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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리스도인의 표지(1)(빌1장 2절~11절)

by 【고동엽】 202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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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표지(1)(빌12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이 본문을 세 단락으로 나누어 공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우선 3절로부터 6절까지를 따로 떼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전체의 제목을 붙인다면 '그리스도인의 표지(The mark ofChristian life)'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어떤 표지가 있습니다. 운동 선수들에게는 그들의 소속 팀을 나타내는 마크가 있고 학생들에게는 학교 배지라는 표지가 있듯이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표지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가리킬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5)"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님의 제자된 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기준을 어디에다 둡니까? ", 저 사람은 진짜 크리스천이다"라고 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근거는 첫째가 감사요, 둘째가 선교요, 셋째가 기도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세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말해 줍니다.

먼저 감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잘 믿는 사람인가'할 때 남달리 청렴(淸廉) 진실하게 사는 사람, 구제와 봉사에 열심인 사람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모두 겉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기쁨이 없다면 이를테면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울면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 마음도 기쁘고 상대방의 마음도 기뻐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기쁜 마음으로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강도에게 빼앗긴 것이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받지 못하고 열등 의식이라든가 굴욕 같은 것을 느꼈다면 그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예찬하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요? 그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함께 있으나 헤어져 있으나 한결같이 기쁘고 즐거운 법입니다.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다 기뻐야 사랑입니다. 기쁨이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간단히 사랑만을 예로 들었지만,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쁨 없이 하는 일은 아무리 귀한 일이라도 무의미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다해도 기쁨이 없으면 허망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 된 표지는 바로 기쁨입니다. 즐거운 마음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섬김 받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기뻐해야 합니다. 그 기쁨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소유욕의 성취로 얻어진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즐기느냐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일반론적으로도 사람은 그가 어떤 것으로 기뻐하느냐에 따라 그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성숙치 못한 사람입니다. 받기보다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차원 높은 사람입니다. 먹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고상한 사람이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여유가 생가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모였다 하면 화투판밖에 벌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는 방법도 모르고 남을 기쁘게 할 줄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에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으레 음식 대접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더 잡수세요"하고 강요합니다. 그래서 대접이라기보다 오히려 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음식 많이 차린 집에 가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밥 먹을 데가 없어서 교인들 집에 심방 가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마치 굶고 사는 사람 앞에 하듯 잔뜩 차려 내는 것, 이게 얼마나 실례되는 일인지 아십니까? 하지만 어떤 가정에서는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하고 감사해하며 신앙 간증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귀한 간증들이 음식 대접보다 훨씬 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을까요? 신령한 기쁨, 질적으로 높은 차원의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어 어원을 살펴보면 '생각하다(think)''감사하다(thank)'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해서 깨달을 때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감사가 없습니다. 철나기 전에는 부모님에게 고마운 줄을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웬만큼 철이 난 다음에야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실감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제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입니다. 11시가 넘었는데 한 집사님이 길에 나와 떨고 서 있었습니다. 아직 딸이 들어오지 않아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 나와 기다린다고 해서 딸이 더일찍 들어오느냐고 말했더니, 그렇게 서서 옛날 생각을 한답니다. 그때에 자기를 기다려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이 딸 걱정을 하셨을까'하고 생각하니 새삼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 합니다. 생각을 하고서야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동안에 자신은 작아지고 은혜는 커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전부가 받은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따지고 보면 세상에 갚을 수 있는 것이란 별로 없습니다. 평생토록 받기만 하고 사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에도 남에게 신세를 집니다. 죽은 다음에도 자신의 장례식을 스스로 치르지 못합니다. 죽어서까지 남에게 신세를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신세지고 받은 것들뿐입니다. 당연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축복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생각을 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신앙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생각을 할 때마다 원망을 합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한이 맺혀서 생각을 할 때마다 원망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런 일 저런 일을 원망하다보니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4절에는 무엇이라 되어 있습니까?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 신앙이 잘못된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요, 원망과 불평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서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게 됩니다. 원래'감사'라는 뜻의 헬라어 카라와 '기쁨'이라는 뜻의 헬라어 유카리스티아는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함께 감사한다는 것은 곧 기도와 함께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기도할 때에 가장 깨끗해지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때는 하나님과 만나는 가장 신령한 때요, 그 마음에 감사가 자리잡는 때입니다. 바울은 3절과 4절에서 '항상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말씀합니다.

