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제어의 비결(에베소서 4장 25절~32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헬라 철학의 비조(鼻祖)라고 하는 탈레스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을 충고하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지식 중에서 가장 귀한 지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를 아는 지식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칩니다. 특히 우리 한민족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살든 그 교육열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자기를 아는 지식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이치를 잘 알고 모든 지혜에 통달했다 하더라도 자기를 모르면 그 사람은 바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아는 지식-----이것이 가장 귀중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 중에서 가장 귀한 능력은 자기를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천하를 제패(制覇)했다 하더라도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나 자신을 다스리는 데 실패한다면, 그는 마침내 패자입니다. 또한 진실 중에 가장 귀한 진실은 자기에 대한 진실입니다. 법을 잘 지키고 약속을 잘 지키며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내가 나와 더불어 약속한 것,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그는 진실치 못한 사람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자주 암송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참으로 자기 마음과 인격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용사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먼저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스리며, 자기 진실을 찾아서 자기 평가에 진실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능력에 대해서 바르고 공정한 평가를 내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명성 높은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가 높은 인격자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나됨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나됨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나의 나됨의 진실을 알고, 또한 자기 진실에 충실했습니다.
로마서를 읽어가느라면 그의 진실과 솔직함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로마교인들, 그를 위대한 사도로만 알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1장으로 16장까지 구원의 복음을 열거해가다가 한가운데인 7장에서 그는 자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다, 내 속에 두 마음이 있다, 원하는 일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일만 저지른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그 누가 이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나를 평가함으로써 오는 불명예,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든 말든 사도 바울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진실했습니다. 실로 그의 자기됨을 아는 그 지혜가 놀랍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쳐서 복종케 한다----헬라어로는 '둘라고게오'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노예를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인도주의적 차원의 이야기는 잠깐 접어두기로 하고, 이제부터 노예를 한 명 데려다 길들인다고 생각해보십시다. 우락부락한 청년, 자유롭게 살던 청년을 노예로 만들었는데 어디 처음부터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때리고 굶기고 해서 마침내 "주인님"하고 고분고분 순종하는 노예로 만들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길들이는 사람이나 길들리는 자나 참으로 못할 노릇일 것입니다. 그 힘든 일을 사도 바울은 스스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와 같다고도 말합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고도 어긋나고, 그렇게 간절히 소원하면서도 못하는 자기 자신을 각성하며 마침내 그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내가 아무래도 배냇병신이지, 날 때부터 뭔가 잘못된 게지'하고 만삭되지 못하여 나온 신통치 못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 신령한 면에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육체의 가시'가 그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자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간질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너희 믿음을 시험할만한 것이 내게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추측컨대 그는 설교 도중에 쓰러진 적도 있고, 여행하다가 발작을 일으켜서 여행을 중단해야 했던 적도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도 했겠지요.
아시다시피 그는 돈 없이 전도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에게 안식처가 될만한 가정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마지막 밑천이라 할 수 있는 건강 하나만큼은 있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특별히 이 문제를 놓고 세 번 간구했다고 합니다. 얼마동안 기도했는지, 또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는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네가 지금 받고 있는 은혜만으로도 족하다, 충분하다 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나 같은 사람한테는 가시가 있어야 한다. 가시가 없으면 교만하고, 가시가 없으면 방종하니까, 이렇게 쿡쿡 찌르는 것이 있어야 내가 겸손할 수 있고 진실할 수 있고 부지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이 가시가 빠져나가는 날에는 내가 아마도 나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때로 내가 원치 않는 고통도 있고 질병도 있습니다. 실패도 있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괴로운 사정도 있습니다. 자,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입니까? 바울은 생각합니다. '이것이 내게 필요하다. 이것이 있어야 내가 은혜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옛사람은 여전히 살아서 들먹거리고
D똕TXT?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주의 종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여태 옛것이 남아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 참으로 옷을 벗어버리듯이 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낡고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이 목욕한 후에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잠시나마 기분이 얼마나 산뜻하고 좋겠습니까? 인격도 그처럼 바뀌어진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의 변화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 많은 시련 가운데 변화해갑니다.
언젠가 한번은 어느 분이 제게 와서 이상한 질문을 합디다.
