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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아는 길(빌3장 10절~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게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즉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고상하고 얼마나 값진 것인가 라는 그 절대적 가치를 설명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그처럼 좋아하던 축복, 명예, 종교적인 자랑 등을 다 내버렸고, 전에 좋아하던 것은 무엇이든지 다 분토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행복이야말로 참 행복입니다. 이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나머지 것을 다 팔아치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감격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것만 얻으면 된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잃어버려도 좋다고 할만큼 귀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동양의 성현 공자도 "아침에 도를 닦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뜻한 바가 있어 그것을 이루기만 하면 나머지는 다 없어도 족하다는 마음입니다. 학문하는 사람은 학문적 깨달음을, 운동하는 사람은 기록의 향상을 바라보며 '내가 저기에 이르기만 하면 내일 죽어도 좋다'하는 마음으로 달려갈 때에 이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사는 가치 의식, 그런 가치관에 따른 생활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버려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또 그 안에서 발견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종합해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입니다.
안다는 문제는 인격을 얻는다는 것이요 인격과 인격과의 소유 관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마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헬라어로 '기노스케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개인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원리나 이치, 혹은 어떤 진리를 내가 배워서 깨닫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알고,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나와 진리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요, 인격과 인격과의 관계에서 정성으로 얻어지는 전인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요 마음으로, 때로는 몸으로 아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납득이 가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몸으로 아는 것입니다. 말로는 아직 설명할 수 없으나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큰 감격으로 아는 지식을 말하고, 그 속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린아기들은 신기하게도 자기 어머니를 정확히 알아봅니다. 다른 사람이 안으면 울고 제 엄마가 안으면 좋아합니다. 자기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좋다고 까르르 웃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이 아기가 어머니를 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기가 무엇으로 어머니를 안다는 것입니까? 어머니의 나이를 압니까? 생일을 압니까? 결혼 날짜를 압니까? 아기가 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하는 것, 이것을 알뿐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요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요즘 문제가 복잡한 것은 괜히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만 알면 되었지 그 이상더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체험으로 얻어지는 지식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식이요, 전인적이고 완전한 지식입니다.
'안다'는 것에 대하여 좀더 살펴봅시다. 창세기 4장 1절을 보면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공동번역에는'한 자리에 누우매'라고 사실적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원문을 보면 위의 두 가지 우리말 번역이 의미상으로는 바른 번역이지만깊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아담 야다 엣 하와(Adam yada et-hawa)"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야다(yada)'가 바로 안다는 뜻입니다. 70인경(Septuagint)이 헬라어로 옮길 때 이것을 '기노스케인' 이러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안다'할때의 기노스케인이 바로 히브리 말 야다(yada)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끝을 보면 요셉이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기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동침'도 헬라 원문에는 기노스케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아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알고, 뜻으로 알고 믿음으로 알고, 몸으로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이처럼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아픔으로 전달됩니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하고'아이구 안됐다'하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의 아픔을 아는 순간 그 아픔자체가 그대로 내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몸이 쑤시고 아플 때에 그 아픔을 내 몸이 앓는 것입니다. 몸에 전달되지 않으면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식이요 사랑입니다.
히브리 랍비의 교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머리가둘 달린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가 한 명이냐 두 명이냐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랍비에게 물으니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쪽 아이를 때렸을 때에 저쪽 아이도 울면 한 아이요, 이쪽 아이를 때려도 저쪽 아이가 울지 않으면 두 아이라는 거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입니다. 내가 누구를 '안다, 사랑한다'하는 말은 그 사람의 아픔과 기쁨이 내게 전달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남 잘 되는 것을 보고 한없이 기쁜 것,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이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마음, 그 뜻, 그 기쁨이 내 가슴과 내 몸에 전달되고 일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내가 동일시되는 체험,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시되면 불쌍한 사람을 볼 때에 예수님의 마음이 작동하므로 마음이 아픕니다. 도와줘야 할 사람을 도와주지 못했을 때에 괴로워서 잠을 자지 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신학 공부 좀 했다고, 성경 몇 줄 더 안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은신비하고 체험적이고 생명적이고 유기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알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무엇을 알았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핵심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 분이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주무셨느냐, 얼마나 시장기를 느끼셨고 얼마나 많이 잡수셨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일부 젊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여자를 볼 때에 아무렇지도 않으셨는가,매력을 느끼셨는가 따위의 궤변적인 것이나 연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까? 이것은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중심을 아는 것이요, 그 중심을 바로 부활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대로는예수는 부활하면서부터 예수입니다. 이 부활에서부터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권능 -- 이것이 핵심이요 부활 사건 없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길은 부활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부활로부터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로부터 부활을 보는 것이 아니요 부활에서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을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도론의 맥락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11장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된 사람을 살려 내시는 사건을 먼저 설명하고 나서 십자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 사건과 부활 신앙에 비추어 십자가를 보라는것입니다. 부활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서 참으로 훌륭한 스승입니다. 그는 부활 사건을 보고 나서십자가를 보고, 십자가를 이해하고 나서 다시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는그런 인식 방법을 택한 사람으로서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활은 곧 보증(quarantee)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증한다는 것입니까? 첫째, 육체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 분이 생명으로 변화하셨으니 우리도 같은 생명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부활의 첫 열매요 육체적부활에 대한 보증입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진리입니다.
