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일 목사
<목회기도>
할렐루야!
4월입니다. 평안함과 승리의 고백을 하는 4월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혼식 때문에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고 결혼식장에 가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상종할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상종 못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칭찬을 했습니다. "예수 믿으려면 저 정도는 되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의 운명이 갈라진 이유도 예배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여자들의 옷차림이 노출이 심해진다고 합니다. 미니스커트가 한없이 올라갔을 때도 우리 나라가 살기 어려웠을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란제리 룩'이라는 것이 유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속옷 같은 옷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여름을 대비하여 예배 시간에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오는 사람들에게는 셔츠를 준비했다가 덮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해야 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고, 입어야 할 옷이 있고 입지 않아야 될 옷이 있습니다. 수영장에서 가서 양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예배의 자리에 속옷만 입고 오는 것도 심각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강단은 높기 때문에 내려다 보이게 되는데 너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면 제가 시험에 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이 다 간다고 해도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고 아무리 다른 사람이 다 먹어도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세상과는 다른 절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식목일이면서 교회적으로는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일주일은 고난주간입니다. 아무리 엉터리로 믿는 신자라도 이 한 주간은 경건하게 보내는 주간입니다. 세계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이번 한 주간은 경건하게 보낼 것입니다. 오락을 삼가고, 즐기는 일들을 삼가야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챤 가운데 고난주간에 결혼을 하거나 생일잔치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금식하고 금욕하는 주간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끊기로 작정한 것들은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주간에 술을 끊고 담배를 끊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금요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금식하시고 교회에서 연합 속회로 모입니다. 왜냐하면 각 가정에서 속회로 모이면 틀림없이 대접한다고 금식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모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 밤 예배부터 시작하여 한 주간 동안 매일 새벽 고난주간특별 집회를 갖습니다. 종려주일 저녁예배부터 부활절 새벽예배까지 특별 기도기간에 여러분들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참석하셔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주간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성회수요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 수난절기의 절정기로서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마지막 한 주간을 의미합니다. 고난 주간에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승리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신앙의 성숙과 회개를 통한 영적 각성의 기회로 보냅니다. 때묻고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특별히 은혜 받는 한 주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주 동안 주께서 행하신 일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을 사는 성도들 역시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 동안 해당되는 날의 자료를 가지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도 그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 오늘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는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대의 명절입니다. 그때 해마다, 유월절이면 유월절을 기념하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서 하나님께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려 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들이 예배할 수 있도록 해방시켜 달라"고 했지만 애굽의 왕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묵살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피, 개구리, 이, 파리, 오역, 종기, 우박, 황충, 암흑…등의 9가지 재앙을 내리셨지만 바로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내린 마지막 재앙이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습니다. 유월(逾越 넘을 유, 넘을 월)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패를 붙이라고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교패도 무슨 부적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그 교패에 담긴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엄청난 명절에,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대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날이 바로 오늘 '종려 주일'입니다. 사람들이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압박에서 해방을 희구한 것은 물론이지만 당장 빵이 급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따르는 질병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 그럴듯한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그에게는 ① 경건 생활에서 나오는 엄숙함과 ② 권위 있는 가르침(말씀에 권세가 있었다), ③ 기적적인 치료(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④ 초자연적인 기적(물위를 걷고… 오병 이어의 기적) ⑤ 신비한 능력(사탄을 이기신 권세, 죽음으로부터 나사로를 일으키시고)을 행하는 불과 30대 초반의 젊은이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그리고 지배국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쫓기만 하면 이제 완벽한 해방을 맞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로 영접했던 날이 바로 오늘 종려주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최후의 한 주간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벌써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고, 책잡으려는 무리들도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음모에 따라서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일곱 마디를 하셨습니다.
- 제1언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24)
주님의 말씀하신 '저희'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소행을 생각하면 벌하여 마땅하겠으나 주님은 평소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교훈을 십자가 위에서 실천하시기 위해 이 같은 악당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는 원수가 없음을 배우게 됩니다.
- 제2언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갈보리 산 예수의 십자가 좌우에는 두 명의 행악자(行惡者)가 동시에 십자가형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예수를 비방하고 죽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간 사실입니다. 본 구절은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 확약하신 말씀인데, 십자가는 구원과 멸망의 분기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
주님은 모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육신하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12세 이후로는 양부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사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후로는 모친의 슬하에서 목수의 중노동을 하면서 어머니를 지성껏 모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 중에도 효성이 여전하다가 마지막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심으로써 인자된 도리를 보이셨습니다.
