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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장 1절~12절)

by 【고동엽】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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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장 1절~12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어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서 병색이 도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가보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도리질을 합니다. 여러 사람한테서 그런 권유를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지 않는 까닭을 몇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이는 병원을 기피하는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변명이기도 합니다.

첫째, 내 병을 내가 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스스로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나마나 진찰받아서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들어야지.

사실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하고 나무라면, 내가 나를 병자라 생각하는 것은 견딜만하지만 의사한테서 '당신 틀렸소'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 병원(病原)이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잘못으로 내가 내 몸을 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다른 사람한테 있다면 그런대로 부끄러움을 면하겠는데, 하필 그 원인이 내게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잘못된 원인이 다른 사람한테 있다고 생각하면 변명할 여지라도 있고 원망이라도 해보겠는데, 내가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내게 원인이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의사 앞에서 그것이 또다시 드러나는 것을 윈치 않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병에는 대책이 없다고 합니다. "가보나 마다 죽을병일 텐데, 못 고칠 텐데……" 그래서 병원에 가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시인하기 싫어하고, 나는 시인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심리학적으로 현대인이 가장 듣기 싫어하고, 생각하기도 싫어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은 채로 살고 싶어하는 두 가지 테마가 있다고 합니다. 죽음과 죄가 그것입니다. 세상에 죽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병원에서 "당신 얼마 못 삽니다"하면 대부분 굉장히 싫어합니다. 내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죽는다는 그 소리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책망을 싫어합니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을 압니다. 뉘우치기도 하고 회개도 합니다. '내가 왜 그런 죄를 지었던고……'하고 마음아파합니다. 그러나 남의 입을 통해서 "당신 탓이요, 원인이 당신한테 있소"라는 말을 듣는 것은 아주 싫어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 테마가 현대인이 싫어하는 생각이요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가장 싫어하는 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가장 싫어하는 생각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바로 거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계시적으로 볼 때 가장 원천적이고 본래적인 사건은 역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에덴동산 사건은 도대체 어떠한 메시지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까? 그 사건의 초점은 아름다운 에덴동산, 낙원, 파라다이스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타락, 죄, 그 불행의 원인을 증가하고자 하는 것이 에덴동산 사건의 주제요 초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첫장부터 아담과 하와의 죄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 장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을 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일어나는 첫 사건-에덴 동편에서 맨 처음 벌어진 사건이 형이 친동생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인간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것도 형이 아우를 죽이는 사건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의 결과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을 자세히 보면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종교 의식을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회 문제, 도덕 문제, 정치․경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문제입니다. 경건의 문제입니다. 경건의 수단화-경건을 사리사욕(私利私慾)의 재료로 생각하면서 이 사건이 터집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행위가 이지러지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살인 사건이 터집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칼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경제에 있으며 해결도 경제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제가 거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그 경건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해결도 거기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적인 태도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질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뱀 때문입니까, 선악과 때문입니까? 문제의 원인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앙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거역하고, 믿지 아니한 나머지 일어난 결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문제는 살인 사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살인 이전의 하나님 앞에 드린 예배가 문제입니다. 그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그에게 고통과 갈등과 불안, 번민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괴로움의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어긋난 관계를 바로잡을 생각은 않고, 다시 하나님께 바른 자세로 예배드릴 생각은 않고, 애꿎은 동생한테 분풀이를 합니다. 종교 문제를 사회문제로 돌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 친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맙니다.

