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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17장 11~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의 본문에는 열 문둥병 환자를 일시에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병고치신 이적들을 보면 대체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만져주시고 기도하시고 해서 치유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열 명이나 되는 환자를 한꺼번에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열 명이 아니고 스무 명이었다면 스무 명 다, 백 명이었다면 백 명 전부를 이렇게 치유하셨을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장면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복수(複數)의 사람을 한꺼번에 고쳐주시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요, 교훈적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교리가 여기에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이적, 그 행하신 일들은 모두 그대로가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에는 사건만 보고 말할 것이 아니요, 사건 속에서 말씀을 들을 줄 알고 깨달을 줄 아는 지각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본문 말씀이 주는 첫번째 교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인의 관계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마리아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셨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유대사람들과 사마리아사람들의 관계가 전통적으로 좋지 않고, 유대사람들이 사마리아사람들을 멸시하고 더럽게 여기는 시절에 오늘의 사건이 이루어졌으므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마을로 들어가시려 하는데 사마리아인들이 못 들어오시게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순례를 할 때에도 사마리아 땅이 더럽다고, 사마리아사람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해서 일부러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건너 예루살렘으로 가는 우회(迂廻)의 길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길을 거리끼지 않고 지나다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느 유대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사람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셨다는 것을 의미함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사마리아사람들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유대사람과 사마리아사람을 동격시, 동일시했다는 것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그러한 시각을 단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사건으로 보든, 선한 행적으로 보든 유대사람들에 관한 말씀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건도 사건이려니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웃이 누구냐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사마리아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을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차별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만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이스라엘과 유대사람들을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하셨다는 진리를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거리낌없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다니신 뒤로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갈릴리사람들도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한동안 이렇게 그럭저럭 괜찮았던 모양인데, 여러 해가 지나자 사마리아 땅을 지나던 갈릴리사람들과 사마리아사람들 사이에 무슨 일로 시비가 벌어졌는지, 그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사람들이 많은 유대사람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는 숙명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에도 역시 사마리아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차별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치유 받은 자들이 다름 아닌 불치의 문둥병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둥병은 의학이 발달한 지금까지도 난치병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전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습니다. 문둥병이라 하면 사람들은 적어도 몇 가지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대로 살다가 살이 서서히 썩어 그대로 죽어갈 사람, 그야말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저주받은 병, 하늘이 내린 병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에 대해서는 동정을 하지 않습니다.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저 모양이 되었을까, 천벌을 받은 것이야, 부모가 죄를 지었건 본인이 죄를 지었건 어쨌건 큰 죄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점입니다. 다른 병에 대해서는 동정이 있지만 이 문둥병에 대해서만은 어떠한 동정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한번 걸리면 영원히 격리되어야 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내 사랑하는 가족일지라도 일단 문둥병이 발하기만 했다하면 예외 없이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철저히 격리시킴으로써 가족과의 관계마저 끊어버렸습니다. 동네 밖으로 쫓겨나 대체로 동굴 같은 곳에서 기거하면서 어쩌다 음식이라도 갖다주면 그것을 먹고삽니다. 안 가져다주면 그대로 굶어죽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인정에서 끊어졌다는 것보다 더욱 비참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도 들어올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 회중에 참여할 수 있는 그 고귀한 예배자의 특권마저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역한 냄새가 나고 더러운 모습을 한데다가 전염될 위험까지 있어 사람들은 문둥병자들을 멀리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코가 떨어져 나갔다거나 할 정도로 심한 경우에는 환자를 알아본 쪽에서 먼저 피한다거나 돌을 던지거나 해서 떨어져 가게 했습니다. 혹 그 증세가 덜해서 아직 겉으로는 잘 식별되지 않는 경우에는 병자가 스스로 손을 흔들면서 '부정하니 가까이 오지 마시오'라고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저들의 규례입니다. 누가 사랑해줄 마음이 있고 없고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보통사람들이 다가와 손을 만지려 해도 오히려 병자 쪽에서 거부해야 합니다. 이렇게 버려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이어가다가 언젠가 어디선가 그대로 쓰러져 죽어갈 사람들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멀리 서서"라고 합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12절)" 그리고 소리 높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절)" 합니다. 가까이 오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 열 문둥이 중에서 한 사람은 사마리아사람이고 아홉은 유대사람이라는 것이요, 그 유대인 문둥이들과 사마리아인 문둥이는 여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와는 달리 서로 친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 거지조차 사마리아인이 주는 동냥은 받지 않았을 정도로 극과 극을 이루는 처지인데 문둥병 환자들끼리는 친했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일체감을 형성해준 것입니다. 고난이 서로를 교제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옥 동창생과 병원 동창생은 유달리 가깝다지 않습니까? 고난 당할 때, 어려울 때, 그런 처지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는 가까워지게 마련입니다. 