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자기 십자가의 의미! (마 10:34-39)
1964년 그러니까 꽤 오래 전 이야기가 됩니다. 제가 미국 유학시절에 YMCA에 서 운영하는
청소년 여름 캠 프에 회목으로 잠시 참여했 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나는 나름대로 미
국 젊은이 들의 세계에 또 그들의 신앙 구도, 이런 것을 많이 보고, 깨닫고, 공부를 많이 할
기 회가 되었습니다만은 특별히 그 일주일 동안에 캠프 생활 을 끝내고 마지막에 촌극을 하
게 됩니다. 이것은 무슨 각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일주일동안 이렇게들 준비
해가지고 몇팀 으로 나누어서 맨 끝날 연극 을 하는 것입니다. 그 연극 중에 한 장면은 제
게 많은 교훈을 주고 충격을 주었습 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이 야기입니다. 무대 위에 많
은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수십개의 십자가라! 큰 십자 가, 작은 십자가, 또 보기 좋 게
만든 십자가 어떤 것은 흉하게 아주 흉물스럽게 만 든 십자가 그리고 어떤 것은 아주 화려
하게 장식물로 만 든 것 뭐 이런 것들 저런 것들이 수십 가지가 널려 있 습니다. 이제 그
학생들 하 나 하나가 나름대로 여러 가 지 색체의 옷을 입고 나와서 십자가 하나씩을 고릅
니다. 큰 것을 찾아보다가
"아이고 이것은 너무 크다!"
좀 작은 것을 하였다가
"이것은 내 몸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는 들었다 놓고 들였다 놓고 하다가는 맨 마지막에는 거 르는 것이 뭐냐하면은 가장
작은 것, 화려한 것, 목걸이 십자가, 십자가 반지, 그리고 모자 위에다가 이렇게 장식 으로
만들어 놓은 면류관 같 은 그런 십자가 이런 것들만 하나씩 다 들고 나가더란 거 에요. 아
무도 그 크나큰 십 자가는 진 사람이 없어요.
맨 마지막에 예수님으로 분장한 청년 하나가 나와서 돌아보고 가장 흉물스럽고, 가장 무거
운 십자가를 예수 님이 다시 지고 그리고 갑니 다. 그것으로 연극은 끝입 니다. 그러나 우리
에게 시 사해 주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지고 있 는 십자가가 못 마땅해 합니
다. 너무 무겁다고 내 체질 에 맞지 않는다고, 내 분수 에 넘친다고, 때로는 이건 내가 져야
할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져야될 건 데, 이게 무슨 팔자가 잘못 되어 가지고 내게 왔다
고 뭔가 운명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분 명 내것이 아니라고, 내가져 야 될 것 이 아니었다는 거 지요.
그래서 이건 벗고, 다 른 것 또 가벼운 것 또 작 은 것 또 작은 것 아니면 아 무 것도 안
지면 좋겠다. 그렇게 그렇게 부르짖으며 한 평생 살아가고 있는 것입 니다. 여러분, 십자가
라는 것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으면, 땅에다 묻고 거기 에
다 비석 대신에 십자가를 거기에다 딱 박아 놓습니다. 나무가지 같다가 십자가를 만들어서
여기 시체가 있다. 뭐 그런 뜻입니다. 또 때로 는 자비에 상징으로 십자가 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 십자가 뭐 공산주의자들도 국경없이 봉사하는 기관이 다. 그래서 적십자사 청 십
자 뭐 이런 얘기가 또 역시 십자가는 자비에 표식으로 사용되는데 대한 인식이올시 다. 그
다음에 십자가가 보 이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에 몸 된 교회가 거기 있다. 그래서 십자가
가 교외를 상 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본질은 아주 원초 적 십자가는 예수그리스
도께 서 지시는 십자가입니다. 놀라운 기적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 니다.
