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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리스도인의 모습(빌4장 4절~7절)

by 【고동엽】 202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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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모습(빌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 다가옵니다. 그 결론이 가까워오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빌립보서의 주제가 요약,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세 가지 당부 겸 명령을 합니다. 기뻐하라, 관용하라, 기도하라--이 세 가지를 가르쳐 주고 또 명령합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테마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항상 기뻐해야 하고, 내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라' 함은 나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덕을 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의관계, 곧 윤리적인 문제에서는 '관용하라'고 말씀합니다. 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기도하라'는 것이 바울의 권면이자 명령입니다.

이제 이 세 가지를 잘 생각해 봅시다.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기뻐하는 마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관용하는 모습,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자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태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반대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항상 슬퍼하고, 항상 걱정하고, 항상 남을 원망하고, 항상 인색하며 자기만 알고 너그러움이 전혀 없는 비판적인 성격,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전혀 기도하는 마음이 없고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 - 이런 사람은 비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총괄해서설명할 때에는 흔히 기독교인의 3대 덕()을 운위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이것이 3대 덕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기뻐하느냐, 무엇을 감사하느냐, 무엇에 대해서 기도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물질로 인해서 기뻐하고, 세상적인 것을 통해서 기뻐하고,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기뻐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신비로운 관계에서 얻어지는 신령한 은혜의 기쁨이 없다면,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런 때에는 기뻐하고 저런 때에는 원망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둘째,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즉 그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 신앙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소원,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곧 그의 사람됨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 정도를 말해 줍니다. 셋째, 어떤 일에 감사하느냐? 얻으면 감사하고, 잃어버리면 원망하고, 또 세상적인 것에 감사하지만 신령한 것에 대해 감사가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이제 이 세 가지를 차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뻐하라'는 빌립보서의 주제입니다. 기뻐하라할 때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뻐할 일이 없는걸." "아이들이 울 일이 있어 우는데, 울지 말라 한다고 안 울어지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조금 의역하면 주님 때문에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세상 기쁨과 다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어떤 성취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라는 말의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까? 그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첫째, 죄사함받는 기쁨입니다. 그 은혜의 감격, 여기에 뿌리를 두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에게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죄사함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만일 오늘 저녁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죄사함의 문제 만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든 것이 시시해 보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문제는 죄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내가 감추려 한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맙니다. 심판을 받고야 맙니다. 그런데 죄사함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 합니다. 이 죄사함 받게 된 근본적인 기쁨, 이 기쁨은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죄사함 받은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만 있다면 어떠한 슬픔이나 어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죄사함 받은 다음에는 죽어도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죄사함 받은 후에는 고난을 당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고난은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요 결코 저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사함 받고 당하는 고통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더 큰 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감기에만 걸려도 걱정을 합니까? 꼭 벌받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업 망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죄 때문에 망한다고 믿어지기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완전히 받은 사람은 내 사업이 실패한다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더 큰축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죄사함 받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특권을 누리게 된 기쁨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꾼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역에 내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그 거룩한 일에 내가 참여해서 일한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그 귀한 일에 내가 한 몫 거든다는 것이 예사로운 기쁨입니까? 얼마 전에 한 교수가 제 사무실로 건축 헌금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배당 다 지었는데 웬 건축 헌금이냐고 물으니 그 분이 대답합니다. "남이 지어 놓은 예배당에 그냥 드나들기가 왠지 떳떳하질 못해서 늦었지만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이 예배당 지을 때 가담한 교인들에게는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좋은 일에 가담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어떤 교인은 예배당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맡아 했습니다. 저 시계가 보기에는 작지만직경이 1m 50cm나 됩니다. 값이 생각보다 비싼 것이어서, 어째서 꼭 시계를 하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예배 마치고 나올 때마다 쳐다보려고 그래요." 정말이지 이 분은 매일 헌금을 하는 셈입니다. 여기 강대상도 그렇고, 오르간도 그렇습니다.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 거룩한 일에 가담된 것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오르간 소리가 날 때마다 거기 가담되는 것입니다. 이 부족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만민을 구원하는 그 거룩한 역사의 어느 한 모퉁이를 담당했다는 기쁨, 이것이 바로 원천적인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돌로 된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축축한 감옥입니다. 저는 바울이 감옥에서 자유롭게 지낸 줄로만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가 보니까 실제로 쇠사슬이 있었습니다. 땅에 박은 말뚝에 쇠사슬을 걸어 놓았던 자리가 있었습니다. 도망가지도 못할 텐데 쇠사슬에 묶을 것까지 있었겠습니까? 하기야 춘향이도 목에 칼을 쓰고 감옥에 있었다지만, 2천 년전에 이렇게 쇠사슬로 사람을 말뚝에 비끄러매 놓았었습니다. 그렇게 매인 상태에서 몇해를 지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당하는 영광스러운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항상''모든 환경에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기쁨이요,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상대성을 초월해서 절대로 향하는 것 만큼 기쁨을 얻게 마련입니다. 요사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위층이라는 사람들의 구속 사건들은 다 상대적인 것에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장춘몽(一場春夢)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요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기쁨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래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까? 예쁘게 웃는 사람입니다. 웃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비웃는 웃음, 마지못해 웃는 웃음, 반가운 척 웃는 웃음 - 이런 웃음은 다 그 얼굴에 나타납니다.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웃는 밝은 웃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이어 사도 바울은 관용하라고 말씀합니다.

