 거짓말을 멀리하고 깨끗이 살아가게 해주세요.' 나이 많아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 온 솔로몬이 이처럼 종말론적인 소원을 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당신들이 진실하고 허물없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진실' 곧 sincere는 헬라어로 에일리크리네이스입니다. 햇빛에 시험해 보아 깨끗한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도자기 만드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도자기를 구울 때 보면 잘구어지지 않고 조금씩 갈라진 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다 살짝 밑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금이 조금 간 것은 가려지게 됩니다. 실내에서는 이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감쪽같습니다. 그러나 햇빛에 비추어 보면 금 간 것이 빤하게 드러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진실'은 바로 밑칠 하지 않은 그릇을 뜻합니다. 밑칠 아니한, 페인팅을 하지 아니한 자연 그대로의 깨끗함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진실입니다.
때묻고, 거짓되고, 허위요 위선이 아닌 본질 그대로의 깨끗한 신분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믿음, 처음 사랑과 처음 진실 그대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고백한 그 신앙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지켜지기를 바라는 소원입니다.
넷째,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진실로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아름다운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곧 행동을 말합니다.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인 의를 말합니다. 열매 맺는, 행동적인 역사가 이루어지는 그런 의미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날에 허물없이 깨끗하게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재림의 때에 의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절)." 우리가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의의 열매를 맺는 것도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울의 기도 -- 이 기도의 모본을 따라 사는 것, 이기도의 제목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가 있을 때 그것이 바른 그리스도인 상(像)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우리 또한 사도 바울의 기도를 따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런 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면서 그런 응답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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