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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잃은 것을 염려하지 말라(사무엘상 9장 15절~21절)

by 【고동엽】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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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을 염려하지 말라(사무엘상 9장 15절~21절)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하시니라. 사울이 성문 가운데 사무엘에게 나아가 가로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컨대 내게 가르치소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선견자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날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이스라엘에 기스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목축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암나귀들을 잃었습니다. 목축업 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이나 소나 나귀를 잃는 것이 보통으로 있는 일입니다. 기스는 그 아들을 불러서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막연한 일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 나귀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기스라는 사람은 그저 답답하던 나머지 아들을 보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군소리가 없습니다. 왜 잃어버렸느냐고 묻지도 않고, 어디가서 찾으란 말이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찾는다는 보장도 없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집을 나섭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무려 사흘길을 찾아 헤맨 것 같습니다. 사흘 동안 이 골짜기 저 들판으로 정처 없이 찾아다닙니다. 더군다나 그가 찾는 목표물은 한 자리에 정착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있다가도 내일은 저곳으로 옮겨갈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처럼 움직이는 표적을 암중모색으로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렇게 헤매던 끝에 아들은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걱정하시겠구나. 사흘씩이나 소식이 없으니 얼마나 걱정스러우실까.'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한 사환에게 말합니다.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삼상 9:5)."

사환이 대답하기를, 돌아가는 길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는 곳에 들러 한 번 물어보자고 권합니다. 어디로 가야 암나귀를 찾을 수 있을지 그가 가르쳐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모처럼 선지자를 만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야 있나……' 오랜 여행에 노자도 다 떨어졌습니다. 예물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간신히 털어 모은 것이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두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르기 전에 이미 사무엘 선지에게 말씀해놓으셨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16절)." 엄청난 명령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붓는 이야기가 10장에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사흘 전에 잃은 암나귀들을 찾았으니 염려 말고 나(사무엘)와 함께 먹고 내일 돌아가라는 위로의 말씀까지 듣습니다. 놀라운 해피 엔드입니다. 걱정거리로 시작했다가 왕관을 받아쓰는 것으로 끝나니 얼마나 근사합니까? 시작은 우울했으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아름답고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알고 보면 사울은 단순히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한 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 계산도 없었습니다. 그저 말씀대로 순종한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굉장한 결과를 보게 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 가운데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입니다. 잠깐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걱정은 잠깐으로 끝나야 합니다. 걱정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 오래 끌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염려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은 말씀합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걱정거리를 만날 때 이로 인하여 이루어질 큰 축복을 생각하면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걱정을 합니다. 생각이 있고 이성이 있기에 걱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이 오래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무기물은 존재하는 그것에 만족합니다. 이를테면 돌덩이나 흐르는 물 따위는 존재한다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자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기물인 동물이나 식물은 성장으로 자기 가치를 나타냅니다. 성장하지 않는 동물이나 식물은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계속 성장함으로써 자기 가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창조에 인간됨의 의미가 있습니다.

살았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놓여진 형편대로, 세월 가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직선적인 삶이 사람을 사람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무릇 사람은 창조를 해야 합니다. 역경을 무릅쓰고, 환난을 이기며, 어려운 걱정거리들을 뚫고 나가 이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래서 인간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근심'이라는 말은 본디 '마음'이라는 말과 '나누인다'라는 말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복합어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져서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두려움은 외적인 것이요, 근심은 내적인 것입니다.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하루에 600만 개의 수면제가 팔린다고 합니다. 하루에 600만 명이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걱정과 고민과 흥분과 불안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고사성어 중에 기인우천(杞人憂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기'라는 나라에 청년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늘 길거리에 앉아서 걱정을 합니다. 그 걱정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묻습니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소?" "하늘이 꺼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어이없는 대답을 듣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합니다.

"옛날에 한번도 하늘이 꺼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오. 또 무너진다 해도 별수없는 일인데 걱정한들 무슨 소용 있겠소?" 그제야 청년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기인우천입니다. '기나라 사람이 하늘을 걱정한다'는 것으로, 곧 쓸데없는 걱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기우'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봅시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염려하지 말라는 데에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걱정해보아도 소용없는 것을 왜 걱정하느냐? 네가 스스로 자랄 수 있느냐? 걱정한다고 젊어질 수 있느냐? 죽을 사람이 살아나느냐? 무슨 유익이 있다고 그처럼 걱정하느냐? 무의미한 걱정을 그만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걱정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걱정의 방향을 돌려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까 하는 쪽으로 걱정의 방향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근심은 불신앙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염려가 없습니다. 언제든 걱정이 생기면 내 믿음에 문제가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염려가 없습니다. 염려와 믿음은 양자택일(兩者擇一)해야 할 관계입니다.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이 생기거든 믿음이 없음을 인하여 기도하십시오.