'에피에이케이아'는 번역상 난구절에 속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에 여러 가지로 고쳐서 생각합니다. 인내, 부드러운 마음, 또는 절제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원을 깊이 살펴보면 '관용''옳은 일보다 무엇인가 더 큰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는 일단 옳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옳은 일만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일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생각의 폭을 좀 넓혀 봅시다. 세상에는 옳은 일도 있고 그른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의 마음이 아플새라 일단 너그럽게 봐주는 것입니다. 옳은 것보다 더 높은 것, 더 큰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 잘못하면 때리기도 하고 책망도 합니다. 잘못한대로 다 잔소리하고 다 때리려면 하루종일 야단만 치다가 말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이들한테 관용을 베풉니다. 좀더 멀리, 좀더 넓게 이해해 주고 봐줍니다. 어려서 그러니까, 몰라서 그러니까, 내일은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하고 말입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너무 잔소리가 심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해서 못 견디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철들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더니 "지금 나이가 몇인데 철이 들어요?" 합니다. "그래도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래요. 더 들 때가 있겠지요." 제 이야기는 결국 넓게 이해하고 길게 알아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바라봅니다. 10년 후 20년 후에라도 좋습니다. 언젠가, 아니, 나 죽은 다음에라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또한 관용은 길고 차원 높게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른말은 바른말입니다. 그러나 바른말보다 더 높은 것이 있습니다. 참아 주는 것입니다. 안다고 다 말하고, 보았다고 다 비판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보다 더 큰 것, 이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관용과 기쁨은 병행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기쁨이 아닐 다른 사람한테까지 뻗어가는, 그런 의미의 기쁨입니다. 생산적인 기쁨입니다.

내가 기쁠 때에 관용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슬프고 짜증스러울 때에 무슨 말을 들으면 당장 화부터 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여유가 있고 기쁨이 충만할 때에는 어떤 말이라도 너그럽게 봐주고 웃음으로 넘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책방도 하고 때로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만 실은 그러는 부모한테도 회개할 것이 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기분 좋을 때에는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봐주었고, 기분 나쁠 때에는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따지고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아이들은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어떤 때에는 봐주고 어떤 때에는 야단을 치고 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눈치 빠른 아이들은 '이것은 내 잘못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저쪽 기분에 달린 것이구나. 엄마와 아빠가 다툰 후에는 꼭 나한테로 불똥이 튀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연쇄반응으로 되어진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쯤 되면 나중에는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저쪽 기분이 어떤가, 공기가 어떤가, 그렇게 눈치나 보게 됩니다.

