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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복음 16:13-15)

by 【고동엽】 2023. 4. 8.
 
 

고신일 목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Who do you say I am?)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3-15절)

 

<목회기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 찬양대의 마음과 목소리를 받으신 줄 믿습니다. 우리들을 사람으로 오늘을 살게 하시고 예수 믿고 영생을 소망하며 기둥교회에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우리는 바르게 살고 싶었으나, 마음은 아니었으나, 죄 된 끌림에 져서 하나님을 멀리했던 순간 순간들을 회개합니다. 살기 힘들어 남의 양식을 남의 일을,남의 것을 탐내기도 했었습니다.땀흘리기 싫어 남의 노력을, 남의 땀을 노리기도 했습니다.부모님께, 부부간에, 형제자매, 자식에게 잘하지 못했음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더욱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예수 믿는 것 드러내며살지 못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나님, 실망한 마음, 더러운 마음, 낙심한 마음이 새로워 지게 하옵소서.새 믿음과 새 소망을 주시고 말씀으로 새 힘을 얻어 일어나게 하옵소서.이 복된 자리에 믿음이 없어 못 나온 이들, 병들어 나오지 못한 이들,군대에 외국에 객지에 나가 있으므로 오지 못한 이들에게하나님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부족한 종이 설교하지만 역사는 하나님이 하여 주옵소서.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제가 어릴 때 "영희야 안녕, 철수야 안녕, 바둑이도 안녕"이라는 것을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그런 것을 배워 본 적이 있으신 분은 손 한번 들어 보세요. 다 구세대시군요. 요즈음은 인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철수야, 영희야 안녕, 바둑이도 안녕"이라고 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젠 인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사하려면 쳐다 보아야 하는데, 쳐다 보면 때립니다. 우리 교회 학생 중 한 명이 매를 맞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쳐다봤다고 때렸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며 얘기하고 인사합니다. 'Hi, Hello'라고 인사합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인사 안합니다. 안내위원, 헌금위원, 장로님이나 전도사님들에게 조끼를 왜 입힙니까? 그분들이 교회 안내를 하려고 인사하면 '저 아줌마는 누군데 왜 인사하나?'라고 말들을 합니다. 주차장에서 주차위원들이 차를 안내 하려고 해도 '자기가 뭔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고 지시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께 조끼를 입힌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교회에서는 "영희야 안녕, 철수야 안녕, 바둑이도 안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바둑이 같아도 안녕이라고 한번 인사합시다.

  할렐루야!
  오늘도 은혜의 시간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준비된 것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같을 지라도 준비한 자가 어린 아이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12광주리가 남는 풍성한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뵈리아, 요단강 동편의 남부 지역을 치리하던 헤롯 안디바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제 빌립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빼앗았습니다. 그것을 비난하는(막 6:18), 세례 요한을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마 14:3-12). 이것은 앞으로도 자신을 거스리는 언행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처벌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요한이 죽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예수님은 제자들과 배를 타시고 빈들로 나가셨습니다(마 14:13).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몰려들었습니다(마 14:13). 모여든 사람들,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기적을 일으키셔서 굻주린 배도 채워주셨습니다(마 14:14-21).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전하게 되었고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살아 있을 때도 빈 들에 요한의 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다녔었는데 예수님이 또 말씀을 전하니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 다녔습니다. 헤롯 안디바스는 분명히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죽였는데 혹시 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운 마음까지 갖게 되었습니다(마 14:1-2).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방인들이 사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에서 120km떨어져 있는 팔래스틴 북단에 있는 지역입니다. 각양 각색의 종교가 있었고 특별히 바알을 숭배하는 지역의 중심지로서 헬라의 신 판(pan)의 신당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잡신을 섬기는 지역에 가셔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Who do people say the Son of Man is?) 라고 물으셨습니다. 다니엘서 7장 13절에 보면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8장 27절과 누가복음 9장 18절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Who do people say I am?) 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답합니다.

1. "세례 요한이라 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14절).
    그 목잘려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 난 것 아니냐고 얘기 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부활체로 볼 만큼 요한의 영향력은 대단했었습니다.