걱정이 생기는 까닭은 한 가지 일을 한 가지 방향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쪽으로만 생각하고 그 생각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로만 생각합니다. 여러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을 외곬으로, 그것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방향으로만 파고듭니다. 그러다가 끝내 망하는 것입니다. 그 집착이 감정을 분열시키고 안정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믿음을 약화시키고 바른 생각을 방해하며, 객관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인격을 파멸로 이끕니다. 이것이 걱정이요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 근심을 해결하는 사울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아버지의 염려를 맡았습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오라고 하는 막연한 명령에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잃어버렸느냐,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느냐, 과연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찾아오너라 하니 떠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은 with action-----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걱정이란 대체로 앉아서 합니다. 서서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염려하려거든 뛰면서 하십시오. 행동하면서 걱정하십시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생각으로 '된다 안된다, 해보나마나다' 할 것이 아니라 되든 안되든 움직여보아야 합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당시, 어느 여전도사님과 함께 심방 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심방 다니다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느 가정은 부부싸움을 해서 분위기가 냉랭하고, 또 어떤 집은 손바닥만한 방 하나에 아기 기저귀다 뭐다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늘 깔끔하게 해놓고 늘 웃기만 하면서 살 수 있는 집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나오면서 여전도사님이 제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래서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말하기를, "그 재미에 사는 것인 줄 몰랐습니까?" 했습니다. 가봐야 알지, 가보면 또 그런 대로 사는 재미가 있는 것이고, 멀찌감치 앉아서 가보나마나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눈에 비치는 것만 보고야 누가 결혼을 하겠습니까? 행동이 중요합니다. 머리로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샬로테 여왕에게 여섯 살 난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이 딸이 큰 책을 손에 들고 "어머니,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울더랍니다. 여왕인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말입니다.

"울지 마라. 오늘은 몰라도 내일은 알게 될 것이다."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겨우 여섯 살 난 아이가 책 내용을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걱정할 일입니까? 세월이 가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앞의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날에 가서 걱정해도 바쁘지 않습니다. 너무 미리 생각하고 미리 판단해버리지 마십시오. 행동이 먼저입니다. 먼저 말씀에 순종하고 그 시간 그 현장에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미리부터 걱정하느라고 잠 못 이루고 속 끓이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행동이, 순종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사울은 염려는 하되 생각을 돌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잃어버린 나귀만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을 헤매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을 돌립니다. 아버지를 걱정합니다. '나귀 찾으라고 보냈다가 아들 잃겠다'하고 염려하실 아버지를 걱정합니다.

여러분도 아직 걱정하는 것이 있다면 한 번쯤 방향을 바꾸어보십시오. 다른 각도로, 다른 가능성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길만 생각하고 이 길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여러분에게 소원이 있습니까? 몇십 년 해묵은 소원이 있습니까? 그것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한 번 묻습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꼭 잘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어차피 보장 없기는 마찬가지, 피장파장이올시다. 어떻게 되어야 좋은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안되면 안되어서 좋은가 보다, 되면 되어서 좋은가보다 할 일이지 그처럼 야단스럽게 집착 할 일이 아닙니다.

사울은 이제 지혜롭게 생각을 돌립니다. 아버지를 걱정합니다. 그 동안 생각했던 나귀가 아니라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염려합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느냐 못 찾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건강이 더 중요하고, 믿음이 더 중요하고, 진실이 더 중요합니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쪽으로 우리 생각을 돌려봅시다. 그리할 때에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또 한가지 배워야 할 것은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간 그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것, 기도로써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걱정거리가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걱정을 멈추고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 없는 걱정은 어느 사이에 마귀의 노예가 됩니다.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걱정이 머리에 떠오르거든 바로 꿇어 엎디려서 기도하십시오.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그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두셨습니다.

보십시오. 사울이 염려를 하나님께 아뢰고자 찾아왔을 때에 이미 문제가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걱정거리가 해결되었더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의 산에서 바치려 할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양 한 마리를 준비해두셨습니다.

안식일이 지닌 새벽, 마리아와 몇 여인이 예수님께 발라드릴 향유를 가지고 그분의 무덤으로 갑니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나마나 로마군인들이 떡 버티고 있을 텐데, 큰돌로 무덤을 막아놓았는데 누가 열어 줄까-----생각해보면 한두 가지 걱정이 아닙니다. '가나마나다'하고 안 갔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어쨌든 가보자, 가서 생각하자'하고 길을 떠납니다. 향유를 준비해 가지고 어두운 새벽, 미명(未明)에 무덤을 찾아갑니다. 갔더니 군인도 없고 돌도 이미 옮겨져 있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걱정이 해결될 것 같습니까? 벌써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행동하는 사람만이, 순종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요, 아름다운 경지입니다. 오늘 사울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나귀를 잃어버렸습니다마는 그 잃은 것으로 인하여 더 큰 것을 찾습니다. 나귀를 찾아 헤매다가 왕관을 쓰는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얻은 것을 생각하십시오. 돈을 잃었지만 진실을 얻지 않았습니까? 건강을 잃었지만 믿음을 얻지 않았습니까? 명예를 잃었지만 겸손을 얻지 않았습니까? 얻은 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미 잃어버린 바가 있습니까? 더 큰 것을 얻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과 축복이 있습니다.

끝없는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그 동기를 물어봅시다.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혹 이것이 죄가 아니며 불 신앙이 아닌가 하고 우리 근심의 원인을 물어봅시다. 그리고 앉아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순종함으로 해결합시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의 해결을 봅시다. 믿음을 얻고 진실을 되찾게 될 때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복된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네가 잃은 것을 벌써 찾았다, 네가 이제 왕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던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 귀에도 들려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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