기도 중에서 가장 능력 있는 기도가 기쁨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바울은이 사실을 몸소 체험한 바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매맞고 죽게 되었으나 기쁨으로 감사하고 찬송했을 때에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이기적의 체험은 빌립보 교인들도 자세히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바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기쁨으로 간구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기쁨으로 간구할 때에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간구하고, 감사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아울러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받는 이가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께 "이 사업을 할까요, 말까요?" "이 사람과 결혼할까요, 말까요?"하고 자꾸 믿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이럴까요 저럴까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기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구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와 기쁨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는 하면서도 무엇이 감사한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기뻐합니다'하고 기도하면서도 무엇이 기쁜지 말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해놓고는 그저 달라는 불평, 불만뿐입니다. 무엇이 감사한지, 무엇이 기쁜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아주머니의 남편이 매일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 주정을 합니다. 하루는 그 부인이 술에 곯아떨어져 자는 남편 옆에 앉아서 신세타령을 하다 생각해 보니 기쁨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설교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하나님, 아무리 해도 감사할 일은 없지만 좌우지간 감사하고 기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령이 뜨겁게 역사 하면서 구체적으로 감사할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과부보다야 낫지 않은가. 술 취해서 비틀거려도 제 집 제대로 찾아오는 것 보면 용하지. 그 뿐인가. 주일날 교회 가라고 집 봐주고, 미안하니까 헌금도 주고, 이만하면 고맙지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남편이 목이 타서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울고 있어야 할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지 뭡니까? 남편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으니 부인은 구체적으로 고맙고 감사한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나도 내일부터 교회 나가 줄께"하더랍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구체적으로 감사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꼭 내가 받아야만 감사하고 꼭 내가 먹어야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아이들 먹이고 입히면서 기뻐하고 아이들 공부 잘하는 것 보며 기뻐합니다. 아이들 공부 잘한다고 부모한테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저들을 보며 기뻐합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보며 기뻐할 줄 아는 차원 높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속이 좁아서 내 손에 쥐어져야만 기쁘고 내 자녀가 잘되어야만 기쁜 것은 잘못입니다. 내 자녀가 입학시험에 실패했지만 남의 자녀라도 성공했으면 축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과 교제 때문입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신앙을 잘 지켜 나가며 자신에게 다소의 위로금까지 보내 온 성도의 교제를 생각할 때, 신령한 기쁨이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내가 감옥에서 나가야 기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냐 어떻게 되든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님 잘 믿고 잘되는 것만이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라면 바로 이러한 기쁨을 질길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될 때에 기쁘고, 다른 교인들이 좋은 집으로 이사갈 때에 기쁘고, 다른 사람들의 일이 잘될 때에 기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 -- 성도의 믿음과 교제와 성장을 보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을 은사(恩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라고 한 것을 쉬운 말로 풀이하면 부모를 생각해도 감사하고 아내를 생각해도 감사하고 남편을 생각해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나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기억할 때마다 끊임없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표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생각해도 억울하고 저 사람을 생각해도분통이 터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성도의 교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이노니아 영적 교제요 복음 안에서 맺어진 교제입니다. 교인을 만나는 것이 꺼림칙하고 거북한 사람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 만나도 반갑고 저 사람 만나도 반가운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또 성도의 교제란 종말론적인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만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집에 살던 식구끼리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길이 서로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교제는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병원에 입원하고 보니 자기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찾아와 기도해 주는 친구는 교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고 잘 맺어지도록 힘쓰십시오. 잔치집에도 가고 상가집에도 가고 열심히 사귀어 두십시오.

장례식 때 보면 그 덕이 나타납니다. 성도의 교제가 시원치 않던 사람은 죽으면 아무도 와 줄 사람이 없습니다. 임종 때나 장례식 때 보십시오.

진정 그 가정을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것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위로만큼 따뜻하고 힘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례식 치른 후고인(故人)의 가족들이 믿든 안 믿든 모두 함께 교회에 나와 감사하고 새롭게 성도의 교제를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감사하는 마음 --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십자가로 맺어진 영원한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맺어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시작하신 예수님 때문에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이권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그 동기가 아주 순수한 것입니다. 사실 세상 교제는 그리 순수하지 못합니다. 이래저래 불순한 조건이나 동기가 많이 파고듭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믿음으로, 그리스도 때문에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분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재림의 날까지, 종말이이를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들의 교제를 지속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친척보다 성도의 교제가 가장 깊고 가장 의미 있고 영원한 것이요, 가장 순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여 외롭고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상에 나혼자 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두십시오. 다른 이유 하나 없어도 우리가 한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두 찾아옵니다.

