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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어디 있느냐?(요한복음 8장 1-11절 )

by 【고동엽】 2023. 4. 8.
 
 

기둥교회 고신일 목사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장 1-11절)

 

 <목회기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세상에 살던 우리들이 감사와 찬양을 위한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습니다.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며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봄을 느끼며 가볍게 옷입은 우리들
IMF로 인한 무거운 짐도 가볍기를 원합니다.
평안한 사람도 많지만 일 때문에 직장 때문에, 아니, 일용할 양식 때문에
안타까운 이들도 많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많으나 크고 작은 병으로 시달 리는 고통 속에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일 때문에 염려하며 기도하며
걱정을 안고 온 이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평안을 주옵소서.
해결을 주옵소서.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자리가 짐 벗는 기쁨의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군대, 객지, 외국, 원치 않는 곳에 있음으로 이곳에 나오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는 은혜를 저들도 함께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 전합니다.  
악한 마귀 틈타지 않게 하시고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찬하는 것보다 흉보는 것을 더 쉽게 합니다.  좋은 점을 말하는데 쓰는 시간보다 나쁜 점을 말하는데 쓰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의 나라 사람도 좋게 말하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일본사람은 왜놈이라하고, 중국 사람은 떼놈, 미국 사람은 양놈, 또 우리끼리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좀 괜찮은 데 산다고 시골 사람은 촌놈이라 부르며 막 대합니다.   남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남이 하는 사랑은 스캔들(scandal, 추문)로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사랑은 '로맨스(romance)'라고 소설같은 사랑이라고 얘기합니다.  운전을 할 때도 남이 끼어들면 무례하고, 도무지 운전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저렇게 돌아다닌다고 욕을 해댑니다.  그런데 자기가 끼어들 때는 어떻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웬 말이 많으냐고,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며 당당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네 삶의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들, 자기의 허물과 자기의 실수, 자기의 잘못은 정당화 시키고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는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도 종교적인 자유를 누리며 나름대로 안정된 삶을 유지해온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사라고 불렸는데, 율법을 해석하고 그 세칙을 만들어서 일상 생활에서 이렇게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는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공회의 의원으로도 많이 당선이 되었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안정된 삶, 안정된 자리를 흔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말씀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상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 가둘 궁리를 했고,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했습니다.

 

바리새인(Pharisees) : 주전 2세기에서 주후 1세기까지의 유대교의 세 종파 중의 하나로 다른 두 파는 사두 개파와 엣세네파이다.  사두 개는 자유주의요 엣세네는 숙명론인데 바리새는 그 중간을 걷는다.  예수 때 바리새파는 약 6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이웃이란 단체를 조직했다.  사후에 의인은 새 몸을 입으나 악인은 음부에 가는 것(행 23:6), 천사의 존재(행 23:7-9), 율법의 권위있는 해석 '탈무드' 등을 믿었다(막 7:5-8, 마 23:).  바리새파는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일반의 존경을 받았으며 사두 개인이 성전인데 반하여 바리새인은 회당이었고 이상적 메시야 대망도 바리새주의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갈 2:3-5, 5:1, 6:13). 서기관(teachers of the law)   -. 3급 공무원 갑류의 하나. 사무관 위 이사관의 아래 직위.   -. 구약시대에 문자를 아는 학자가 왕궁의 서기로서 율법을 베껴쓰는 일을 했으나점차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치게 되었다(대하 34:13).  제사장이요 학자인 [에스라]는 그 일인자였다(스 7:6-10).  신약시대에는 율법사라 불렀다(마 22:34, 눅 7:30).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그 세칙을 만들어 백성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했고, 백성을 지배했으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마 6:21).  그들은 제사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제자들도 핍박했다(눅 22:2, 행 4:5, 7:12). 예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 세칙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그들의 위선을 격렬하게 비난했다(마 23).

 

     그런데 간음(adultery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있었습니다.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간음은 육체적인 죄입니다. 정신적인 죄요, 도덕적인 죄, 사회적인 죄, 신앙적으로도 죄입니다.  청소년 들은 물론이고 성인들 모두 가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빛된 삶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육체의 깨끗함을 지켜야 합니다.

