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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빈 무덤의 증거! (마 28:1-10)

by 【고동엽】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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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의 증거! (마 28:1-10)

 

조지 몰간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미국의 메사추세 츠 주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를 목 회 하시는 목사님인데, 목회 중에 경험한 사실을 잡지사에 기고해서 나왔던 사실
이야기입니다. 아주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한 어린이가 있 었습니다. 그는 발로 걸어다닐 수
도 없는 그런 처지여서 휠체어에 태 워 가지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총명했고
그는 신앙이 특별히 좋았습니다. 이름은 톰이라 고 합니다. 어느날 부활절을 앞두 고 교회학
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 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계란 하 나씩을 주었습니다. 그 계란
속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일주일 동안 잘 생각해서 이 계란 속에 생명을 넣어 가지고 오라."
그 랬습니다. 아이들은 그 속에다가 꽃을 꺾어서 넣어 오기도 하고 대부 분의 아이들이 곤
충을 잡아서, 꿈틀 거리는 곤충을 잡아서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톰은 빈 플라스틱 계란 을
가지고 왔습니다. 애가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을 잡을 수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선생님은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괜 찮다. 숙제를 못 했어도 괜찮다."그 랬습니다. 이 아이는 심각한 얼굴 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속에 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 다. 보이지 않는 생명을 담았습니 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 않 았습니까?"
이 말에 깜짝 놀랐습니 다. 이 어린이의 부활 신앙, 빈 무 덤을 통하여 증거된 그 신앙을 보
면 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일 후에 얼마 안 되어서 이 톰은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기독교 신학에는 '험증학'이라고 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요새는 이 런 것을 잘 가르치지 않
습니다만은 오래 전에 제가 이것을 가리켜 본 일이 있는데 이 험증학에는 특별히 이 부활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것을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혹은 역사 적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
애나, 예수님의 이적이나 혹은 이 부활의 사건들을 전부 증명합니다. 그런 과목인데 거기에
이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소재가 됩 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생각해 보 세
요. 무덤이 비었다! 우리 단순 하게 생각하지만 도대체 시체가 어 디에 간 겁니까? 예수 부
활이라는 이 사건으로 해서 이 무덤이 빈 것 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했 다고 증거
합니다. 이 때문에 예루 살렘 온 성은 난리요, 유대 나라가 난리요, 온 세계가, 당시 온 세대
가 난리예요. 예수 부활! 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온 세계를 다니며 복 음을 전하고 자 또
한편 부활을 반 대하는 사람들이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저지할 수가 없어요. 아 주 기
쁨으로 순교를 하는 거예요. 부활의 증인은 순교하는 거예요. 생명을 믿으니까. 자 이렇게
되니 역사적으로 말야 2000년 동안 이렇 게 크고 놀라운 사건이 여기서 시작 이 되는데 상
상해 보세요. 이 빈 무덤에 대한 사건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먼저는
시체에 대해서 우리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시체를 어떻 게어떻게 해서 감추
었다고 생각합시 다. 아마 거기에 있는 군사들을 좀 뇌물을 줘 가지고 잠들게 하고 시체 를
도적질 해갔다. 그래 어디다 감 추어 놓고 예수 부활했다고 소리 질 렀다면은 상상해 보세
요.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하면서 목숨 바치는 사 람 봤습니까?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손에 있는 건 아니고 또, 이렇게 복 잡한 문제가 돼서 자 보세요.