또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도는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고독을 느낄 필요도 없고 고독을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도 많고 눈물로 위로해 줄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외면한다 해도 성도의 교제는 언제까지나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동기가 그리스도요 그 역사가 곧 그리스도이기에 이것을 이름지어 마라나타 커뮤니티(Maranatha community)라 합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주의 능력 가운데 이 교제가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확신하노라"고 합니다. 그렇게 될 줄은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기쁨, 신령한 감사, 구체적인 기쁨, 구체적인 감사, 그리고 종말론적인 성도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면서 늘 감사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된 첫째 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1)(12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이 본문을 세 단락으로 나누어 공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우선 3절로부터 6절까지를 따로 떼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전체의 제목을 붙인다면 '그리스도인의 표지(The mark ofChristian life)'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어떤 표지가 있습니다. 운동 선수들에게는 그들의 소속 팀을 나타내는 마크가 있고 학생들에게는 학교 배지라는 표지가 있듯이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표지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가리킬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5)"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님의 제자된 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기준을 어디에다 둡니까? ", 저 사람은 진짜 크리스천이다"라고 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근거는 첫째가 감사요, 둘째가 선교요, 셋째가 기도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세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말해 줍니다.

먼저 감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잘 믿는 사람인가'할 때 남달리 청렴(淸廉) 진실하게 사는 사람, 구제와 봉사에 열심인 사람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모두 겉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기쁨이 없다면 이를테면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울면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 마음도 기쁘고 상대방의 마음도 기뻐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기쁜 마음으로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강도에게 빼앗긴 것이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받지 못하고 열등 의식이라든가 굴욕 같은 것을 느꼈다면 그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예찬하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요? 그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함께 있으나 헤어져 있으나 한결같이 기쁘고 즐거운 법입니다.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다 기뻐야 사랑입니다. 기쁨이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간단히 사랑만을 예로 들었지만,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쁨 없이 하는 일은 아무리 귀한 일이라도 무의미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다해도 기쁨이 없으면 허망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 된 표지는 바로 기쁨입니다. 즐거운 마음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섬김 받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기뻐해야 합니다. 그 기쁨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소유욕의 성취로 얻어진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즐기느냐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일반론적으로도 사람은 그가 어떤 것으로 기뻐하느냐에 따라 그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성숙치 못한 사람입니다. 받기보다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차원 높은 사람입니다. 먹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고상한 사람이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여유가 생가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모였다 하면 화투판밖에 벌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는 방법도 모르고 남을 기쁘게 할 줄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에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으레 음식 대접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더 잡수세요"하고 강요합니다. 그래서 대접이라기보다 오히려 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음식 많이 차린 집에 가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밥 먹을 데가 없어서 교인들 집에 심방 가는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마치 굶고 사는 사람 앞에 하듯 잔뜩 차려 내는 것, 이게 얼마나 실례되는 일인지 아십니까? 하지만 어떤 가정에서는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하고 감사해하며 신앙 간증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귀한 간증들이 음식 대접보다 훨씬 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을까요? 신령한 기쁨, 질적으로 높은 차원의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어 어원을 살펴보면 '생각하다(think)''감사하다(thank)'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해서 깨달을 때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감사가 없습니다. 철나기 전에는 부모님에게 고마운 줄을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웬만큼 철이 난 다음에야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실감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제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입니다. 11시가 넘었는데 한 집사님이 길에 나와 떨고 서 있었습니다. 아직 딸이 들어오지 않아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 나와 기다린다고 해서 딸이 더일찍 들어오느냐고 말했더니, 그렇게 서서 옛날 생각을 한답니다. 그때에 자기를 기다려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이 딸 걱정을 하셨을까'하고 생각하니 새삼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 합니다. 생각을 하고서야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동안에 자신은 작아지고 은혜는 커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전부가 받은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따지고 보면 세상에 갚을 수 있는 것이란 별로 없습니다. 평생토록 받기만 하고 사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에도 남에게 신세를 집니다. 죽은 다음에도 자신의 장례식을 스스로 치르지 못합니다. 죽어서까지 남에게 신세를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신세지고 받은 것들뿐입니다. 당연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축복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생각을 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신앙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생각을 할 때마다 원망을 합니다. 분하고 억울하고 한이 맺혀서 생각을 할 때마다 원망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런 일 저런 일을 원망하다보니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4절에는 무엇이라 되어 있습니까?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 신앙이 잘못된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요, 원망과 불평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서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게 됩니다. 원래'감사'라는 뜻의 헬라어 카라와 '기쁨'이라는 뜻의 헬라어 유카리스티아는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함께 감사한다는 것은 곧 기도와 함께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기도할 때에 가장 깨끗해지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때는 하나님과 만나는 가장 신령한 때요, 그 마음에 감사가 자리잡는 때입니다. 바울은 3절과 4절에서 '항상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말씀합니다.