이 십자가 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뜻을 바로 깨닫 기만 하면 그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것 올시다. 예수의 십자가 그 것은 속죄에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
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은 바로 대 제사장에 재물이라는 것 이지요. 속죄의 재물이요.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나 가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 된 것이다. 속죄의 재물이다. 그래서 이것
은 하나님이 우 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죄인을 영접하시기 위해서 지불하는 하나님 자
기 자신 의 희생에 대한 계시다. 그 래서 하나님 자기 자신의 고 통, 하나님 자기 자신의 완
전한 사랑에 대한 계시가 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공의와 사랑이 완성 을 이루
는 바로 그 결정체가 십자가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주는 총 주제 올시다. 이제
예수님의 십 자가가 있고 또 그리고 우리 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 리의 십자가는 예수님
의 십 자가처럼 그 누구를 위해서 대신 지는 그런 십자가에 성 격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
자가를 내가 지는 것처럼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십자가라는 것은 죄 인으로서 그
리스도를 영접하 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 되 기 위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고통과 손해
를 지칭하 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행 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 가질 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양자택일 쪽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술 꾼에게 묻기를
"술을 먹겠느 냐? 떡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술에 밥 말아 떡 안주해 먹 겠다."고 그건 안 되는 것이 에요.. 어느 것 하나만 택해 야 됩
니다. 이것을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도 적인 결단을 요합니다. 다 시 말하면 노예
상태에서 끌 려 가는것이 아니고, 남 하 는데로 따라가는 게 아니고, 타인 지향적인 그렇게
물거 품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진리도 생명도 없습니다.
주도적으로 나 스스로 하나 를 선택합니다. 선택하기 위해서 나머지는 버려야 합 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딸 하나를 앞에 놓고 아버지는
"동쪽 사람한 테 결혼해라."
"어머니는 서 쪽 사람한테 결혼해라."
이 외동딸을 놓고 자꾸 괴롭히 니까 딸이 마지막에 하는 말 입니다.
"동가식 서가숙 하 겠다."
"동쪽 사람하고 먹 고, 서쪽 사람하고 가서 자 겠습니다."
그 되는 일입니 까? 여러분, 연애 해보셨으 면 알지요. 언젠가는 부득 이 결단을 해야 됩니
다. 한 사람 좋게 하면 나머지 사람 슬프게 만들어요. 어느 순 간에는 끝맺는 결단이 없이
는 참 사랑을 이룰 수 없는 거에요. 그런 일이 진짜로 있습니다. 제주도 신혼여행 가서 옛날
에 애인하고 전화 걸다가 들켜서 이혼 당한 사 람이 있더라고요. 이런 여 자는 사랑할 자격
이 없는 거 에요. 그 동안에 애인이 몇 이 되었던 간에 결혼식 날 '땡' 하고 다 잊어버려야
지 거기에 대고 몰래 전화 걸다 가 맞아 마땅하지요. 비행 기장 앞에서 두들겨 맞고 있 더
래요. 얘기 듣고 아무도 안 말려요.
"잘했다."
그래 요. 제주도 가면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여러분, 그 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거지 요.
그러면 십자가가 뭡니 까? 진리를 찾기 위해서 거 짓을 버리고 참 사랑을 위해 서 나머지를
다 버려야 그게 바로 그 아픔의 십자가란 말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 씀 가운데는 밭에
감춰진 '보화'란 비유가 있지 않습니 까? 이 유명한 얘기지요.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
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 하여 자기에 소유를 다 팔아 서 샀다는 점을 생각해 보세 요.
다 팔 때 아까웠겠느냐 말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 가요. 크나 큰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저
것을 얻기 위 해서라면 이것 파는 것 어렵 지 않아요. 이걸 알아야 합 니다. 그런고로 절대
적 가 치에 것을 찾았다면 상대적 으로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거지요. 또 잊어버릴 수 있
는 것이에요. 미래적 가치가 분명하다면 현대적 가치는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것 이에요.
신령한 세계를 바 로 포착한 사람이라면 물질 적인 것이란 초월할 수 있는 것이에요. 영원
한 가치에 것을 찾았다면 사실로 현재 적인 것이란 꾸벅꾸벅 지나 가는 건데 그것 뭐 별 것
아 니잖아요. 거기에 그렇게 마음을 많이 쓸 필요가 없다 그 말이요. 어짜피 가는 길 이요.
어짜피 떠나야 할 세 상이요. 결국은 참된 가치, 절대적 가치가 아직도 이해 되지 않아 그걸
소유하지 않 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마 태복음 10장 전장에 걸
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열둘을 불려놓고 제자를 임 명하고, 그에게 훈시하시는 이
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제 자 되는 길, 그의 제자 됨에 대하여 그 조건과, 비상한 각오와, 결
단을 말씀하고 있 는 것이에요. 아주 궁긍적 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 자 세를 요구합니다.
