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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담력(빌립보서 1 : 12-21)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알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래로부터 동양 사람들은 세 가지의 덕을 가르쳐 왔고 그렇게 배우며, 그렇게 힘써오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덕이란 지(智), 인(仁), 용(勇)을 두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배우는 바이요, 또한 그러한 인격의 사람이 되고자 힘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 인자한 사람, 그리고 용기가 있는 사람,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덕이요, 군자형의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대에 와서는 이 세 가지의 덕이 다 무너져 가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식은 높아졌는데 지혜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말하자면 상당한 수준에 왔습니다만 그러나 지혜가 부족하기에 시행착오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옅은 지식은 많이 있으나 당장 당하는 자기 문제 하나를 바로 볼 줄 아는 지혜는 없는 탓으로 엄청난 시행착오가 개인에게도 있고, 사회와 국가에게도 거듭거듭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지혜의 사람이 나타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능력은 있는데 인자가 없습니다. 판단력도 있고 비판력도 있으며 요즈음에 와서는 고발하는 힘도 있습니다.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에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습니다. 덕이 없고, 인자함이 결여되어 갑니다. 요즈음 보면 국민학교 다니는 아이들까지도 비판의 눈은 어찌 그리도 밝은지 말로 표현을 하라면 살벌할 정도로 잘합니다. 그런데 순하고 어진 맛이 없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자함을 배우지 못하는 데에 큰 결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상당한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습니다. 그 가진 것을 보아서나, 그 능력과 기술로 보아서는 참으로 상당합니다.
따라서 그만하면 용기가 있을 만도 한데 오히려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용기가 없어요, 비굴할 정도로 용기가 없으니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용기는 어떤 여건의 결과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이러 이러한 여건이 갖추어지면 용기가 있어지는 것이라 하여 용기를 환경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만 그렇지를 않습니다. 용기는 환경의 동기입니다. 모든 여건보다 먼저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이라기 보다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되어 용기가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돈이 있으면 용기가 있어지고 돈이 없으면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장사도 무일푼이면 무안색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아무리 장사라도 돈 한푼 가진 것이 없으면 용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얼굴에 기색이 없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친구를 만났을 경우도 주머니 속에 함께 점심이라도 같이 할 돈이 들어 있으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지만"반갑네" 해 놓고는 점심 한끼도 나눌 수 없는 형편일 때에는 용기가 없단 말입니다. 그 때문에 돈이 용기를 주는 듯하게 보입니다만 그럼, 돈이 있다고 용기가 있더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코 돈이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주는 용기란 돈이 있기에 그저 친구 만나서 점심 한끼 나누는 정도의 것, 아니면 약간의 어떤 도움을 주는 정도이지 그 이상의 근본적인 용기를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또 하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지식이 많으면 용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사람이란 알면 알 수록 더 비겁해집니다. 이제는 점점 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식이 많을수록 근심을 더 많아지고 용기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때로는 사회적인 여건을 생각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면 용기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요건, 사람들의 성원과 여론의 지지, 칭찬, 존경 등 이런 것들을 받으면 용기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잠깐 지나갈 뿐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진정한 용기를 얻지는 못합니다.
이제 나머지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도덕적 용기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이요 양심으로부터 성원을 받으며, 의와 선과 진리 편에 설 때에 가질 수 있는 용기입니다. 사람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갖게 되는 용기입니다.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선하게 사는 자는 용기 있는 자요, 부자라고는 하지만 못할 짓 해서 모은 재산이라면 이 사람은 끝까지 비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도덕적 용기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에서의 용기는 종교적인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에 근거한 신앙의 용기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참된 용기를 의미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종교 개혁을 할 때에 많은 적수가 있었습니다. 교황청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원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외롭게 외롭게 종교 개혁을 이루어 나가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외적인 것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내적인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무척 괴롭혔습니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마틴 루터는 유달리 마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는 마귀를 표현할 때 까만 마귀, 흰 마귀로 말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마귀 이야기와 마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것이 그의 기록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의 마음속에서 이 마귀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종교 개혁을 하겠다고 계속 나서면 나는 너의 과거, 너의 허물, 너의 죄를 만방에 폭로하겠다"며 협박을 합니다. 그럴 때면 마틴 루터는 요한 1서 1장 7절에 근거하여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나는 마귀 네가 말했듯이 죄인이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의롭다 하셨느니라고 대답함으로 그는 마귀를 이기며 종교 개혁을 이룰 수 있는 대담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이 용기는 자기 의의 용기도 아니요, 도덕적 용기도 아니며, 물론 경제나, 지식, 사회적인 용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용기이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구속에서 얻어지는 절대적, 절대 은총적 용기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용기! 그러기에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면서 두려움 없는 확신 속에 종교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참된 용기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진정한 용기를 보게 됩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 "담대하다"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는 '팔레시아' 라고 하는데 이는 담력이라고도 할 수 있고 용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담대함과 용기를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용기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영어 번역에는 이것을 풀 커리지(full courage)라고 합니다. 대단히 충만한 용기, 아주 꽉찬 튼튼한 용기를 가르치는 것으로 그렇게들 번역을 합니다.