가만히 봅시다. 원한, 분풀이, 서로 화해하지 못함……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부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먼저 여기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다음에 그 부작용으로 사람이 사람한테 분풀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흔히 '가인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가인의 마음보를 봅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제가 잘못한 것을 가지고 사람한테 분풀이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탓으로 돌리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제사를 왜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못사는 것이 남 잘살기 때문입니까? 나의 실패가 남의 성공 때문입니까? 왜 남의 행복에서 내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까? 내가 잘 안 되는 것이 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남 잘되는 것이 배가 아파 못 견디는 것-이것이 가인 콤플렉스입니다. 내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불평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도가 응답되기 때문에 내 마음이 뒤틀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죄의 성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해줍니다. 생각해봅시다. 단둘뿐인 형제 사이에서 형이 동생을 죽여야 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가진 것을 빼앗자는 강도질도 아니요 아벨이 형한테 원한을 살만한 죄를 저지른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죽였습니까? 왜 아우가 형의 손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까? 현대에는 이러한 사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 소득 없는 범죄, 다만 분풀이나 하고 보자는 식의 범죄가 난무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해서 내게 무슨 소득이 있겠습니까? 그저 내가 내 속을 못 이겨서 엉뚱한 사람을 괴롭힙니다. 병든 심령이 발악하는 것입니다. 죄란 우리의 마음에서 평화를 빼앗아갑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질투로 발전합니다. 분노하고 폭발합니다. 그 마음 그대로만 있어도 좋으련만 꼭 사건을 일으킵니다. 일을 터뜨리고야 맙니다. 말로, 행동으로, 반드시 후회할 일을 저지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절대로 고요함이 없습니다. 생각에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꼭 괴상한 행동으로 폭발합니다. 비이성적 인간이 됩니다. 이성의 판단이 흐려지고 총기가 사라집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적인 인간이 됩니다. 살인이라는 것이 반드시 육체를 죽이는 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면 그 또한 살인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를 죽이는 것은 곧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고요. 핀잔과 못된 말로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려서 기를 죽여버리는데, 결국은 그것으로 그를 죽이는 셈이 됩니다. 살인이 따로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인한 일이 없다고 하겠지만 실은 아는 중에 모르는 중에 우리가 무척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삽니다. 나 때문에 우는 사람-내가 찔러서 그 사람 마음이 병들고, 끝내는 몸까지 병들어 죽어갑니다. 살인적인 행위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습니다. 자기 상실에 빠지고 맙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죄는 자랍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자랍니다. 만약 죄가 성장한다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회개했더라도 아직 부족한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마침내 전쟁과 말썽을 일으키고야 맙니다. 요즘 무서운 병은 5년간의 잠복기(潛伏期)가 있다고 합니다. 죄도 얼마 동안은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싹이 나고야 맙니다. 여기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일단 싹이 나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내가 스스로 조정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 과정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얼굴이 변했습니다. 혈색이 썩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손님과 같다. 낯선 손님처럼 내게 온다.

그러나 내가 그를 영접하여 얼마동안 함께 지내면 그 손님이 급기야는 주인이 되고 만다-이것은 히브리 격언에 있는 말입니다. 죄는 인간이 짓지만 회개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일입니다.

죄지은 자마다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다. 이 가책에 뒤이어 회개가 따라와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하려는 마음을 회개 못하게 막는 것은 마귀입니다. 악마입니다.

나 혼자 있을 때에는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면 그 마음이 사라져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악마의 시험에 빠져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믿음이 필요하고, 회개의 용기가 필요하며, 회개의 진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것을 가로막습니다. '죄인이 어디 너뿐이냐? 죄지은 것이 네 탓이냐? 사회 탓이지, 누구 때문이지'하면서 핑계하고 정당화시켜 회개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인처럼 점점 분하고 안색이 변하여 큰 사고를 내고 맙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죄를 다스릴지니라." 다스리라. 아직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다스리라. 한계를 넘어서면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술 마시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버린다.' 처음에 한두 잔 마시는 술, 거기에 무슨 구속이 있고 속박이 있겠습니까? 마실 수도 있고 안 마실 수도 있고, 사람 마음대로입니다. 그러나 한두 잔 계속 들어가기 시작하면 자유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끝내는 술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여행 중에 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한 점잖은 신사한테서 술냄새가 아주 지독하게 나더랍니다. 그는 5분 간격으로 끊임없이 술을 한모금씩 마시면서 가는 것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딸네 집에 갑니다." "따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아직 어립니다." "그런데 어린 딸과 함께 사시지 않습니까?" "웬걸요, 나는 알콜중독자라고 아내한테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혼할 때 한 달에 한 번은 딸을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했지요. 오늘이 바로 딸을 볼 수 있는 날입니다. 딸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이 비참한 인간을 보십시오. 술 때문에 딸과 헤어졌는데 지금 그 딸을 만나러 가면서 또 술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겠습니까? 한 잔 두 잔 마신 술이 사람을 그렇게 추하게 망쳐버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와 똑같습니다.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유가 없어집니다. 이제 죄가 주장하는 대로 끌려가야 합니다. 내 마음도, 감정도, 생활도 전부 죄가 다스립니다. 다 삼켜버립니다.

