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일 목사
찾으셨나이까?
<목회기도>
할렐루야
오른손 들고 옆의 사람과 "할렐루야'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금년 성경학교, 수련회, 학생 행사 등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심야때도 교사, 학생들에게 반복적으로 따라 하라고 시킨 말이 있습니다. "이왕에 건널 강이라면 즐기면서 건너자", 어차피 할 일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마땅히 할 일이라면 기쁨으로 하자는 말입니다.
교회에 오셔서 예배 드리는 분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늘 하던 일이니까 지난 주일에도 교회에 왔었으니 오늘도 습관적으로 왔고 예배시간이 지나면 집에 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앉아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 별로 올 마음은 없었지만 가족들이 교회에 가야한다고 조르니 일주일의 한 시간 예배의 자리에 꼭 앉아달라고 조르는 식구들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 앉아계시는 분도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주일날 한 시간 왔다가야 마음이 편하니까 오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오셨든지 이왕에 드리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 이왕에 절할 것이라면 웃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슴을 펴고 눈을 크게 뜨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시절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디서 자라느냐, 무엇을 보고 자라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 하는 것은 일생을 좌우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린 시절을 어디에서 보내셨습니까? 또 지금까지 어디에서 사시다가 이 시간 오셨습니까?
저는 강화 벌판 해변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강원도 화천, 철원 등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인천과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그후에 서울에서 살다가 부천으로 부천에 살다가 인천으로 인천에서 부천으로 또 부천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미국에서 조금 살다가 다시 부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지역으로 다니면서 그런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경험했고,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전국 어디를 가나 전화하면 나와서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제가 기억하고 있는 나라에 한두명씩 제가 연락하면 나와서 만나줄 만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들속에서 좋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힘들고 어렵고 눈물 겹고 탄식하며 후회하고 절망감에 빠졌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동행하셨음을 저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맡긴 자의 삶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가 왜 절망하지 않습니까? 혹 절망했다할지라도 왜 곧 회복되며 소망속에 살 수 있습니까? 믿고 맡기니까 절망치 않는 것입니다. '믿고 맡긴다'는 말은 선반에 얹어 놓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반에 얹어 놓는 것입니다. 짐은 나의 짐이고, 우리의 짐입니다. 그러나 그 짐을 선반에 얹어 놓으면 그 짐이 나를 짓누르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교회에 가지고 오셨다면 오늘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하나님의 편에 얹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안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많은 활동을 하셨고 그 많은 활동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소개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외계인처럼 이 땅에 나타난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평범한 아이처럼 성장하셨습니다. 비록 많은 전설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이랬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저랬다'하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이고, 전해내려오는 것처럼 만든 이야기일 뿐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이 성장하여 세례 받은 후 공생애를 시작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도 되어 있고 영문성경에도 보면 분명히 "이것이 유일한 첫 번째 기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 first of his(His) miraculous signs, ∼"(요 2:11).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보통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신 예수님에 대해서 특별하게 소개된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습니다. 즉 예배의 자리로 모여야 했습니다(신명기 16:16).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도 해마다(every year)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한해도 빼지 않고 해마다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유월절 의식을 마치고 되돌아 갈때 부모와 함께 가지 못하고 대열에서 이탈했습니다. 그때의 기록을 보면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여행을 하였고, 어떤 무리들은 친척들끼리, 어떤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끼리 걸었고, 또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무리를 지어서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떠나 하룻길을 갔을 때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과 동행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매년 다닌 예루살렘 길이고 12살이나 되었으니 동행하고 있는 줄 알고 갔으나 하룻길을 간 후에 예수가 동행치 않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잃어 버린 채 하룻길을 갔다는 표현은 보통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만큼을 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룻길은 28km에서 48km까지 그 거리가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한 팀을 이루어 가는 첫날의 여행 거리는 평소의 거리보다 더 짧았습니다. 이것은 거의 예외없이 행해지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관습이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려는 무리들은 여행 준비를 끝내고 천천히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출발 장소로부터 4.8-12.8km 정도의 지점에서 휴식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날 밤을 보냅니다. 이런 관습이 정착된 이유는 만약 실수나 건망증으로 어떤 물건을 놓고 왔을 때 쉽게 돌아가 그것을 찾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다음날 출발하는 시간에 늦지 않게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북쪽을 향해 여행을 하는 무리들이 첫째 밤을 보내는 장소는 고대에 비(Bee)나 비로드(Beeroth)라고 불렸던 '엘버치(el-Birch)였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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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찾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근심'이라는 단어는 음부에 떨어져 심판받는 영혼들의 고통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눅 16:24-25). 고통중에 심판 받는, 다시 말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 것 같은 그런 고통 중에 그런 근심 중에 예수님을 찾았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어 버려 본 기억이 있는 분들은 알 것입니다.