한 교육학 학자가 자기 아이들을 놓고 시험을 해봤 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벌벌 기어다닐
때 그 아이들 기어다니는 앞에다가 장애물 을 놓아 봤대요. 어떤 아이 는 장애물만 딱 앞에
있으면 기어가다가 멈추는 거에요. 그건 체념형이래요. 한 평 생 그렇게 살더랍니다. 또 기
어다니는 아이 앞에 장애 물을 놓았더니 어떤 아이는 비껴 가더란 말입니다. 이 건 도피형
이요. 어떤 아이 는 장애물을 놓으니까 딱 치 워놓고 직행하는 거에요. 가고 싶은 데로 가
요. 이것 이 진취형이요. 그거 하나 가 쓸만한 아이가 되더란 말 입니다. 여러분, 장애물이
있다고 거기 앉아서 팔자 신 세 타령 하겠습니까? 비껴 가겠다고 비겁하게 이리저리 피하겠
습니까? 정면대결을 해야 되는 거에요. 그것이 제자에게 요구하는 말씀이에 요. 그래서 오늘
본문 가운 데 보면 우선 세계관을 바꿔 라. 세계는 오늘 34절에 보 면 난해한 구절이 있습
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화 평이 아니고 검이로라. 세 상
을 너무 안일하게 보지 마 라. 화평, 안일, 평안, 무사 이것만 기대하지 마라. 나 는 그런 것
을 위해 오지 않 았다. 많은 독재자마다 평 안과, 번영과 자유와 안일을 주겠다고 약속합니
다만은 준 사람 없습니다. 오히려 예 수님 은 말씀하십니다. 검 을 주러 왔노라. 전쟁 상황
을 말씀하시고요. 또 가정 에 대해서도 가정에 화목, 그래요 가정에 '평화 가정이 잘되는
것, 아이들 잘 되는 것' 이것만 열심히 위합니다 만은 그것도 아니에요. 오 늘 본문에 보면
가정, 화평, 잊어 버리라 이것이에요. 그보다도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좀 더 나
아 가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미 워해야 한다.
"현세적인 출세, 또는 세속적인 것, 욕 망 다 잊어버려라. 이런 포 기가 있고서야 주님에 제
자 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 니다. 결국은 사랑에 문제 입니다. 자, 사랑을 놓고 보 세요.
이거 양자택일이요. 주님을 사랑하려면 버릴 것 이 많아요. '아가페' 적인 절대적 사랑 그건
단독적이 고 독단적이에요. 그런고로 참 사랑을 위해서 끊어 버려 야 되요. 자기 사랑, 자기
명 예, 자기 지혜, 자기 판단, 인간적인 지식도 다 버려야 됩니다. 미련없이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야 예수에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 말 씀은 지기 십자가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건 내 몫에 대 한 십자가요. 누구나 지게 되는 십자가입니다. 가끔
개혁을 한다는 분들이 뼈를 깍는 아픔. 뭐 그런 얘기 합 니다만은 깍는다고만 하지. 안깍더
라구요. 뼈를 깍는 아픔이 없어요. 그러니까 개혁이 없는 것이에요. 정 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이 없이 개혁은 있을 수가 없어요. 모두에게 좋게, 모 두에게 이것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에요. 내 포기를 요 구합니다. 큰 희생을 요구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 합니다. 이제
오히려 미워 해야 된다는 말로 표현합니 다. 덜 사랑해야 된다는 거 지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 다. 자! 순교해야 될 시간 에 이 가족 때문에 순교 못 하는 사람
있어요. 뭐 아내 가 과부 된다고 슬퍼하고 아 이들이 고아가 된다고 하니 까 자식 사랑 때
문에 그만 순교해야할 결정적인 시간에 순교 못했어요. 그 다음에 보니까 본인은 부끄러운
삶 을 살지요. 아이들도 잘될 수가 없지요. 오히려 그럴 때에 자식들을 놓아두고 순 교했던
사람들이 그 자식들 은
"우리 아버지는 순교자 요."
"내 남편은 순교자요."