"목사님, 실은 제게 결혼 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꽤 좋은 사이로 지냈는데, 제 생각에도 이 사람과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고 부모님들도 반대하시고 해서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잘살아왔는데 어느 날 불쑥 그 옛 애인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한번 만나자는 것입니다.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 고민스럽습니다. 목사님, 어찌해야 할까요?" 저는 딱 잘라서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자식이 둘이나 되고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마음도 담담해지고 했는데 뭐 한번쯤 만나봐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그래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갓 태어난 호랑이 새끼를 데려다 우유를 먹여 키우면 마치 강아지처럼 키울 수 있다, 아주 순하게 잘 자란다, 그러나 어느 때에 가서 제 종자인 호랑이를 만나면 그 순간에 사나운 호랑이가 되어버린다 ----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이제는 알아서 하시라고만 했습니다.
여러분, 10년 지났으니까 이제 괜찮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잠자고 있던 본성이 한순간에 화들짝 깨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바로 살려 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긴 세월 동안 애쓰지만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찰나적입니다. 단 한순간에 덜꺽 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구원받은 자로 살며, 구원을 지켜가며 구원을 성장케 하는 생활이 얼마나 긴 훈련이요 긴 과정인가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름지기 사도 바울은 그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실정을 잘 아는 스승으로서 자기를 극복하는 비법을 오늘의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이 본문을 스무 번만 읽어보십시오. 스무 번 읽고 기도해보십시오. 본문을 깊이 읽어보면 여기에 몇 가지 자기를 익는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하여-----"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30절)." 늘 내가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내가 성령 안에 있는가, 여기에 먼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절)"-----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나됨이 그분의 용서 가운데에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주께서 내 모든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그 용서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감격해하는 사람은 새로운 뜻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용서받은 나,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 이웃에 대하여-----"은혜를 끼치게 하라(29절)." 은혜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려고가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려고 살아야 합니다. 내게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은혜를 끼치는 데에 더 마음을 두고 그것을 우선으로 하여 사는 것입니다.
넷째, 교회에 대하여-----"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25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할 때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픕니다. 저 사람이 잘못되어도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지체(肢體)입니다. 손이 아플 때에 머리도 아프고, 발이 아플 때에도 머리가 아픕니다. 손이 살찌면 발도 살찌고, 손이 썩으면 발도 썩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지체가 된다, 머리를 중심 하여 한 지체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웃을 지체로 대하라-----참으로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서 마음과 말과 손을 통제할 것을 말씀합니다. 말에 대하여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마음에 대하여는 분을 품지 말라, 손에 대하여는 도적질하지 말라-----이처럼 구체적으로 말씀하면서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합니다.
구체적으로 행동적으로 자기를 제어하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가끔 텔레비전으로 권투 시합을 봅니다. 치고 받고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해설자들의 해설이 재미있어서 자세히 들어보곤 합니다. 그런데 권투 해설에는 늘 듣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맞아 죽습니다. 공격 없이는 방어를 못합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릴 것이 아니라 내뻗어야 합니다. 수동적이요 소극적인 자세로 방어하려 들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나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참된 것을 말하라."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라, 어떠어떠한 말은 하지 말아라-----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소극적인 금기(禁忌)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라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르칩니다.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고 합니다마는 침묵이라고 다 금이 아닙니다. 침묵도 침묵 나름입니다. 어떤 침묵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20년을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가정에 평화가 없고 문제가 많다고 어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제게 상담을 청하는 것입니다. 저와 그분이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말고요" "그러면 사랑한다고 말해보았습니까?" 그분은 가만히 생각하는 눈치더니, 결혼식 때 목사님이 "사랑하겠느뇨?" 할 때에 "네" 한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기도하고 힘을 내어서 오늘 남편이 들어오거든 '사랑합니다'라고 한번 말해보십시오." 자, 그 다음날 그분이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남편이 들어올 때에 큰 마음먹고 "여보 사랑해요"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인즉 "미쳤소?" ----- 참으로 재미없고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20여 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사랑합니다'라는 한마디가 이토록 낯선 말이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무슨 노릇입니까? 그 말 한마디가 어쩌다 어색한 말이 되어버렸습니까? 마음은 좋습니다. 마음은 한없이 좋은데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이것이 참으로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우리와 반대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옆에서 전화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하고 확실히 다릅니다. 전화 받자 마다 "I love you"로 시작해서 한참 떠들다가 역시 "I love you"로 끝납니다. 그렇게 야단스럽지 않으면 이혼 당한다고 합니다. 저들은 너무 형식적이고 과장된 것이 문제요, 우리는 너무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 여성들이 얼마나 남편을 사랑합니까? 정성을 다합니다. 평생을 바쳐서 사랑합니다. 그처럼 깊이 사랑하면서도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관입니다. 그처럼 깊이 사랑하면서도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관입니다. "아이 속상해 죽겠어. 저이 때문에 살고 싶지 않아……" 좋은 말 다 놔두고 꼭 나쁜 말만 골라서 합니다. 마음으로 사랑한다고요? 어림없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사랑하거든 말을 하십시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라고 말을 하십시오.