2. "엘리야라고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14절).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말라기의 예언에 근거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하나님의 최후 심판자가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오리라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옛날 선지 엘리야의 행적과 비슷한 자가 있으면, 그가 예언의 성취로 임한 두 번째 엘리야가 아닌가 짚어보는 습성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오히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자, 일한 자는 세례 요한이라고 누가복음 1장 17절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라고 한 사람도 있었지만 눈물 많은 선지자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14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의 판단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특별한 사람으로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놀람과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말합니까? 혹자는 2000여 년 전 유대 땅에 살던 자로, 반역죄명으로 처형당한 사형수 혹자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던 신통한 사람, 혹자는 사랑을 가르친 훌륭한 선생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겁쟁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에서 조작해낸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던 말을 예수님께 전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또 물으십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는데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뭐라고 말하느냐,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물으셨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답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구경하러 다녔습니다. 세례 요한 처럼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그의 앞에 가면 병도 나아지고 기적도 행하고 먹을 것도 준다는 것을 알 게 된 사람들이 몰려 다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지도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압제 당하던 상황입니다. 지독한 왕의 밑에서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왕을 물리치고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일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제자중의 상당수는 아직도 다른 여러 가지 동기에서 그를 따르고 있던 터였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그를 정치적 지도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이스라엘의 흩어진 마음을 한 데 모아, 참으로 저들이 충심으로 소망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정 국가를 세우실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요관심은 정치적인 것이고, 경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제자들은 그를 훌륭한 도덕 선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그의 진리의 선포나 도덕적 명령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기들의 양심을 정화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그를 매우 특별한 어떤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그런데 "너희들은 왜 나를 따라 다니니? 너희들은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니? 너희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체의, 집단의 고백을 요청하심이 아니라 개인의 고백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You are the Christ,-Messiah the Son of the living God)

① "주는"이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많이 부르는 "주"는 주인(Lord) 혹 "왕"(King)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주"라는 말이 없이 "당신"은 하는 뜻인데 "당신만이 그리스도(the Christ)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② "그리스도"란 말(헬라어)은 히브리어로 "기름 부은 자"라는 뜻으로 "메시야(Messiah)"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왕에게 기름을 부었고(삼상 10:1-16), 제사장에게 기름을(레 8:12), 선지자에게 기름을(왕상 19:16)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은 "만왕의 왕"(계 19:16)이 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히 7:21)이 되시고, "영원한 말씀의 대언자, 선지자"(요일 2:1, 히 8:6, 9:15)로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참 구세주란 뜻입니다.

③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인자(Son of man)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했습니다. 인자로서의 예수님은 최선의 인간, 참다운 인간의 모습과 성질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인자라는 뜻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내가 사람의 아들이다"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다니엘 7장 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하나님의 아들)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말세에 신정(Theocracy)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십니다. 죽은 하나님, 관념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시고 지금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분이십니다.

④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Invisible God)"이 "보이는 하나님(Visible God)"으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시고 "나는 아버지 않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보통 선지자나 훌륭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며 참 사람과 참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영생을 얻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바로 깨달아 아는데서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은 17절에 "네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you, ∼" 라고 하셨습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이 거짓된 사랑이듯이 표현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요즘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 고백이 중요합니다. 정말 사랑하는지는 시련을 겪어 보아야 합니다. 남녀간의 문제도 그렇고 가족간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려움을 겪어 보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 정말 사랑하는 가족, 정말 사랑하는 친구를 알게 됩니다. 한때 일본에서는 정년퇴직을 하면 이혼을 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요즘에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월급을 기다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 때 지킬 수 있는 믿음이 정말 복된 믿음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일 성수하고 몸이 피곤하고 지쳐도 주일 밤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오는 것 그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표현입니다. 제가 지나칠 만큼 주일 저녁 예배를 강조합니다. '교인이 주일 낮예배만 나오면 안됩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저녁 예배도 드려야 합니다.'라고 얘기합니다. 하루를 온전하게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드리기 위해서 저녁 시간에 TV 앞에 앉아 있기 보다는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더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십일조, 감사 생활을 합니다. 내 살림도 어려운데 건축헌금, 선교,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왜 과부의 두 렙돈 드림을 칭찬하셨습니까? 그의 생활 속의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동전을 보심이 아니요 그의 마음, 그 믿음의 고백을 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넜습니다. 사막의 피난 생활입니다. 유랑생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유랑생활 중의 가장 크고 아름다운 천막은 무엇이었습니까? 성막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당시 최고의 건물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유럽이나 미국이나 우리 나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동네에서 가장 크고 아름 다운 집은 교회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은 교회였습니다. 제일 환하고 아름다운 집은 교회였습니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큽니다. 교회가 큽니다"라고 얘기하지만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답다고 잘 지었다고 얘기하지만 여러분들이 눈이 있다면 가까운 곳에 있는 백화점에 한번 가보십시오. 호텔보다도 백화점보다도 못합니다. 지금은 교회의 대부분이 창고 같습니다. 여러분이 앉아 계신 그 딱딱한 의자도 다른 문화 공간의 의자와는 비교도 안됩니다. 교회보다 훨씬 아름다운 시설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 기둥교회의 목표가 이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교회를 짓는다고 예배를, 교육을, 전도를, 봉사를, 선교를 포기했습니까? 교회는 복음을 받은 자들이 모여 예배하는 집이며, 기도하는 집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며 배우는 집입니다. 두 번째로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서의 지역교회입니다. 기지가 확실해야 떠난 배가 돌아오며 재충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기둥교회를 잘 가꾸며 보존해 갈 것입니다. 수리하고 보충하고 지금도 일하지만 빚 갚아가며 서두르지 않고 멋진 일, 하나님 마음에 합하실 일들을 교회를 지을 때 마음 그대로 신앙 고백적으로 할 것입니다. 그 말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좋은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좋은 장로님들, 말없이 따라 주시고 앞장서시는 분들, 좋은 임원들, 성도들, 청년들, 더욱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역사 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태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지금 나라가 어려운지 안 어려운지 경제적으로 힘드는지 아닌지 문제는 서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누구라 생각 하느냐"입니다. 정말 믿고 순종하는 분으로 생각하느냐입니다.