관용과 기쁨은 병행하고, 그 기쁨은 다른 사람한테까지 미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결혼식 하는 분들한테 꼭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청소하는 분들에게 얼마간의 사례를 하라고 말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수고비가 나가지만, 결혼식 한 분들이 수고했다고 손수 사례를 하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좋을 때에 옆 사람도 함께 좋아야지 궂은 일만 시키고 말아서야 되겠습니까? 결혼식 때마다 그렇게 인정을 베풀게 하였더니 여기 청소하시는 분들은 결혼식이 많을수록 좋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이고, 웬 결혼식이 이리도 많담!" 할 것 아닙니까? 전날 깨끗이 청소해 놓고 주일을 맞으려 하는데 토요일 늦게까지 결혼식이 있다면 얼마나 짜증나는 일입니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어 밤늦게까지 치워야 합니다.

우리가 기쁜 날 다른 사람도 기쁘고, 나 즐거울 때 다른 사람도 기뻐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에 아주 덕 많은 분들은 환갑 잔치날이나 심지어 장례를 치르는 날에는 아예 '거지 잔치'라는 것을 했습니다. 옛날에 먹기 힘들 때라 그랬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세상 떠나시면서 일주일을 잔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동네 사람, 온 면 내의사람들을 다 불러다놓고 일주일 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옛 어른들은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좋은 음식이 있을 때에 나누어 먹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전부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남 생각은 하지 않고 나 좋으면 그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관용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관용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 만큼 관용하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것이 이유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얼마 안 있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을 떠날 터이니 살아 있는 동안에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또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사랑, 종말론적인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권면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얼마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보니까 근심은 하나의 버릇이라고 합니다. 걱정해 버릇하면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걱정을 일곱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지나간 일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지나간 것을 자주 후회하는 버릇은 빨리 끊어 버려야 합니다. 둘째,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을 두고 걱정합니다. 어떤 일이건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속편합니다.

그런데 생길 수도 있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맹랑한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뜻대로 안 된다고 걱정합니다. 언제는 내 뜻대로 되었습니까? 오만 불손한 걱정입니다. 넷째,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명예욕으로 인한 걱정입니다. 걱정을 하건 안 하건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이미 명예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남이 알아주면 어떻고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다섯째, 완전히 맡기지 못해서 걱정입니다. 남에게 맡긴 후 믿지 못하고 걱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맡긴 것까지 걱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누군가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고, 일단 맡겼으면 마음 푹 놓고 그를 믿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걱정한다고 무엇이 더 나아지겠습니까? 여섯째, 자연발생적인 것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를테면 비가 올까 안 올까 하는 날씨 걱정처럼 불가항력적인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죽음을 걱정합니다. 죽을 때면 죽을 것입니다. 일찍 죽든 늦게 죽든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걱정합니까?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끝없이 염려에 집착하는 동안 은혜도 잊어버리고, 하나님도 못 보고, 약속도 못 믿고,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염려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은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감사와 더불어 기도하고, 은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께로서 받은 바를 생각하면 절로 감사하게됩니다. 내 형편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과 이 궁핍한 사정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받은 은혜를 먼저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기도가 있겠으나 감사하면서 하는 기도가 가장 능력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예수님은 이제까지 당신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11:41)" 한 후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감사가 먼저였습니다.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실 대에도 덕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축사하시고(14:19)"라고 간단히 기록했으나 예수님은 우러러 하나님 앞에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감사의 기도에서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몸부림쳐 봐도 거기에는 응답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받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감사와 더불어 기도할 때, 거기에 응답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대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덮으면 내 근심 따위는 문제도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데 물질 문제, 경제 문제, 세상 문제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근심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으면 슬플 일밖에 없어도 기쁘고,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서 떠나면 만나는 일마다 모두 걱정입니다. 돈이 많으면 돈 지키느라 걱정, 돈 없으면 없어서 걱정 - 걱정이 팔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 마음을 덮어야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을 때에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고, 이것이 우리를 감사로 인도하고, 은혜로 인도하고, 약속으로 인도하고,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우리를 소망에 넘치게 하고, 감정적인 마음과 지적인 생각을 다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보면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과의 좋은 관계는 생각나지 않고 꼭 나빴던 일만 생각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에는 하루종일 좋은 일도 많았건만 전화한 통 받고 기분 나빴던 것, 싫은 소리 몇 마디 들은 것만 기억납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쁜 일만 기억되고 나쁜 소리만 생각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셔야 합니다 .마음도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고, 생각도 그 평강이 지켜 주실 때에야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기쁨과 관용과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일삼아 그려보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 다가옵니다. 그 결론이 가까워오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빌립보서의 주제가 요약,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세 가지 당부 겸 명령을 합니다. 기뻐하라, 관용하라, 기도하라--이 세 가지를 가르쳐 주고 또 명령합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테마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항상 기뻐해야 하고, 내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라' 함은 나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덕을 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의관계, 곧 윤리적인 문제에서는 '관용하라'고 말씀합니다. 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기도하라'는 것이 바울의 권면이자 명령입니다.