빌라 도가 예수를 죽였는데 그 예수가 부 활을 했거든, 이제 빌라도는 또 로 마는 완전히
정죄되는 거예요. 여 기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시체를 찾 아내가지고 빌라도가
"여기 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 많은 예수 믿는 사람 들을 죽
이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시체만 찾아 놓으면 그만이예요. 그런데 이걸 못 했어요. 더구나
가 야바, 제사장,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 은 아주 원흉인데 그야말로 큰 고민 입니다. 메시아
를 죽여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가 되는데 이걸 어떻게 벗어날 길이 있습니
까? 시체만 내 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 런데 이걸 못 했어요. 그리고 정죄 당한 것이 아닙니
까? 그리고 보면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무 덤이 비어 있다"
하는 것, 이건 굉 장한 신학적 의미가 있고 상징적 의 미가 있고 엄청난 메시지가 그 속에
있어요. 무덤이 비었습니다. 시체 는 없습니다. 여기서 부활 증거의 첫째가 빈 무덤이라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의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입
니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은 죽음을 향해서 살 아가고 있는 거예요. 다 갈 것이니 까 말이에
요. 대단히 실례지만 이 제 앞으로 여기서 모름지기 한 백년 후에는 여기 앉았던 분이 한
분도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인 생이에요. 죽으면 끝입니다. 뭐 지 식이라고 해봐도
죽음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에요. 명예요 혹은 부귀 영화요,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죽음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 모 든 권세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으면 그만이예요. 그래서 우
리는 흔히 죽음을 끝이라고 말합니다. 간혹 장례식에 가보면은 아주 위로 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조금 더 살아야 할텐데 죽었다고, 답답하다고"
더 위로하느라고 애쓰 고, 위로 받지 못해서 몸부림치고,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버스를 타
고 가다가 먼저 내리는 사람도 있고 좀 뒤에 내리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에 요. 조금 먼저
간 거지 뭐 이상 할 것도 없어요. 누가 누구를 위로한 단 말입니까, 다 같은 처지에……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미국 사람 들은 죽으면서도 농담을 잘해요. 아내가 몸부림치면서 당신
없으면 난 어떻게 사느냐고 뭐 어쩌고저쩌 고 그러니까 남편이 죽으면서 그랬 답니다.
"걱정 마라, 너도 곧 죽을 텐데 뭘."
사실이 그래요. 우리 웃 으면서 죽고, 웃으면서 보냅시다. 그렇게 몸부림 칠 건이 아니에요.
나도 갈 거니까요. 누가 누구를 위 로하고 말고 해요. 슬퍼할 얘기도 아닙니다 이거는요. 죽
음은 엄연한 실제요 우리 앞에 있는 사건이에요.
자 여기까지는 좋은데 또 하나 문제가 있어요. 그것이 바로 죽여 서 해결하겠다는 것이죠.
최후의 해결책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많은 독재자들이 그랬습니다. 엄
청난 사람을 숙청해 버렸어요, 죽였어요. 그러면 다 해 결된다. 조용해진다는 거죠, 정말 그
렇습니까? 구 소련이 일년에 백 만 명씩을 숙청했습니다. 중국의 천안문 사건이 있을 때, 사
건 바로 뒤에 제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제가 그 천안문 광장에 여러 곳에 널려있는 핏자
국을 눈으로 확인했습 니다. 많은 사람 죽었습니다. 거기 에 있는 이야기, 신문에도 났었지
요. 많은 청년들이 죽고 있을 때, 중국 의 지도자, 실례가 되기 때문에 이 름을 대지 않겠습
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국에서 11억 인구요. 11억 인구 앞에 백만 명은 적은 것입니다."
그 말에 광장이 조용해졌습니다. 백만명을 죽여서라도 조용하게 만들 겠다는 것입니다. 할
말 있습니까?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중국 이 조용해졌어요. 자 우리 북한 땅 에도 말
이지요. 여러분 아시는 대 로 며칠 전에 신문에 났습니다. 그 게 사실입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 려웁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깐 도둑 질도 많고, 부정부패가 많아져요. 그래서 700명을 총
살했다는 거 아닙 니까. 앞에다 세워놓고 쏴버려요. 아주 조용합니다. 죽여서, 죽여서 해결하
겠다는 거요. 자 그래서 해 결이 되는 겁니까? 역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뭐 이런 얘기가 많 이 있습니다마는 심지어는 예수님을 중심해서도 이런 얘기
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9절로 50절에 보면, 제사장 가야바가 이런 엉뚱한 말을 합니
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 족이 조용할 수 있다면, 죽어야지. 그가 메시아든 말든 의인이든,
죄인 이든 알바아니다. 한 사람이 죽어 서 온 민족이 조용할 수 있다면, 죽 여버려."