군대생활을 같이한 동료를 전우(戰友)라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고난과 역경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여 친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건강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이였지만 병자들끼리는 친했습니다. 살만큼 사는 평안한 사람들은 교만해서 서로 싸우는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고 돕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부자냐 가난하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겸손이 중요하고 이해가 중요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복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가난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건강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병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고난에 대해서, 고난 자체를 놓고 집착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겨냥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요,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마리아인 문둥이와 유대인 문둥이가 문둥병이라는 조건 때문에 하나가 되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이적에는 몇 가지의 색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멀리서 이루어진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열 문둥이가 나음을 입은 이적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거리가 있었습니다. 여느 이적의 경우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 당장에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라고 말씀하시고 맙니다. 예수님과 문둥병 자들이 만난 장소는 사마리아땅입니다. 문둥이들이 제사장들을 만나러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가까운 길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따라 고분고분 길을 떠났고, 얼마쯤 가서였을까, 가는 길에 그들은 저들의 몸이 깨끗해진 이적을 봅니다. '가거라. 보여라'-조건부 이적이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가다가 이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는 곳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적은 주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는 순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이라 하셨을 때, 그 문둥병 자들이 "선생님이시여, 우리의 손에 손을 얹고 기도하시든지, 우리의 몸을 만져주시든지 해서 이 자리에서 고쳐주신 다음에 제사장에게 가도록 해주십시오. 병 고침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우기면서 제사장들에게 가지 않고 어물쩡거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못 고쳤을 것입니다. 열 명중의 하나라도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하나는 아마도 이적을 볼 수 없었지 않을까요? 이처럼 본문의 기적은 순종을 첫째 조건으로 전제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고분고분 순종을 했고, 마침내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것은 조건 없이 그냥 베풀어주셨던 그런 이적들과는 확실히 다른 중요한 이적입니다. 학자들은 오늘의 이 이적을 신학적인 이적이라고들 말합니다.
이에 버금가는 중요한 이적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라고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얻은 아들입니까? 소망 끝에 백 세에 얻은 외아들입니다. 그런데 바치라고 하시다니요. 아브라함으로서는 따지려고 들면 얼마든지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직 장가도 안 보내 손자도 못 봤는데 바치라고 하시다니, 어떻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틀립니다."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할 말은 있습니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십중팔구 따지고 덤볐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바치라 하시니 말씀대로 아들을 데리고 사흘길을 갑니다. 이 사흘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 바치라시면 얼결에 바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마는 사람이라 사흘길을 가다보면 마음에 갈등이 오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흔들림 없이 갑니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지요. 더구나 이삭이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재물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에는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모리아 산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칼을 들어서 이삭을 막 찌르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그만하면 됐다. 그만하고 물러서라. 저 뒤에 양 한 마리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서 이삭 대신으로 바칩니다. 그리고 다시 이삭을 데리고 내려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이적을 굉장한 이적으로 칩니다. 이삭은 죽었다. 다시 데리고 내려온 이삭은 부활한 이삭이다-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그렇게 풀이합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엄청난 이적이었습니다. 모리아 산 거기에 양이 있었고, 그 양이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이 되었다는 것-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인 이 사건도 아브라함이 말씀대로 순종해서 모리아 산까지 갔기에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 하라 하시기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무엄하지만 내용을 한번 바꾸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열 처녀의 비유처럼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섯 사람은 갔고 다섯 사람은 안 갔다, 다섯 사람은 고치고 다섯 사람은 못 고쳤다-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다같이 갔습니다. 개중에는 물론 믿음이 있어서 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생각 없이 따라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열 사람이 똑같은 마음으로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순종했다는 그 사실입니다. 레위기 13장-14장에 보면 제사장은 환자를 점검하고 진단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문둥병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진단하여 "이 사람은 문둥병 환자다. 그런고로 내쫓아라"라고 명령하는 자도 바로 제사장입니다. 그런가하면 문둥병이 자연스럽게 나을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 정말로 나았는지 검사하는 것도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규정에 의해 분명히 검사를 하고 확실히 나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하나님 앞에 결례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이 축복을 하면 그때부터는 자유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특별한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는 것은 병이 나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행사입니다.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이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낫지도 않은 상태로 제사장에게 보이라 했는데도 그들은 '예'하고 갑니다. 쉽지 않은 믿음입니다. 말씀으로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는 치유 신앙을 가지고야 따를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순종의 행위입니다. 