이제 이 세 가지를 잘 생각해 봅시다.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기뻐하는 마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관용하는 모습,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자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태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제 반대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항상 슬퍼하고, 항상 걱정하고, 항상 남을 원망하고, 항상 인색하며 자기만 알고 너그러움이 전혀 없는 비판적인 성격,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전혀 기도하는 마음이 없고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 - 이런 사람은 비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총괄해서설명할 때에는 흔히 기독교인의 3대 덕()을 운위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이것이 3대 덕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기뻐하느냐, 무엇을 감사하느냐, 무엇에 대해서 기도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물질로 인해서 기뻐하고, 세상적인 것을 통해서 기뻐하고,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기뻐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신비로운 관계에서 얻어지는 신령한 은혜의 기쁨이 없다면,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런 때에는 기뻐하고 저런 때에는 원망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둘째,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즉 그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 신앙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소원,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곧 그의 사람됨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 정도를 말해 줍니다. 셋째, 어떤 일에 감사하느냐? 얻으면 감사하고, 잃어버리면 원망하고, 또 세상적인 것에 감사하지만 신령한 것에 대해 감사가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이제 이 세 가지를 차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뻐하라'는 빌립보서의 주제입니다. 기뻐하라할 때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뻐할 일이 없는걸." "아이들이 울 일이 있어 우는데, 울지 말라 한다고 안 울어지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조금 의역하면 주님 때문에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세상 기쁨과 다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어떤 성취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라는 말의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까? 그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첫째, 죄사함받는 기쁨입니다. 그 은혜의 감격, 여기에 뿌리를 두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에게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죄사함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만일 오늘 저녁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죄사함의 문제 만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든 것이 시시해 보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문제는 죄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내가 감추려 한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맙니다. 심판을 받고야 맙니다. 그런데 죄사함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 합니다. 이 죄사함 받게 된 근본적인 기쁨, 이 기쁨은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죄사함 받은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만 있다면 어떠한 슬픔이나 어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죄사함 받은 다음에는 죽어도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죄사함 받은 후에는 고난을 당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고난은 나를 단련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요 결코 저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사함 받고 당하는 고통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더 큰 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감기에만 걸려도 걱정을 합니까? 꼭 벌받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업 망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죄 때문에 망한다고 믿어지기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완전히 받은 사람은 내 사업이 실패한다 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더 큰축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죄사함 받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특권을 누리게 된 기쁨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꾼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역에 내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그 거룩한 일에 내가 참여해서 일한다는 것은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그 귀한 일에 내가 한 몫 거든다는 것이 예사로운 기쁨입니까? 얼마 전에 한 교수가 제 사무실로 건축 헌금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배당 다 지었는데 웬 건축 헌금이냐고 물으니 그 분이 대답합니다. "남이 지어 놓은 예배당에 그냥 드나들기가 왠지 떳떳하질 못해서 늦었지만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이 예배당 지을 때 가담한 교인들에게는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좋은 일에 가담한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어떤 교인은 예배당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맡아 했습니다. 저 시계가 보기에는 작지만직경이 1m 50cm나 됩니다. 값이 생각보다 비싼 것이어서, 어째서 꼭 시계를 하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예배 마치고 나올 때마다 쳐다보려고 그래요." 정말이지 이 분은 매일 헌금을 하는 셈입니다. 여기 강대상도 그렇고, 오르간도 그렇습니다.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 거룩한 일에 가담된 것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오르간 소리가 날 때마다 거기 가담되는 것입니다. 이 부족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만민을 구원하는 그 거룩한 역사의 어느 한 모퉁이를 담당했다는 기쁨, 이것이 바로 원천적인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돌로 된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축축한 감옥입니다. 저는 바울이 감옥에서 자유롭게 지낸 줄로만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가 보니까 실제로 쇠사슬이 있었습니다. 땅에 박은 말뚝에 쇠사슬을 걸어 놓았던 자리가 있었습니다. 도망가지도 못할 텐데 쇠사슬에 묶을 것까지 있었겠습니까? 하기야 춘향이도 목에 칼을 쓰고 감옥에 있었다지만, 2천 년전에 이렇게 쇠사슬로 사람을 말뚝에 비끄러매 놓았었습니다. 그렇게 매인 상태에서 몇해를 지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당하는 영광스러운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항상''모든 환경에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기쁨이요,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상대성을 초월해서 절대로 향하는 것 만큼 기쁨을 얻게 마련입니다. 요사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위층이라는 사람들의 구속 사건들은 다 상대적인 것에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장춘몽(一場春夢)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기쁨은 절대적인 것이요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기쁨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래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까? 예쁘게 웃는 사람입니다. 웃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비웃는 웃음, 마지못해 웃는 웃음, 반가운 척 웃는 웃음 - 이런 웃음은 다 그 얼굴에 나타납니다.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웃는 밝은 웃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이어 사도 바울은 관용하라고 말씀합니다.