     진주는 돼지 우리 속에 처박혀 있어도 진주의 빛깔을 잃지 않습니다.  잠시 가려질 뿐입니다.  보석이 왜 보석입니까?   어떤 환경에 들어가도 그 값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보석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변해도, 정치인들이 적당히 편안하게 정치하면서 술집이 24시간 영업을 하게 하고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음란한 것이 판을 치고 음란 비디오가 판을 쳐도 별 소리를 다 듣는 한 이 있어도 '골동품이라든지, 바보라든지, 원시인이라든지, 희귀종이라든지, 천연기념물이라든지 자기가 뭐 별났다고, 요즘 다 그런건데'라고 아무리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도 예수믿는 사람은 지킬 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랍비(Rabbi)들이 가르친 교훈 중에 3가지 큰 죄가 있습니다.  
하나는 ① 우상숭배입니다.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은 큰 죄입니다.
           ② 살인 죄입니다.
           ③ 간음 죄입니다.
     이 세가지 죄는 증거가 분명하고 증인 몇 명만 있으면 율법에 명한 대로 단호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므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라면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때려 죽여 마땅한 여자입니다(레위기 20장, 신명기 22:22-24절, 에스겔 16:38).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죄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시는 예수님 앞에 그 여인을 갖다 놓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자를 정중하게 모시고 왔겠습니까?  아마 질질 끌고 왔을 것입니다.  머리채를 잡고 왔을 지도 모릅니다.  옷이라도 제대로 입혔겠습니까? 그런 여인을 예수님 앞에 놓고 그 사람들이 묻습니다.  4절 말씀에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나이다(Teacher, this woman was caught in the act of adultery." -NIV).   5절 말씀에 보면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In the Law Moses commanded us to stone such woman.-NIV"  

     이 절묘한 질문입니다.  기막힌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돌로 쳐 죽이라 하면,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법에는 그런 법이 없기 때문에 총독의 결재 없이 사형을 허락할 수 있습니다.  총독이 아닌 사람이 사형 언도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자를 때려 죽이라고 명하면 로마 법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동안 가르치셨던 사랑의 법에도 위배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때려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재판에 고소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이렇게 걸리고 저러면 저렇게 걸리게 되었습니다.  대답을 하시지 않은 예수님은 허리를 숙여 땅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많은 책을 다 뒤져보았는데 별의별 학설이 다 있습니다.  이런 것을 썼다는 둥, 저런 것을 썼다는 둥, 다 추측해서 쓴 것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벨사살 왕이 잘못했을 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하는 말씀이 쓰여지면서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가슴이 철렁하는 양심에 찔림을 받는 그런 글을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글을 쓰고 계시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물었습니다(7절).  "선생님이여 이 여자를 죽일까요 말까요, 때려 죽일까요 말까요? ("When they kept on questioning him, ∼)"

 

영국의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22-1714)는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려운 경우가 닥치게 될 때, 말을 빨리 내뱉지 말고, 천천히 하도록 가르치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38편 13절에도(12절-14절 참조)  
답변하지 말아야 한 경우에는 답변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 묻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한참 글을 쓰시다가 예수님이 일어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If any one of you is without sin, let him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 NIV) 고 하셨습니다.  영문 성경에 "The one among you who has not sinned should throw the first stone at her."(The Simple English Bible), first stone(첫 번 째 돌)이라고 했습니다.  "당신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신명기 17장에 보면 범죄자를 처형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증인이 먼저 손을 대면 그 다음 사람들이 손을 댈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증인들이 먼저 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돌을 던졌습니다.  증인된 당신들이 죄가 없다면 먼저 돌을 던지시오라고 했습니다(행 7:58).  간음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욕망조차도 없는 사람, 죄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죄 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자기에게 더 큰 죄가 있으면서도 남이 모른다고 해서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에 쉽게 빠집니다.  흔히 남을 비난할 때 보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최소한 저런 짓은 안해'라고 하면서 그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자기가 똑같은 짓을 안했다고 해서 비난합니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예수님이 몸을 굽혀 다시 땅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꼈고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슬금슬금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사람들 같으면 어떠했을까요?  요즘 사람들도 슬금슬금 도망갔을까?    마침내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그 자리에 비참한 여자,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더러운 여자, 불쌍한 여자, 그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 여자를 부르십니다.  "여자여(woman - NIV)" , 여러분 이 '여자여'라는 말은 '야 이 여자야!'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예수님이 '여자여'라고 하실 때는 '구네'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여자를 부를 때 '구네'라는 단어를 세 번 쓰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은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를 부를 때 구네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번은 이 더러운 여자, 이 비참한 지경에 있는 여자를 부를 때 '구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를 부를 때에(요 2:4, 19:16)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부르는 그 '여자여'라는 말을 이 더러운 여자를 부를 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사람들을 비난하고, 쉽게 아무렇게나 평가하고 막 대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신분으로 다른 사람을 막 대하지는 않습니까?  외형적으로 봐서, 보기 싫다고, 더럽다고 해서 막 대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최소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출 줄 알아야 합니다.  정중해야 합니다.  돌에 맞아 죽을 만한 입장에 있다 할지라도.
 