이상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먼저 순종, 먼저 믿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이적은 소원에 응답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 환자들을 보고 긍휼이 여기셔서 고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다음 번에 이야기할 것입니다 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고치실 때는 본인이 요구해서가 아닙니다. 주변에서 '누구 죄 때문입니까' 물었을 때에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던 것이지 본인이 '예수여, 내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하고 부탁한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즉 기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열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를 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거든요. 그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문둥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은 이스라엘사람들의 개념에서 보면 메시야관입니다. 메시야가 아니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열 문둥이는 그만큼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하고, 그리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 순간의 반응은 둘로 나타납니다. 열 사람 중의 한 사람, 그 사마리아사람은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섭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지 않고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 옵니다. 와서 엎드려 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머지 아홉, 유대인들은 제각기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똑같은 경험에 대한 반응이 이처럼 다릅니다. 은혜는 똑같이 받습니다. 말씀의 은혜든, 기적을 체험하는 은혜든, 중생의 은혜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는 순간이든, 은혜를 똑같이 받고도 응답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나을 때가 되니까 나았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주님을 찾아와 큰 소리로 영광을 돌렸지만, 문제는 나머지 아홉 사람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시는 한편으로 은연중 아홉 사람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내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제사장들에게 가라 하셨고 반드시 오라고 하셨던 것도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돌아오기를 은근히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홉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리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다. 첫째로, 제사장에게 갔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고 완전히 고쳐졌다는 확인을 받아야 누구를 만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 라고 가정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 가능성이 없는 추측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지이니 더러운 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연후에나 제사장을 찾아보려 했을 것이라는 추리입니다. 아니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 좀 격식을 갖추어서 예수님께 경배를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그 아홉 사람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래서 멀리 떠나버렸다'라고 해석합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옷을 갈아입고 제사장에게 보이고 허가장을 얻고…… 그러나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자신들이 문둥이였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래서 모두가 여느 사람 대하듯 대해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 지방에서 살아나가는 것보다는 딴 데로 가서 살아야 사람 구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아예 멀리멀리 떠나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돌아와 달라는 전제 조건도 아니고 강한 의무도 아닙니다. 그러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은혜에 대응하는 당연한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옷이 더러워도 괜찮습니다. 몸에서 냄새가 나도 괜찮습니다. 뭐라고 손가락질 받을만한 추한 모습을 가졌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예물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는 그 순간에 그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빈손이라도 좋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서 엎드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셨습니다. 그런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격식을 갖추지 맙시다. 너무 생각이 복잡하면 안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볼 때도 정말로 고마움을 느낀다면 그렇게 많은 격식을 갖추지 않습니다. 그대로, 그 마음에 있는 대로 표현하십시오. 감사라는 것은 즉각적으로 우러나는 것이지 미루어 감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루만 미루어도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몇 시간만 미루어도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저 바로, 그 즉시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체험 가지신 분들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 이를테면 병원에서 수술하고 입원해 고생하고 있을 때에는 '병원에서 나가게 되면 바로 하나님께 가서 기도 드리고 영광을 돌려야지'하고 마음먹습니다. '이번 일로 병원비가 많이 들긴 했지만 감사헌금도 해야 되겠다'라는 다짐도 합니다. 그리고 퇴원하면 집으로 가지 않고 교회로 바로 가서 기도하고 영광 돌린 다음에 집에 가리라고 결심합니다. 가끔 보면,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에 바로 여기에 와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먼저 오려고 했는데 가족들 성화에 못 이겨 집으로 갔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열흘이고 한 달이고 그냥 그대로 지나갑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려고 했는데 때가 지나서 못합니다. 감사헌금도 바로 그 시간에 하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미루다보면 돈이 안 생겨서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마음먹는 순간에 바로 해야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지, 내 할 일 다하고 맨 마지막에 인사 차려서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말까지 합니다. '감사는 모든 덕의 으뜸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덕의 아버지다'-우리는 많은 덕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덕 중에서 가장 높은 덕은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에 말합니다.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누가 비방하리요.' 감사하는 사람 비방하는 법 없습니다. 비방 받는 법 없습니다. 내가 짜증내니까 상대쪽에서도 반사적으로 짜증을 내는 것이지, 내가 감사하는데 짜증내는 사람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덕의 아버지가 되는 감사-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듭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은 몸만 치유 받고 말았지만 이 사마리아사람은 몸과 영을 함께 치유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몸은 나았지만 마음은 무거운 빚을 진 반면, 이 사마리아사람은 몸도 영도 아울러 구원받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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