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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 : 1~1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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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 : 110)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범죄하고 난 후 두려움으로 인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범죄자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최초의 질문은 바로 아담 자신의 문제로서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를 묻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 하신 두 번째 질문은 성격이 다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네 아우 즉 이웃과의 관계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가인의 범죄는 처음부터 이웃 관계에 있었습니다.

현대인의 습관 중에 아주 고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항상 그 관심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하는 것에 있으며,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남의 눈치 살피기에 바쁘며 다른 사람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일리가 있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를 미워함으로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누구의 생을 대신 살아준 것이냐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생각하면 미운 사람을 위한 생을 살아 준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마음을 바치기도 어려운데 미운 사람을 위하여 신경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큰 병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기를 상실하면서까지 남에게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동생에게 너무 신경을 쓰면서 거기서부터 죄악이 싹튼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이웃 관계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먼저 충실하고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사랑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알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먼저 확립되어야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으므로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사는 받으시고 한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받으시고 받지 않으시는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으며 우리는 그 판단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판단입니다.

히브리서 11:4에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진실이며 충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중심을 바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이 중심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모름지기 처음부터 제사드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동생 아벨이 제사를 드리니까 자기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형식만을 갖추어서 정성 없이 드리지 않았나 생각되어 집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생각하여 믿음으로 드린 예배가 아니라 동생이 드리니까 따라서 드리다 보니 마음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형식만 갖춘 예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의식은 있었지만 하나님께 바쳐지는 중심의 예배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면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어서 상달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 없는 제사, 진실 없는 행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몹시 분해하였고 그뿐 아니라 안색까지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분해하며 안색이 변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굉장히 뼈가 있는 질문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네 자신이 더 잘 알텐데 왜 안색이 변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문제이지 아벨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직선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자신이 그 관계가 잘못 되었으면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끓어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거나 누구를 원망하여 분을 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을 원망하게 되면 여기서부터 자기를 상실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불 신앙과 정성이 없었던 것이지 아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책임을 아벨에게 돌리며 분을 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잘된 일은 언제나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며, 잘못된 일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며 혹은 환경을 탓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든 잘못하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지 이웃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약하여지거나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신의 정욕 때문이지 그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불성실과 나의 거짓된 인간성에 대하여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밀턴의 <실락원>에 보면 사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늘나라로부터 쫓겨나서 돌아다니다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듣고 인간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인간들을 범죄케 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하늘 나라로 인도해 주시리라는 속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들을 모두 범죄케 하려고 애 쓰고 있다는 것이 밀턴의 상상입니다.

이 사탄의 마음이 바로 가인의 마음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순간 그 죄를 하와에게 전가시켰습니다. 이 버릇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유전죄입니다. 사람은 먼저 죄 짓는 죄가 있고 그 다음에는 죄를 계속하는 죄가 있습니다. 계속해서는 안될 것을 알면서도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죄를 정당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죄를 의인화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자기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죄가 있습니다. 나의 불의가 죄가 되는 것은 저기에 의가 있기 때문이며 내가 거짓된 사람이 된 것은 여기에 진실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제사가 정죄 당한 것은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인의 마음이었습니다. 같은 죄이지만 제일 치사한 죄가 질투의 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계속 말씀하시기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바라보며 질투하다가 자신이 범죄하지 않도록 먼저 자기의 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아벨을 죽여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또 자기의 불의를 정당화해 보려고 하는 이 가인의 마음이 바로 질투하는 마음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가인에게 큰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를 다스리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이제 하나의 죄를 짓고 그 죄가 또 하나의 죄를 생산하려고 하는 무서운 단계에 이르러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믿음의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불신은 또한 불신의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심령이 이웃 관계를 맺는 순간 비인간화의 문제가 생기고 인간을 수단화하게 되고 그리고 생명까지 빼앗는 잘못된 인간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아벨과 지금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는 질문입니다.

가인은 매우 유감스러운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는 무책임한 대답을 했습니다.

편리한 대답인 것 같으나 이 순간이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지 모릅니다. 이 책임 회피의 대답으로 인하여서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서도 많은 살인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된 자로서 자녀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여 줌으로써 자녀의 평생에 씻지 못할 상처를 입히기도 하며, 때로는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진실하게 살지 못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시키며, 또 앞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할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길마저 막아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다고 하며 또한 교회에 대하여 실망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죽어 갔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되겠으며, 또한 그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하여 책임 없는 대답을 할 때 하나님은 무섭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죄가 폭로되어 피할 수 없는 정죄를 당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먼저 죄를 고백했어야 옳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책임한 혹은 무책임했던 과거에 대하여 관심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며 이웃을 잃어버리며 때로는 살인을 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에게 관심을 돌려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살인하며 붓으로 살인하며 행위로 살인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추궁하실 때 우리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처럼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 당해야 할 그 아픔을 내가 대신 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므로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열납되는 그 날 나를 찾게 되고 이웃 관계를 재수립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로 그리고 화목의 열매를 맺는 형제의 관계로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그 믿음으로 말한다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혹은 사상 속에 숨겨져 있는 아벨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추궁을 당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가인과 같은 이웃 관계를 맺고도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나의 불성실의 책임을 그 누구에게 돌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먼저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함으로 하나님과 또한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여 주셔서 아벨과 같은 믿음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열납되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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