  유명한 곡예사 블론딘(Blondin)이라는 사람이 미국에 공연 온 때였습니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튼튼한 밧줄을 매어 놓고 그 위에서 여러 가지 묘기를 보였습니다. 의자와 테이블과 컵과 컵 받침을 가지고 폭포 중앙에 가서 거기서 그것을 펼쳐 놓고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셔 보였습니다. 벽돌을 가득 실은 외바퀴 수레를 밀고 폭포 저쪽을 갔다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구경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요란하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그가 강변의 한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은 내가 무거운 짐을 외바퀴 수레에 싣고 저 폭포 건너에 갔다올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때 그 사람은 대답하였습니다. "네 믿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그러자 그 곡예사가 제안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당신을 그 수레에 태우고 저 건너에 갔다 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기겁을 하며 대답하였습니다. "안됩니다. 저는 안됩니다." 이 남자가 참으로 블론딘을 믿었습니까? 그가 참으로 블론딘을 믿었다면 그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판단에 '저 사람은 강을 건널 수 있구나. 외줄로 건널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를 믿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예수님에 관한 올바른 신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참 신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과정을 거치고 시험을 쳐서 제도에 의해 신학생, 목사, 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지 아닌지는 그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정말 믿고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아니라면 이 시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 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자꾸 닥칩니다. 그러면 주저 앉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도 나약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자꾸 닥칠수록 더 믿음이 굳세어 지고 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돌아가는 풍차처럼 바람이 세게 불면 더 세게 돌아가는 풍차처럼 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주저 앉지만 어떤 사람은 그 바람을 이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풍랑을 보고 실망하고 좌절하지만 풍랑을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까지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비싼 생선을 먹거나 오렌지를 먹는 일이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라면 조차도 요즘처럼 다양하거나 많은 양이 유통된 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귀했고 그래서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정말 살기 편한 세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슈퍼마켓에 나가면 사시사철 없는 게 없고 외국산 농산물까지 그득해서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다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다량의 상품을 유통시키다보니 상품을 관리하는 수준도 꽤 높아져서 식료품에서부터 야채나 통조림까지 유효기간이 표기되어 있고 그래서 적어도 상한 물건을 사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상품마다 표기된 '유효기간'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소리없이 웃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사람에게도 적용이 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점차 나이가 들면서 '때'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전 3:1-15). 약국에 있는 약처럼 몇 월 며칠까지 라는 표시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도 그 유효기간을 모릅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찾을 때와 잃을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우리 인생의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캔버스에 멋진 유화를 그리듯 그렇게 아름답게 삶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인생이지만 그래서 더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때 더 고백적인 삶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유효기간이 되기 전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고전 10:31), 때마다 일마다(살후 3:16) 우리와 함께 하시는,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께서 순간순간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이때 더 고백적인 삶을 살 게 하여 주옵소서.
더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 되어서 언제 하나님이 부르셔도언제 하나님이 오셔도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소서.세상은 고난의 풍랑이 치고 세상은 고난의 바람이 불어오지만우리의 믿음의 바람개비는 더 세게 돌 게 하여 주옵소서.실망하고 좌절하고 주저앉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옵소서."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믿음의 질문 앞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나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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