이것이 가야바의 생각이 요. 죽여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 는 이 엄청난 죄악. 이 때문에 세
상이 이렇게 소란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아는 바와 같이 그렇게 해결된 일은 없습니다.
보세요. 빌 라도 법정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야바, 바
리 새인, 빌라도, 헤롯당, 사두개인, 서 기관. 이 사람들이 원래 사이가 좋 은 게 아닙니다.
서로 철천지 원수 처럼 미워하는 사람들이요.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은 하나가
됩니다. 합작을 합니다 협력을 합 니다. 연합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교묘
하게 씌어 서 빌라도의 이름으로 예수를 십자 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상상해 보 세요. 이것
은 악의 성공입니다. 악 한 사람들이 모아놓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성공 작품입니다. 이렇
게 빌라도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딱 못 박아 놓고, 아마 손을 씻으면서 '성 공했다. 어이구
오랫동안 시달렸 다.' 그랬겠지요. 다 끝났다고 생각 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거 든
요.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 도 한번 봅시다. 그들의 기대감, 그 들의 청운의 꿈, 정치적
욕망, 메시 아의 대망사상. 이런 것들도 이제 다 끝나버렸습니다. 하늘로서부터 온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끈질 기게 물어온 사람들도 이제는 다 끝 났습니다. 절망과 실망으로 끝
났습 니다. 누가복음 24장 21절에 보면 은 여기서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 가는 제자가 있
었어요. 그들이 하 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메시아 인줄로 알았노라. 이스라엘을 회복 할 자라고 믿었노라. 그렇게 바랬
는데 비참하게 죽어가고 말았다. 우리의 기대와 간절한 소원도 이렇 게 끝나고 말았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군사까지 세워서 문을 지키
게 했습니다. 이제 밤은 고요 합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인 생들은 여기까지 생각합니다.
이러 면은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합 니다. 그렇습니까?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무
덤에서 새로운 사 건이 시작됩니다. 창조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초월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
이 됩니다. 그 빈 무덤에서부 터 이것이 기독교요 이것이 신앙이 요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
런데 성 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대로 부활 하셨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 의 말씀을 일찍이 바로 깨달았더라 면 절망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씀대 로
부활하셨어요. 사도 바울은 고 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합니다. 성경 대로 부활하셨다고, 성경
에 곳곳에 계속적으로 부활신앙이 있습니다. 이 부활에 대한 말씀들을 똑바로 이 해했더라
면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실망할 필요가 없었는데. 성경 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대로
부활 하셨느니라'
또 하나는 엄청난 복음이 있습니 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저는 이 말 씀이 너무 가슴이 뜨겁습니다. 너 무나도 감사합니다. 예수님 너무 좋은 분입니
다. 이 제자가 누굽니 까, 이 멍청한 제자들. 예수님의 그 많은 능력을 보고 그 많은 말씀을
배우고 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 한 부탁까지 받았던 사람들이 말입 니다. 예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갔어요. 사랑하는 제자 베 드로는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했어요. 모
른다고 하고 마지막엔 맹세하고 마지막엔 저주까지 했어 요. 이 형편없는 제자를 왜 찾아갑
니까? 예수님, 저들이 실망하고 갈 릴리에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갈 줄 알고
"거기서 만나자."
얼마나 고 마우신 분입니까?
"거기서 만나 자."
여기 아무 책망도 없어요.
"내가 죽을 때 이 도망간 놈들아!"
그 얘기 안해요.
"이 형편없는 놈 들아!"
그런 말씀이 없어요. 부활하 신 예수,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 고 일러라."
말씀하십니다. 이 부활 의 큰 은혜 앞에 이 엄청난 사건 앞 에서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바
로 절대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 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책망하지도 않습니
다. 특별 히 제가 이렇게 늘 생각해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 저 같으면은요 빌라 도 법정을
아예 벼락 내리고 말겠어 요. 이 가야바 벼락맞아 죽도록 하 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뭐 그렇게는 안 하더라도 최소한도 빌라도를 찾아가서
"이 사람아 정치 똑똑히 해라. 재판 좀 정신차려해 이놈아!"