'에피에이케이아'는 번역상 난구절에 속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에 여러 가지로 고쳐서 생각합니다. 인내, 부드러운 마음, 또는 절제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것은 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원을 깊이 살펴보면 '관용''옳은 일보다 무엇인가 더 큰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는 일단 옳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옳은 일만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일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생각의 폭을 좀 넓혀 봅시다. 세상에는 옳은 일도 있고 그른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의 마음이 아플새라 일단 너그럽게 봐주는 것입니다. 옳은 것보다 더 높은 것, 더 큰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 잘못하면 때리기도 하고 책망도 합니다. 잘못한대로 다 잔소리하고 다 때리려면 하루종일 야단만 치다가 말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이들한테 관용을 베풉니다. 좀더 멀리, 좀더 넓게 이해해 주고 봐줍니다. 어려서 그러니까, 몰라서 그러니까, 내일은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하고 말입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너무 잔소리가 심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해서 못 견디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철들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더니 "지금 나이가 몇인데 철이 들어요?" 합니다. "그래도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래요. 더 들 때가 있겠지요." 제 이야기는 결국 넓게 이해하고 길게 알아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바라봅니다. 10년 후 20년 후에라도 좋습니다. 언젠가, 아니, 나 죽은 다음에라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관용입니다. 또한 관용은 길고 차원 높게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른말은 바른말입니다. 그러나 바른말보다 더 높은 것이 있습니다. 참아 주는 것입니다. 안다고 다 말하고, 보았다고 다 비판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보다 더 큰 것, 이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관용과 기쁨은 병행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기쁨이 아닐 다른 사람한테까지 뻗어가는, 그런 의미의 기쁨입니다. 생산적인 기쁨입니다.

내가 기쁠 때에 관용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슬프고 짜증스러울 때에 무슨 말을 들으면 당장 화부터 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여유가 있고 기쁨이 충만할 때에는 어떤 말이라도 너그럽게 봐주고 웃음으로 넘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책방도 하고 때로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만 실은 그러는 부모한테도 회개할 것이 좀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기분 좋을 때에는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봐주었고, 기분 나쁠 때에는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따지고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아이들은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어떤 때에는 봐주고 어떤 때에는 야단을 치고 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눈치 빠른 아이들은 '이것은 내 잘못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저쪽 기분에 달린 것이구나. 엄마와 아빠가 다툰 후에는 꼭 나한테로 불똥이 튀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연쇄반응으로 되어진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쯤 되면 나중에는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저쪽 기분이 어떤가, 공기가 어떤가, 그렇게 눈치나 보게 됩니다.

관용과 기쁨은 병행하고, 그 기쁨은 다른 사람한테까지 미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결혼식 하는 분들한테 꼭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청소하는 분들에게 얼마간의 사례를 하라고 말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수고비가 나가지만, 결혼식 한 분들이 수고했다고 손수 사례를 하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좋을 때에 옆 사람도 함께 좋아야지 궂은 일만 시키고 말아서야 되겠습니까? 결혼식 때마다 그렇게 인정을 베풀게 하였더니 여기 청소하시는 분들은 결혼식이 많을수록 좋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이고, 웬 결혼식이 이리도 많담!" 할 것 아닙니까? 전날 깨끗이 청소해 놓고 주일을 맞으려 하는데 토요일 늦게까지 결혼식이 있다면 얼마나 짜증나는 일입니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어 밤늦게까지 치워야 합니다.