둘째, 영생을 보증합니다. 죽으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부활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이 있는 영원한 세계를 내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죽음에 대한 승리를 보증합니다. 이것은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요 이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오늘을 함께 삽니다. 부활 생명을 보증받고 삽니다. 부활 신앙을 현실적으로 생활에 옮기며 삽니다.
넷째, 우리가 의롭다 함 얻었음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증거가 부활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보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장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이것을 모르고는 예수님의 무엇을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 예수님은 사랑이다 하고 아무리 떠들어 보았자 이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종교의 목적이 사랑이다 -- 이것도 다 쓸데없는 소리요 부활만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능력을 자기가 참여하여 알고자 합니다. 그 부활의 능력을 몸으로 체험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의 권능,사망을 이기는 능력, 그 놀라운 다이내믹 파워를 내가 체험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 그 분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부활의 능력을알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 부활의 능력에 동참해 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동참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에만 참여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광의 날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슬픔에 참여해야 기쁨에도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관한 한 십자가고난의 의미를 안 다음에야 부활의 권능에 있는 의미를 알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서 각종 운동 경기를 봅니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 시험 공부로 지친 머리를 운동 시합 응원으로 풀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너무 심각하게 보면 고혈압으로 쓰러집니다. 제가 아는 한 외국인 목사님은 왜정 때에 7년 동안감옥살이까지 한 항일 투사였습니다. 그런데 한일 권투 시합 중계를 보면서 "권투라도 일본 사람한테는 무조건 이겨야 해!" 하고 우리 편을 응원하다가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그만 고혈압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내가 저 선수들 중 어느 쪽에다 나를 동일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편드는 선수가 넘어지면 내가 넘어지는 것 같고, 그 선수가 일어나면 내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운동 선수들의 부인이나 친척들은 차라리 그 중계를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들이, 혹은 남편이 넘어지고 다치고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꼭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그들은 생각만으로도 이미 아들과 남편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딴 사람이 나가 싸우는데 왜 그가 아플 때에 내가 아프고, 왜 그가 초조할 때에 나도 초조하고, 그가 이길 때에 왜 나까지 펄펄 뛰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이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여야 그 분이 부활하시던 아침과 똑같은 모양으로 우리도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아픔과 슬픔이, 그리고 기쁨이 내 몸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생각뿐 아니라 실제로 내 전인격에 와서 닿을 때에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됩니다.
본문 10절 하나만 가지고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백스터(Baxter)는 25번을 설교했습니다. 또 이것은 「Going deeper」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오묘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 본문입니다. 여기까지 체험해야 비로소 예수님 믿는 재미를 알 것입니다. 이것을 머리로만 생각하니까 의심에서 의심으로 치닫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싶다가도 또 의심이 생깁니다. 그렇게 뱅뱅 돌다가 끝내는 조그마한 자갈돌에 걸려도 덜컥 넘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난도 당해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고, 예수님 때문에 능욕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 없이는 예수님 때문에 오는 기쁨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감옥에도 못 가봤고 매도 못 맞아 보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아직은 실망하지 맙시다. 여기에 좋은 길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참아 보셨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오는 기쁨을 다소라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할말 다 하고, 싸울 것 다 싸우고, 욕할 것 다 하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본 것 하나도 없으면 예수님 때문에 얻을 것도 없습니다. 일생을 통해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한 일이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하나님이 은혜의 기회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내 성격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백퍼센트 꾹 참아 봅시다. 다른 때 같으면 곧장 욕설이 나갔겠지만 오늘만은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참아 봅시다. 그러면 엄청난 기쁨을 예수님 때문에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11절을 봅시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죽음이라는 터널을 통해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부활로 향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까? 다 죽고서 부활하겠다는 뜻입니다. 아직 덜 죽었기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죽은 후에라야 부활이 있습니다. 죽다가 만 것은 가사(假死) 상태일 뿐, 이것을 어찌 부활이라 하겠습니까? 그것은 소생이요 치유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완전한 죽음이 있고서야 완전한 부활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합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자(Gnostic)들 때문에 요한복음은 "내가 목마르다."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하고 다른 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특별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처참한 것을 기록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진짜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주 완전한 100% 죽음이 있고서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만의 하나라도 느껴보고 싶다면 완전히 한번 죽어 보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죽은 자는 감각이 없습니다. 욕을 먹어도 무감각하고, 누가 내 것을 빼앗아 가도 무감각합니다. 세상 정욕에 대해서, 유혹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신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는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이렇게 얕은 물가를 뱅뱅 돌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완전한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완전히 죽고 썩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아주 신비로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지, 어떤 형편에 이르든지, 내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이것만은 꼭 이루어야하겠다는 말입니다. 어떤 손해가 있든, 언제 이루어지든, 이것은 궁극적인 관심이요 최종적인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지워 버리고 이것 하나만을 소원으로 살아간다면 시시한 고민, 시시한 걱정, 시시한 소원은 다 안개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그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에 있는 그 신비를 알고 감격하며, 그 안에서 그 능력으로 남은 생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내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고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처럼 죽고 그리스도처럼 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로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불편한 몸을 가지고도 늘 감사하며 늘 찬송하며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고, 온 세계를 바꾸어 놓은 큰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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