참된 용기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용기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용기가 없습니다. 사랑 받을 때에 용기가 있고 사랑할 때에 담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담력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죽음과 죄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죽음을 이기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의 뚜렷한 목적 의식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의 목적! 생사가 문제되지 않는, 그런 확실한 목적이 있었기에 그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려 하였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생사를 문제시하지 않는 그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좌우간에 죽을까봐 벌벌 떠는 사람처럼 볼품없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살아도 죽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그 가운데에 진정한 용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사람이 비겁한 사람인가를 두고 말입니다. 그것은 죽으면 안 된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란 것이 언제 있을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저녁에 죽을 것인지 아니면 내일 죽을 것인지? 시간 시간 우리는 죽음을 현재적인 것으로 가까이 두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죽어서는 안 된다니 답답한 사람이요, 또한 죽으면 끝난다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죽으면 지금까지의 내 모든 노력이 다 헛되이 돌아간다는 사람은 정말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람이 진정 용기의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이것을 위해서라면 이제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생의 뚜렷한 목적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이 너무 소중해서, 이 일을 위해서라면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 아무 상관이 없더란 말입니다. 오직 이 일만 이루면 됩니다. 그러한 사랑, 그러한 믿음, 그러한 목적,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담력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손해를 보아도 그만, 병들어도 그만,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누가 뭐래도 상관없는 이것이 사도 바울의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용기 있는 사람은 현실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를 볼 줄 아는 그러한 영적 안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효과 측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가령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할 때에 이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일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없는 것입니까? 하는 물음 앞에 만약 이 일이 무상으로 돌아가고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 수고 하나 하나가 모두 뜻이 있고, 특별히 하나님의 크신 사역에 있어서 의미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의 수고, 나의 고난, 그 모두가 참으로 의미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사람을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제일 비겁하게 만드는 것은 허무주의입니다. 매사가 헛되고 결과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잉태한 여인들이 해산이 가까워 오면 걱정을 하게 되고 그리고 해산의 순간은 생명을 포기하고픈 고통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면 그 엄청났던 고통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 고통보다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요 16 : 21) 그만하면 수고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그렇지가 못하다고 하면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하고 있는 일, 지금의 이 현실, 그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있었기에 담대했습니다. 우리는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너무도 민감합니다.
그래서는 내게 당장 손해인가 아닌가? 내가 당장에 칭찬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비난을 받는 것인가? 하여 이 사건 하나 하나의 현상적인 반응에 민감한 나머지 한 번은 감사했다가 또 한 번은 원망하고, 한 번 웃었다가 한 번 울었다가 하는 변덕이 심합니다.