우리가 기쁜 날 다른 사람도 기쁘고, 나 즐거울 때 다른 사람도 기뻐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에 아주 덕 많은 분들은 환갑 잔치날이나 심지어 장례를 치르는 날에는 아예 '거지 잔치'라는 것을 했습니다. 옛날에 먹기 힘들 때라 그랬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세상 떠나시면서 일주일을 잔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동네 사람, 온 면 내의사람들을 다 불러다놓고 일주일 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옛 어른들은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좋은 음식이 있을 때에 나누어 먹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전부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남 생각은 하지 않고 나 좋으면 그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관용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관용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 만큼 관용하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것이 이유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얼마 안 있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을 떠날 터이니 살아 있는 동안에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또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사랑, 종말론적인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권면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얼마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보니까 근심은 하나의 버릇이라고 합니다. 걱정해 버릇하면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 걱정을 일곱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지나간 일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지나간 것을 자주 후회하는 버릇은 빨리 끊어 버려야 합니다. 둘째,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을 두고 걱정합니다. 어떤 일이건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속편합니다.

그런데 생길 수도 있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맹랑한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뜻대로 안 된다고 걱정합니다. 언제는 내 뜻대로 되었습니까? 오만 불손한 걱정입니다. 넷째,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명예욕으로 인한 걱정입니다. 걱정을 하건 안 하건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이미 명예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남이 알아주면 어떻고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다섯째, 완전히 맡기지 못해서 걱정입니다. 남에게 맡긴 후 믿지 못하고 걱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맡긴 것까지 걱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누군가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고, 일단 맡겼으면 마음 푹 놓고 그를 믿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걱정한다고 무엇이 더 나아지겠습니까? 여섯째, 자연발생적인 것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를테면 비가 올까 안 올까 하는 날씨 걱정처럼 불가항력적인 일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죽음을 걱정합니다. 죽을 때면 죽을 것입니다. 일찍 죽든 늦게 죽든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걱정합니까?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끝없이 염려에 집착하는 동안 은혜도 잊어버리고, 하나님도 못 보고, 약속도 못 믿고,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염려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은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감사와 더불어 기도하고, 은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께로서 받은 바를 생각하면 절로 감사하게됩니다. 내 형편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과 이 궁핍한 사정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받은 은혜를 먼저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기도가 있겠으나 감사하면서 하는 기도가 가장 능력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예수님은 이제까지 당신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11:41)" 한 후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감사가 먼저였습니다.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실 대에도 덕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축사하시고(14:19)"라고 간단히 기록했으나 예수님은 우러러 하나님 앞에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감사의 기도에서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몸부림쳐 봐도 거기에는 응답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받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감사와 더불어 기도할 때, 거기에 응답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대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덮으면 내 근심 따위는 문제도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데 물질 문제, 경제 문제, 세상 문제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근심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으면 슬플 일밖에 없어도 기쁘고,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서 떠나면 만나는 일마다 모두 걱정입니다. 돈이 많으면 돈 지키느라 걱정, 돈 없으면 없어서 걱정 - 걱정이 팔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 마음을 덮어야만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을 때에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고, 이것이 우리를 감사로 인도하고, 은혜로 인도하고, 약속으로 인도하고,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우리를 소망에 넘치게 하고, 감정적인 마음과 지적인 생각을 다 지켜 주십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보면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과의 좋은 관계는 생각나지 않고 꼭 나빴던 일만 생각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에는 하루종일 좋은 일도 많았건만 전화한 통 받고 기분 나빴던 것, 싫은 소리 몇 마디 들은 것만 기억납니다.

이렇게 되면 은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쁜 일만 기억되고 나쁜 소리만 생각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셔야 합니다 .마음도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고, 생각도 그 평강이 지켜 주실 때에야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기쁨과 관용과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일삼아 그려보고 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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