오히려 그들이 더 활발하게, 생명력 있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어찌 해야 되겠습니
까?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자식을 사랑하 는 것이겠습니까? 이걸 잊 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께서는 지금 전쟁 상황을 말 씀하시고 있습니다.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 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 수님께서
"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
이 사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근심하면 돌아가리라."
성경은 이렇 게 유감스럽게 설명합니다. 정말로 영생의 생을 얻는 것 이란 그까짓 재산이
뭐 문제 입니까? 어짜피 버려야 될 건데 이걸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했다.' 그것입니다. 전쟁 상황이에요. 여러분, 혹 일선에서 그런 고생을 해 봤습니까?
저는요. 전쟁 때 한번 겪어봤는데요. 보 세요. 총 소리가
"땅"하고 포 소리가 쿵쿵 날 때 그 일 선에서도 잠이 잘 와요. 얼 마든지 잘 수가 있는데
총 소리가 나면 아내가 정신이 아찔합니다. 그때는 군화가 어떻게 가벼운지 그 배낭이 총이
얼마나 가벼운지 몰라 요. '펄펄' 납니다. 왜 사느 냐? 죽느냐? 하기 때문이 에요. 전쟁이란
"잘 산다. 못 산다."
뭐
"마누라 생각 이 사느냐? 여보, 내 생각 납디까?"
그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지금 사느냐? 죽느냐? 하나밖에 없어요. 생명, 오로지 생명,
오로지 영생, 여기다가 초점을 맞추 는 바로 전쟁 상황이에요. 이것 예수님의 말씀이요. 그
런고로 여기에 가족 자기 생명, 이 세상에 평화, 번영, 쓸데없는 생각 말아요. 다 잊어 버려
요. 그래야 참으 로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순교 상황입니다. 순교자가 순교하려고
할 때 자 가족 생각하고 할 수 있 습니까? '아내 사랑' '아이 들에 사랑' 이것 다 효도해
야 될 부모가 계시는데, 순 교 상황에서는 이런 것들이 다 원수요. '원수' 오늘 성 경에 가
족이 원수라고 그랬 어요. 그래서 원수에요. 가 족이 내 출세에 길을 막는 다는 것이 아니에
요. 내가 주님께 사는 순교 상황에서 는 가정이 원수요. 그런가 하면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추상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것이올 시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야 합니
다. 이제 예수님께 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한 번 보십시다. '바야바'에 음 모가 있지요. 빌
라도에 정 치적 그 만행이 있지요. 바 리새인 교인, 사교도 교인들, 가롯유다 의 배반, 많은
것 들이 엉키고 엉켜서 예수의 십자가가 지금 다가오고 있 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복 잡
한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풀었어요.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아 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겟 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 하고 그가 얻은 응답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 사
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이것 이 십자가에 대하는 예수님 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 역시 비록 작은 십자가요. 내 목에는 작은 십자가로되 지는 자세는 마찬가
지요. 누구도 원망하지 마세요. 누구 때문도 아니요. 세상 을 탓하지도 말고 오로지 아 버지
께서 내게 주시는 십자 가 내게 주시는 잔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것이요. 여 러분 갈라디아
서 6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리라. 여러분 마 음속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
아 버려요. 그리고 나서야 주님을 만날 수 있어요. 주 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요. 우리의 모든 근심은 '십자가를 안지 겠다' 는 거지요. 십자가가 내게서 비켜가기만
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능하면 '십자가 조그만 것, 목걸이 정도만...'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여러분에게는 참 생명 력 참된 구원에 능력을 체험 할 수가 없어요. 그걸 꼭 잊지 말
아야 합니다. 그러 므로 우리의 신령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내 몫에 대인 십자가, 오! 이것을 내 게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주에 뜻입니까? 이것이
주 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입니 까? 그러면 그 길로 가겠습 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찬 송하면서 갈 것이에요. 그 러면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의 능력이 함
께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 의 영혼은 무한히 자유 할 것입니다. 신비로운 능력
을 체험하며, 승리하게 될 것입 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께 인도된 어린이! (마 19:13-15) (0) | 2022.11.22 |
---|---|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 5:1-12) (0) | 2022.11.22 |
천국 열쇠의 비밀! (마 16:13-20) (0) | 2022.11.22 |
추수 일꾼의 의미! (마 9:35-38) (0) | 2022.11.22 |
충성됨의 지혜! (마 24:45-51) (0) | 2022.11.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