- 제4언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마 27:46)
본문은 시편 22편 1절의 '메시야 수난'에 관한 예언인데 이사야 53장과 같이 구약에서 메시야에 관한 둘째 예언입니다. 우리말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네 번째 부르짖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니 곧 죄의 압력입니다. 인성을 가지신 주님은 온 세상의 죄를 한 몸에 걸머지시고 하나님의 엄한 심판으로써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는 순간입니다. 고금 이래의 세상 죄를 한 몸에 지시므로 죄의 압력을 무겁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 제5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우주 만물이 주의 것이요, 5대주 6대양이 주님의 것이건만 십자가 위에서 물 한 방울의 혜택을 입지 못하셔서 평소 침묵을 물리치시고 무거운 입을 열어 "내가 목마르다"고 하십니다. 종일 작렬하는 태양 밑에서 수분을 피와 땀으로 빼시고 건조해진 육체에 목이 마른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목마른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 제6언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의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이는 중대한 말씀이니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전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과 계획이 이 한 마디 의 말씀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간단한 이 한 마디가 유구한 역사적 사실을 결론짓는 중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하겠습니다.
- 제7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주님이 입으신 옷은 로마 군인이 나누어가졌고, 어머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으며, 당신의 몸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의탁되었습니다. 피와 살은 만인을 위하여 흘리시고 찢으신 바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영혼은 하나님께 부탁하시는 장엄한 최후를 보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그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하심으로써 십자가 위에서의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이 일곱 마디 중 네 번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은 참으로 특별한 표현입니다. 시편 22편 1절의 아람어 인용 그대로입니다.
"Eli, Eli, lema sabakthani?"(마 27:46) "Eloi, Eloi, lema sabakthani?"(아람어)"My God, My God, why did you abandon me?""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실 이 예수님의 '절규의 질문'은 쉽게 해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난해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활동하실 때 하나님을 거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죽음이 임박해서도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요 17:1)라고 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신자가 사람들을 데리고 잡으러 올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실 때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부르짖은 소리는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라도 하나님과의 친밀감(아버지라고 불렀던)은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때는 심판자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Why?) 버리셨나이까?" 이 말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서글픈 말입니다. 어떤 낙담될 만한 이야기에도 항변할 수 있고 또 기회가 있다고 위로할 수 있지만 '버림받았다'는 말처럼 서글픈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남편이나 아내에게 버림받은 사람, 자식에게 버림받은 부모(노인), 친구에게 버림받은 사람, 사회나 일터에서 버림받은 사람…, 믿었던 사람, 믿었던 대상에게서 버림받은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혼자 두시지 아니하신다고 예수님은 당당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그런 비참한 상황, 버림받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의문, 예수님의 버림받은 것 같은, 아니 버림받은 모습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주변에서 얼마든지 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시 때때로 엄청난 불행을 경험하며 삽니다. 감당할 능력이 없는 고통이 몰아칠 때, 혼자 버려졌다는 절망감에 몸부림칠 때, 그렇게 많던 주변 사람들의 미소가 사라져 버리고 질타와 책망, 비난과 조소의 눈빛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삶의 잣대로 보면 참 한심한 상황입니다. 젊은 나이에 부모를 떠나 들로 산으로, 추종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솔직히, 그가 세상적인 기준의 생산적인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괜찮은 여자를 만나 서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긴, 그런 떠돌이(무리 지어 다니며 이상한 일들만 하는) 예수에게 딸 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시집갈 여인도 없었을 것입니다. 3년이나 데리고 다니며 훈련시켰던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고, 한 녀석은 스승을 팔아 넘겼고, 사랑한다는 제자는 선생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배고플 때 먹여 주었던 수 많은 사람들, 고쳐 주었던 열 문둥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본 사람들… 말씀을 들으러 몰려들었던 사람들, 치료받기 위해 몰려 다녔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그를 인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그를 폭도 중의 하나로 재판하여 좌우에 강도들과 함께 처형을 했습니다. 완전히 실패한 인생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인생입니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죽어간 사람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절규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으며, 무엇을 하셨단 말입니까?