오늘 성경을 말씀합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다스릴지니라." 방법까지 일러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여기에서 암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경이 변해야 하고, 멀리 가야하고, 세상이 달라져야 하고, 저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가 다스려라, 네가 변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지 맙시다. 이웃이 내게 달리 대해주기를 기대하지 맙시다. 다 상관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져다놓아도 같습니다.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네가 다스리라.' 그리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려 하면 또다른 악이 태어납니다. 오직 선으로써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겨야 합니다. 희생으로 부조리를 이겨야 합니다. 인내로 모순을 이겨야 합니다. 이 길밖에 없습니다. 달리 악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면"-----행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하라, 사모하라, 공부하라가 아닙니다.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 누가 여러분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에게 선을 행하십시오. 그것만이 증오를 이길 수 있는 길이요,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마지막으로, 낯을 들라는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낯을 들 수 있어야 합니다. 강의실에서도 보면 늘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이 있습니다. 고개 속이는 사람, 이거 말썽입니다. 과외수업이니 뭐니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규수업 시간입니다. 수업 시간에 똑바로 앉아서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면 그것으로 끝난 것 아닙니까? 무슨 과외 수업이 필요합니까? 정신차리고 똑바로만 쳐다보면 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에 똑바로 앉지 않고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하면 만사가 다 뒤틀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 좀 보아라. 왜 똑바로 못 보느냐? 낯을 들어라. 그것이 네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이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낯을 피하려 하지 맙시다. 피하려고 해서 피할 수도 없거니와 그분의 얼굴이 내게로 향하고 내 얼굴이 그분께로 향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의 관계가 바로됩니다. 그 떼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죄는 숨기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했습니다. 죽은 자가 말합니다. 산 자보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더 큽니다. 자세히 들어봅시다. 내가 죽여 놓은 사람이 이제 말합니다. 무엇인가 내게 말하고 있습니다. 피가 호소합니다. 내가 억울하게 만든 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죽여버렸으니 완전범죄인 줄 알았는데 그가 지금 내게 말합니다. 죄의 결과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하나를 막으면 다른 하나가 터집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여 우울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일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겨놓은 악을 향하여 화살을 쏘고 계십니다. 앞으로 또 어떤 문제가 터질는지 모릅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 이 사건은 멎지 않을 것입니다. 피가 호소합니다. 그래서 밭을 갈아도 땅이 먹을 것을 주지 않습니다. 이웃이 저를 저주합니다. 모든 생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왜 이렇게 일이 끊임없이 뒤틀리기만 하는가, 왜 이리도 빗나가기만 하는 것일까, 왜 이리 불안하고 초조한가…… 숨겨놓은 아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밭갈이해도 곡식을 얻을 수 없다. 땀을 흘려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겠다.' 여러분, 다시는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변명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맙시다. 내가 죽인 아벨이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오직 회개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길입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예배의 자세를 바로할 때에 비로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리하여 내가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될 때,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되는 그 순간에 내 영혼이 살고 윤택해 집니다. 그러면 지금 처한 상황보다 더 무서운 상황 속에 거해도, 나를 핍박하는 자 앞에서 순교를 당한다 하더라도 천사의 얼굴로 저를 대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아벨은 어디에 있는지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이 예배의 자세를 똑바로 하여 새로운 세계를 내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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