이 모든 현상, 나타난 사건의 그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큰 사역을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이 신비로운 뜻을 아는 사람은 항상 담대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의 당한 일", "나의 매임"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주 억울하게 붙들려,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해를 거듭하며 처박혀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몸으로 마음껏 전도하고 싶으나 길은 막혔습니다. 앞날의 운명을 예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답답하고 육체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깊이 생각합니다. 지금의 이 모두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놀라운 일들이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첫째가 시위대 안에 있는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즈음 말로 브이 아이피(VIP)입니다. 바울이 갇힌 곳이 로마 황실에 속한 감옥이었기 때문에 생각이 깊은 저들 고관들이 밤에나 조용한 시간에 찾아와서는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을 기회로 바울은 전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것이 씨가 되고 뿌리가 되어 마침내 3백여년 후에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아마 바울이 이것까지 알았더라면 춤을 추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되어질 무렵 숫자적으로 보아서는 기독교인이 9%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관들이 먼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기독교 국구로 선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결과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시위대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나 복음을 전한 데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를 보며 그는 감사했고,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지금을 보며 저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바울 선생님이 지금 저렇게 감옥에 갇혀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게을러서야 되겠는가? 어찌 두려워 떨고만 있겠는가? 라며 일심을 내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하나 갇힘으로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 때에 사도 바울은 감사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제 전도하는 일을 중심으로 바울과 경쟁하던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전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알고는 바울이 감옥에서 얼마나 억울하고 마음이 아파하겠는가! 그러니 바울을 괴롭히기 위하여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천만에요"라며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복음만 전파되면 그뿐이니 그런고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들의 평판을 초월한 바울의 충만한 기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용기는 기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니요, 충만한 기쁨에 있습니다. 그 기쁨은 어떤 기쁨이냐 하면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렇게 감옥에 들어와 있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복음의 역사가 더 크게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깨달으며 그리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거듭 거듭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인간들의 평판이나 인기, 칭찬과 존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것에 근거를 두고 사는 것처럼, 피곤한 것이 없습니다. 그 변덕스러운 평판, 물거품 같은 인기, 모두가 더 소용없고 부질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신경을 쓰다 보면 마지막엔 낙심하게 되고 그리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감상적인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인기 관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명예에 대해서는 아랑곳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그만이요,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여지면 만족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사랑과 충성이 그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고 그 기쁨에 근거하여 용기의 사람이 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저 유명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 : 30)는 말을 기억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그 마음이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어떠한 희생, 어떠한 불명예가 온다손 치더라도 그리스도만 영화롭게 되면 그만이기에 그는 기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감상적인 판단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감상에 치우쳐서 사실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무슨 말인가 하면 기분 나빠서 초가 삼간 불지른다는 격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래서는 어떤 때 보면 기분 때문에 엄청난 실수를 하며 다 때려 부수고 마는 한심한 짓을 합니다. 사건이 중요하고,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기분이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어느 누구의 기분 하나가 문제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기분으로서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는 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대고 있고 소망도 있는데 부끄러워져서는 안 됩니다. 지난 이야기들입니다만 신문에서도 보았고 더러는 들어서도 아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사우디간 남편이 2년 동안 땀흘려 벌은 돈을 부칠 때마다 자기 아내에게 부탁하기를 이 돈을 생활하고 저금하는 것 외에 제발 다르게는 쓰지 말아 달라고 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내는 그 돈으로 이자 놀이하다 떼이고 계다 뭐다 해서 어울려 다니며 방탕해 버렸습니다. 물론 돈은 다 없애 버렸고 몸도 버렸습니다. 이제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일구월심 기다리다 반갑게 맞이해야 할 남편이건만 그러나 그는 남편이 돌아오는 날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소망도 있고 기대도 있는데 거기에 합당한 현실이 없어요. 부끄럽고 창피해요.
그러자니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실이 있어야지요. 무슨 기대가 있습니까?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지요. 사도 바울은 과거로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앞에 있는 소망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어요. 오늘 이 시간 당장에 주님 앞에 선다고 하여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더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했습니다. 소망에 합당한 내 현실과 그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했습니다. 나의 담력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돈 몇푼에 있는 것입니까? 그 잘난 명예나 배경에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건강, 나의 젊음에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근거로 용기를 내고 있으니까? 어쩌다 무엇이 좀 잘 되면 용기가 있고 그렇지를 못하면 부끄러워 할 것이겠습니까? 진정 그럴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 비록 큰 일은 못하더라도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십시다. 능력은 없어도 신앙의 바탕에서 나오는 담대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다 할 사람들로부터의 칭찬이나 지지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진실한 용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뚜렷한 목적이 있고, 확실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보며, 최종 승리, 최종 영광의 그 마지막에 있을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과 영광을 바라보면서 오직 믿음 안에서의 절대적 용기와 절대적 담력으로 살아가는 복된 나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저희들은 이렇다할 큰 일은 못합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하시며, 아무 것도 가진바 없으나 믿음 안에서 용기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무섭게 급변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우리의 충성, 그리고 우리의 담력에는 변함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소망과 기대에 따르는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살게 하여 주시고 주께서 주시는 용기와 그 영광된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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