마틴 루터는 이것을 해석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절박하게 느끼며 외친 소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때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 계셨을까?'.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하나님이 필요할 때, 절박한 상황에 '정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세계 2차전 때 전쟁터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습니다. 한 교회의 중직의 아들이 죽었다는 통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찾아 벨을 눌렀습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사망전보를 들고 나와 목사님의 얼굴에 내밀며 묻습니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소. 도대체 하나님은 그때 뭐하셨소? 도대체 하나님은 그때 어디 계셨단 말이요?" 침묵하던 목사님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죽임 당하던 바로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라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23).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죄 값을 치르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고통 중에 절규하시며 물으시는 예수님은, "하나님, 이제 나를 버리셨군요!"라는 탄식의 의미보다는 "이 정도면 죄 값이 되었습니까? 이제, 완전히 버려졌습니까? 이제, 이렇게 처참히 버리셨으니 온 인류의 죄 값을 이정도면 치른 것입니까?" 라는 종결을 확인하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악을 방만하시거나 악에 무관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과정과 결과가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투덜대고 소리 지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How long)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박국의 항변 같은 소리는 끝이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에 지시거나 악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아 계속해서 환난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우선 잘못된 태도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지?", "이걸 어떻게 하나? 큰일 났네", "에이, 될 대로 되라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적인 자세가 아니라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자세란 주님을 꼭 붙들고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비올 때의 우산처럼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 확실한 도움이요, 충분한 도움이요, 적시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만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면 당하는 환난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의미한 환난은 없습니다. 환난의 목적은 우리에게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좀더 가까이 인도하고 또한 환난은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더 큰 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때는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던져 버리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거룩한 뜻의 성취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예수 믿을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30년 조금 더 살다간 유대인 청년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리셨습니까? 이제 되셨습니까"라고 묻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지 "내가 목마르다"라고 자신의 목마름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선언합니다. "다 이루었다, 다 끝냈다,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예배의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 가운데도 어떤 분들은 심판자 하나님을 지금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렇게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더 어려운 가운데 있어야 합니까?" 하며 그런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하루 속히 아니 이 순간이 '아버지와의 관계'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살다보면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외면 당할 수도 있습니다. 무시 당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조차도 나를 떠나셨고 내 기도는 듣지 아니하시는가 보다 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이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포기할 수도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자기를 연단시키시는 것이라 생각된다면, 믿어진다면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곁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 최후를 목격한 사형수는 "이 사람에게 잘못된 점은 없다."(누가 23:41)고 증언하였으며, 십자가를 지키던 로마군 장교 한 사람은 " 이 사람은 무죄다."(누가 23:47)라고 고백하였고, 마가복음의 기자는 "대제사장과 온 의회가 예수를 죽일 조건을 찾았지만 한 가지도 찾지 못했다."(마가 14:55)고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는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내가 죄인이로다."(마 27:3)고 고백하며 자살하였습니다.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소리 내어 막 웁니다. 그런데 그것도 눈치 빠르게 울어야지 울지 않으면 거꾸로 발을 잡아 궁둥이를 때려서라도 울게 만듭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매 맞고 울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냥 울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몸 부림 치다가 나온 것인 양 아기가 웁니다. 그러나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낳느라고 고생하는 엄마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 고통 당하고, 힘들고 어렵게 새로운 경지에 간다고 할 때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 같지만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그 하나님이 더 괴로운 시간입니다. 더 힘든 시간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우리 삶의 현장에 우리 삶의 여정에 흑점 같은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것으로 바꿔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미술 평론가, 사회개혁자인 존 러스킨(1819∼1900)은 파티에 참석하였습니다. 어느날 '값비싼 손수건인데 잉크자국으로 얼룩져 못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부인을 만났습니다. 러스킨은 말없이 그 손수건을 받아 얼룩 옆에 세련되고 우아한 무늬를 함께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얼룩져 못쓰게 된 손수건'은 멋진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났고 부인은 탄복을 했습니다. 그때 러스킨은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망가진 인생의 재활용은 의미 부여에 따라 가능하다는 것을.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면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가 이 얼룩 때문에, 내가 가진 그 상처 때문에, 내가 가진 흠 때문에 "망했다고, 틀렸다고" 함부로 자신을 혹평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새로워 질 줄로 믿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탄식의 자리에서 "아버지 당신의 손에 맡기옵나이다." 그 아름다운 고백으로 고난 주간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때로 고통이 심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우리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더욱이 요즘 같이 어려운 때에는 삶의 현장에서 먹고 사는 것 때문에,일 때문에 "하나님 정말 버리셨습니까?" 탄식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주여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삶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고난주간을 보내는 성도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kt6707&logNo=222980967497&navType=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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