기도 중에서 가장 능력 있는 기도가 기쁨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바울은이 사실을 몸소 체험한 바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매맞고 죽게 되었으나 기쁨으로 감사하고 찬송했을 때에 옥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이기적의 체험은 빌립보 교인들도 자세히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바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기쁨으로 간구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기쁨으로 간구할 때에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간구하고, 감사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아울러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받는 이가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께 "이 사업을 할까요, 말까요?" "이 사람과 결혼할까요, 말까요?"하고 자꾸 믿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이럴까요 저럴까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기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구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와 기쁨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는 하면서도 무엇이 감사한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기뻐합니다'하고 기도하면서도 무엇이 기쁜지 말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해놓고는 그저 달라는 불평, 불만뿐입니다. 무엇이 감사한지, 무엇이 기쁜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아주머니의 남편이 매일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 주정을 합니다. 하루는 그 부인이 술에 곯아떨어져 자는 남편 옆에 앉아서 신세타령을 하다 생각해 보니 기쁨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설교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하나님, 아무리 해도 감사할 일은 없지만 좌우지간 감사하고 기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령이 뜨겁게 역사 하면서 구체적으로 감사할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과부보다야 낫지 않은가. 술 취해서 비틀거려도 제 집 제대로 찾아오는 것 보면 용하지. 그 뿐인가. 주일날 교회 가라고 집 봐주고, 미안하니까 헌금도 주고, 이만하면 고맙지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남편이 목이 타서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울고 있어야 할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지 뭡니까? 남편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으니 부인은 구체적으로 고맙고 감사한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나도 내일부터 교회 나가 줄께"하더랍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구체적으로 감사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우리는 꼭 내가 받아야만 감사하고 꼭 내가 먹어야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아이들 먹이고 입히면서 기뻐하고 아이들 공부 잘하는 것 보며 기뻐합니다. 아이들 공부 잘한다고 부모한테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저들을 보며 기뻐합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보며 기뻐할 줄 아는 차원 높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속이 좁아서 내 손에 쥐어져야만 기쁘고 내 자녀가 잘되어야만 기쁜 것은 잘못입니다. 내 자녀가 입학시험에 실패했지만 남의 자녀라도 성공했으면 축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과 교제 때문입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신앙을 잘 지켜 나가며 자신에게 다소의 위로금까지 보내 온 성도의 교제를 생각할 때, 신령한 기쁨이 솟아올랐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내가 감옥에서 나가야 기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냐 어떻게 되든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님 잘 믿고 잘되는 것만이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라면 바로 이러한 기쁨을 질길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될 때에 기쁘고, 다른 교인들이 좋은 집으로 이사갈 때에 기쁘고, 다른 사람들의 일이 잘될 때에 기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 -- 성도의 믿음과 교제와 성장을 보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을 은사(恩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라고 한 것을 쉬운 말로 풀이하면 부모를 생각해도 감사하고 아내를 생각해도 감사하고 남편을 생각해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나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기억할 때마다 끊임없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표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생각해도 억울하고 저 사람을 생각해도분통이 터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성도의 교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코이노니아 영적 교제요 복음 안에서 맺어진 교제입니다. 교인을 만나는 것이 꺼림칙하고 거북한 사람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 만나도 반갑고 저 사람 만나도 반가운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또 성도의 교제란 종말론적인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만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집에 살던 식구끼리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길이 서로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교제는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병원에 입원하고 보니 자기를 진정으로 생각하며 찾아와 기도해 주는 친구는 교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고 잘 맺어지도록 힘쓰십시오. 잔치집에도 가고 상가집에도 가고 열심히 사귀어 두십시오.

장례식 때 보면 그 덕이 나타납니다. 성도의 교제가 시원치 않던 사람은 죽으면 아무도 와 줄 사람이 없습니다. 임종 때나 장례식 때 보십시오.

진정 그 가정을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것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위로만큼 따뜻하고 힘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례식 치른 후고인(故人)의 가족들이 믿든 안 믿든 모두 함께 교회에 나와 감사하고 새롭게 성도의 교제를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감사하는 마음 --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십자가로 맺어진 영원한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맺어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시작하신 예수님 때문에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이권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맺어진, 그 동기가 아주 순수한 것입니다. 사실 세상 교제는 그리 순수하지 못합니다. 이래저래 불순한 조건이나 동기가 많이 파고듭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믿음으로, 그리스도 때문에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분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재림의 날까지, 종말이이를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들의 교제를 지속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친척보다 성도의 교제가 가장 깊고 가장 의미 있고 영원한 것이요, 가장 순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하여 외롭고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상에 나혼자 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두십시오. 다른 이유 하나 없어도 우리가 한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두 찾아옵니다.

또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도는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고독을 느낄 필요도 없고 고독을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도 많고 눈물로 위로해 줄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외면한다 해도 성도의 교제는 언제까지나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 동기가 그리스도요 그 역사가 곧 그리스도이기에 이것을 이름지어 마라나타 커뮤니티(Maranatha community)라 합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주의 능력 가운데 이 교제가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확신하노라"고 합니다. 그렇게 될 줄은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기쁨, 신령한 감사, 구체적인 기쁨, 구체적인 감사, 그리고 종말론적인 성도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면서 늘 감사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된 첫째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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