사랑하노라고 존경하노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남편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 꺾기 작전을 벌이는 것 같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기를, 아내는 남편 기를 꺾어야 한다고,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를 죽이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과 똑같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십시오. 남편이 무슨 말을 좋아하는지, 아내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십니까? 다 알지만 상대방이 기고만장할까봐 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일부러 기분 나쁜 소리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봐야 얼마나 오래 살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생각을 바로 하고 말을 바로 합시다.
본문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은혜를 끼치게 하라-----복잡하게 생각지 말고 상대방이 좋아할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당신과 결혼하기를 참 잘했습니다, 당신한테는 아직도 얼마든지 여력이 있습니다, 이것도 가능하고 저것도 가능합니다-----이런 말하기가 그렇게도 어렵습니까?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이제 부도가 나서 죽어버릴까 하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한번 들어와 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면서 당신은 할 수 있다고, 얼마든지 또 일어설 수 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부끄럽지만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우셨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말은 그만두고, 은혜 되는 말, 진실한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참된 말을 하라, 그리고 분을 품지 말라-----분한 감정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을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함이 있어도 죄는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 심리학에서는 '분한 것이 있으면 다 쏟아버려야 한다, 발산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분한 마음이 있거든 속으로 삭이라, 말하지 말라.' 말을 하면 말하는 동안에 분한 마음이 더 커집니다. 확대되고 확장됩니다. 나아가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한번 분을 품으면 시간이 갈수록 오해가 점점 더 커지고, 구실이 많아지고, 경직되고, 고집스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풀 것은 빨리 풀고, 용서할 것은 빨리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분을 품고 있는 상태가 여러 날 여러 시간 계속되면 마침내 사단이 발동을 합니다. 나도 모르게 마귀의 소리를 듣습니다. '한번 붙어봐라, 싸워라, 터뜨려라, 가만히 있지 말고 퍼부어줘라.' 어느새 마귀의 종이 되어 가지고 피투성이가 된 다음에야 이럴 줄 몰랐다고 후회를 합니다. 내가 분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귀가 좋아합니다. 마귀의 수종자가 됩니다. 마귀의 제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스라엘사람들은 해질 때부터 해질 때까지가 하루입니다.
해가 지면 다음날입니다. 그러므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은 그날 분함은 그날로 소화하고 다음날까지 넘기지 말라, 속히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는 바 "너를 송사 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마 5 : 25)" 하십니다.
다시 본문 28절에 보면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단순히 도둑질하지 않으려고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남을 구제하기 위하여 일하라고 합니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하여 도둑질하던 것을 이제는 이웃을 돕기 위하여 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목적으로 일을 합니까? 내가 먹기 위해서? 내 가정을 위해서? 지금은 남을 위해서 일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을 나 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가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 집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이 예배당을 지을 때에 자기 분수에 넘치는 많은 헌금을 작정했습니다. 그래놓고 옛날 처녀 때에 다니던 직장을 다시 나갔습니다.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한 삼 년 후에 또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오로지 헌금하기 위해서 일한 것입니다. 그 삼 년 동안 번 것을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이것은 땅을 사두었다가 어쩌다 땅값이 올라서 헌금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헌금을 위해서만 삼 년 동안 일하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하되 목적을 좋은 곳에 두고 일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일하는데 기도도 여유 있게 합니다. "하나님, 제가 많이 벌면 하나님이 많이 받으실 것이요, 제가 못 벌면 하나님도 못 받으십니다. 손해보는 쪽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오" 아주 느긋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일에 목적을 두고 일하는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약해질 필요도, 고민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을 위하여 목적을 분명히 하고 열심히 버십시오. 구제할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한 것을 위하여 일하십시오. 그리할 때에 피곤하지 않을 것이며, 도적질도 않을 것입니다. 마침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합시다. 자기 제어에 실패한 지난날을 두고 더는 후회하지 맙시다. 찬송하고 감사합시다.
그리할 때에 원망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게 될 것이며, 비방하는 소리를 개의치 않게 될 것입니다.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해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더 열심히 일하십시오. 게으름과 나태함을 극복하고 이기주의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를 다스립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따라 나를 완전히 제어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나만이 아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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