     하루는 무료 급식하는 식당에서 노인들이 드시는 식사를 저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틈날 때마다 가급적이면 노인들이 드시는 식사를 제가 같이 먹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들에게 '제가 이 교회의 목사입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밥 한끼 주면서 뭐 폼잴 일이 있습니까?  아무 소리도 안합니다.   그런데 아마 제가 누구인지 모르셨다가 제가 누군지 알 게 되신 분이 있으신가 봅니다.  나오시면서 제 손을 잡더니 "목사님, 목사님도 우리가 먹는 밥을 먹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아니 제가 무슨 별식을 먹습니까?  저도 똑같은 사람인데요."라고 했더니 "아니요, 보통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주는 밥 저들은 안먹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아유, 아닙니다.  반찬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여선교회에서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저는 그 할아버지가 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이면 남도 주면 안되겠구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지요?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을 남한테 줍니다.  내가 먹기 싫은 것을 줍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남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더러운 여인, 비참한 여인에게도 자기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하셨던 단어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추한 모습으로 끌려온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을 죽이려고,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고 당신을 끌고 왔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어디있습니까?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그 사람들이 어디갔소?", 다 떠난 뒤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나도 당신에게 돌을 들어 던져 당신을 죽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죄를 벌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야 그게 무슨 죄냐,  그렇게 살아, 넌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지은 것은 틀림이 없어.  그러나 당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지는 않아'.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어디 갔느냐?"하는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법대로 하면 죽어 마땅해.  이미 죽었어야 해.  그러나 당신은 법대로가 아니라 은혜로 살았어."  
 
      여러분, 법대로 하면 됩니까?  법대로 하면 좋습니까?  어느 교회이든지 '법대로 합시다'라고 하는 교회는 이미 은혜가 떠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죽을 수밖에 없는 너는 법대로가 아니라 은혜로 산 것임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인 미국의 '아이언 사이드(Ironside)'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어느날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서 하듯 연말 당회같은 것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적당히 좀 넘어가고, 그런 것은 그냥 넘어가죠라고 넘어갔던 모양입니다.  아마 제가 회의하듯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손을 들더니 "목사님, 그렇게 대충대충 넘어가지 말고 법대로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좋았던 분위기는 찬물을 껴얹은 것 같았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법대로 하자고?  법대로 했으면 자네는 지금 지옥에 가 있어야 되네."  
     법대로 했으면 여러분 벌 안받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법대로라면, 구약의 율법대로라면 우리 가운데 지옥 안갈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려던 그들이 어디갔소?'라고 여인을 향해 물은 것은 '당신은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산 것이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이제 이 삶을 청산하시오.  죄를 반복해서 범해서는 안된다'는 선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할지라도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죄를 범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가지로 해야 합니다.  
첫째는 머리로 해야 합니다.
           지적으로,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는 정적으로 해야 합니다.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죄지은 것에 대하여 애통하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로는 의지적으로, 손 발로 해야 합니다.
           이제 죄를 용감하게 끊고 '내가 다시는 이런 일을 행치 않으리라'는 결심을
           해야 하고 그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용서해 주시마고 그를 내보낸 것은, 그 여인이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여인에게 한번 더 삶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 예배 드리러 나온 여러분들은, 아니 저 자신 모두가 한번 더 허락받은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는 예배를 드릴 수 없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 법대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감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에 한 두가지 감춘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두가지입니까?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사랑으로, 예수의 은혜로, 우리를 정죄하는 모든 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조롱하는 사탄들은 다 물러간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들이 어디 갔느냐?"고.  너희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너희들을 향해 조롱하고, 돌을 던지려는 자들이 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슬금슬금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다 물러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주일 아침에 담대함으로 당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감히 담대히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당당히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IMF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직장을 잃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주변이 물질이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번 더 삶의 기회를 허락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장 12-13절에 있는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란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속에는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실망하고 낙심할 조건이 많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의 귓가에 들려 주십니다.  "너희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너희를 향해서 돌을 던지려고 하고, 너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디 갔느냐?,  이제 너희가 산 것은 법으로 산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살았으니 다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섭섭한 일을 행치 말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귓가에 들려 주십니다.
 "그들이 어디 갔느냐?  그들은 너희들 곁을 떠나가지 않았느냐,  다시는 범죄치 말라."  
 
<기  도 >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들 귓가에 '그들이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는 주여,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이 물러갔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부끄러움 없는 삶을 결단하며 담대하며 당당히 하나님 앞에 서며, 낙심치 않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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