이런 한 마디 안하겠습니 까? 한 마디쯤 할 만 하잖아요? 또 가야바 이 대제사장이라는 사
람 이 이 꼴이니까
"하나님을 전문적으 로 섬긴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야 정 신 좀 차려라."
한 마디쯤 할 수 있 잖아요. 예수님은 이제 아무도 미 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께
는 원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겼습
니다. 그 여유와 그 넉넉한 능력, 그 권세 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거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미련해서 이 런 것은 모르고 지금도 무덤만 장식 하고 있습니다. 이 얼
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요새 우리 나라도 어지 간히 무덤 때문에 신경들 쓰드만요. 여러분
역사를 이런 시각에서 보면 요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 다. 옛날 모든 사람들이요 그
모든 문화가 무덤 때문에 망했어요. 그 사원이니, 뭐 비석이니 흔적 전부 무덤입니다 그게.
무덤을 장식한 거예요. 애굽의 피라미드, 그 무덤 하나 만들기 위해서 수만 명이 죽었 습니
다. 수백년 동안 만들었어요. 무덤하나 만들려고 이 짓을 한 거예 요. 또 중국에 씨안에 가
서 보면은 진시황의 무덤 굉장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 있었나 한심 하죠. 무
덤입니다. 종교적으로 보 아도 소위 유명한 사원이라는 거 전 부 무덤입니다. 말이 베드로
성당 이지 베드로의 시체가 그 안에 있습 니다. 베드로의 무덤입니다. 무덤 장식 하느라고
온통 정력을 다 쏟았 어요 그리고 끝난거에요. 이걸 잊 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 은
비었습니다. 그런데 에수의 제 자들의 무덤은 왜 이렇게 큽니까? 여기에 넌센스가 있는 거
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87년 미국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돈을 번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이
"쑴멈보눔"
나도 잘 모르는 단어 요. 라틴어라고 하는데 최고선이라 는 말입니다. 이런 이름의 회사를
차렸는데 뭘하는 곳인고 하니 미이 라를 만드는 곳이에요.
"당신들 죽 거든 돈을 미리 내시요. 그러면은 아주 영원히 썩지 않는 기가 막힌 미이라를
만들어 주겠소. 그리고 호화로운 관을 만들겠소. 관 하나 에 100만불. 보석으로 장식한 무
덤."
이런 것을 내 놓았는데 정신 빠진 사람들이 수없이 거기에서 돈 을 내서 이 회사가 짭짤하
게 돈을 벌었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요. 우리 나라에도 이거 사업될걸요? 왜 이런 것입니
까?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기에서 심지어는 자식들 이
굉장한 무덤을 만들 때
"왜 그렇 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번 돈 아버지가 쓰는데요."
이렇게 밖 에 생각이 안됩니까? 한심한 얘기 죠. 여러분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 습니다. 얼마
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무덤이 무슨 의미
가 있는 겁니까?
또한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을 보 십시다. 무서움과 큰 기쁨, 두려움 과 큰 기쁨이요. 아 두려
울 수밖에. 빌라도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할 때 죄인이 됩니다. 가야바는 예수가 부활했으니
자기는 용서받을 수 없 는 죄인이 됩니다. 두렵지요. 심판 이 두렵지요. 또 예수님의 제자들
도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지 못했 으니 말이에요. 부끄럽고 죄송하고 두렵지요. 그러나 이
모든 부끄러 움은 잠깐이요 두려움도 잠깐이요 예수 부활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오로지 기
쁨과 감격으로 충만합니 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신앙입니다. 사도행전에 그 교회의 시작은
부활 신앙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 부활!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부활한다 이거예
요. 그래서 그들은 순교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폭 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됐고 선교
하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충만함 이 있었습니다. 그 충만함이란 바 로 이것입니다. 부활 신
앙으로 충 만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림 대망 신앙으로 충만하고 특별 히 살아 계
신 그리스도 현재, Living Christ, 현재 살아 계신 그리 스도의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래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 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그리스도의 현재적 생명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고 생명력을 느끼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
아갔던 것입니 다. 여기에 큰 기쁨이 있고 이 큰 기쁨 앞에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화해
가 있고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 다. 이것이 그리스도요 이것이 부 활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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