저도 지금은 중학교 3학년생인 아들이 막 걸을 때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아이를 잃어 버렸습니다. 너무 맛있게 먹다 보니 애가 없어졌습니다. 제 아내와 같이 밥을 먹다가 잃어 버렸는데 저는 아내에게 애도 하나 안봤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본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때 그 짧은 시간 얼마되지 않아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가 얼마나 근심하며 찾았느냐 하면 사흘동안이나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 앉아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성전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부모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성전에서 선생님들과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12살난 예수님의 지혜를 기이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묻습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다." 그런데 성경이니 그렇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흘 동안 찾아 헤매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미소를 지으며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근심토록 하였느냐?"라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소리를 버럭 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소리를 지르고 이렇게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태연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이중적인 관계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친은 그 이중적인 관계를 사흘만에 찾은 예수님의 답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눅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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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육체적인 인간관계와 책임입니다.
예수님이 부모를 근심케 했고, 부모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라고 해서 예수님이 불효자가 아닌가하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허락되었던 성전에서의 선생님들과의 대화에 빠졌었고, 그것은 그당시에 보편적으로 있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모님이 내가 성전에 있는 줄로 알겠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찾으러 온 부모와 함께 즉시 나사렛으로 내려갔고 51절에 보면 "순종하여 받들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52절에 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린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실 때, 죽음 앞에서도 어머니의 신변을 염려하며 제자에게 부탁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요 19:27).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가족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그럴 듯한 교회의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봉사를 많이해도 가족을 소홀히 여기는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래 믿었느냐, 봉사를 많이했느냐, 직분이 있느냐를 먼저 따지기 전에 내 믿음이 바르게 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누구든지",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되었든지, 오래되었든지, 직분이 있든지 없든지, 초신자로부터 목사에 이르기까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믿는 척해도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는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힘든 점도 많고 어려운 일도 있겠지만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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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은 성격과 원리가 다른 두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0절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살고 있습니다. 시편 100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한 믿음의 집에 식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집에 있는 식구들은 가족끼리 화목하며 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한 믿음의 집, 한 교회에 있는 사람이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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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는 몸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손가락이 컴퓨터도 치고 피아노도 치고 붓글씨도 쓰고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한다고 해도 몸에 붙어 있어야 멋있습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지체로서 몸에 붙어 있지 않겠다고 하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혼자 아름다운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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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는 제자리에 바르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코가 전면에 있어서 너무 바람도 많이 맞아 피곤하다고 뒤로 옮겨 붙으면 얼마나 이상하겠습니까? 뒷사람이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 냄새는 잘 맡을지 모르지만 얼마나 흉측하겠습니까?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붙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지체는 물리적인 자리에도 잘 지켜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자리에도 바르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입니다. 몸인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은 이 영적인 교회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예배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바른 자리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 살면서 영적으로 있지 말아야 할 곳에 함부로 가면 그것은 보기 싫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의 지체입니다. 그렇다면 있어야 할 곳에 꼭 있어야 하고 바르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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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끼리 귀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14:13)
-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골3:17)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3:13)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1-33)
-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이렇게 영적으로 형제된 사람끼리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12살의 예수님처럼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을 것을 모르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있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눈 앞에 있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완성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을 했다고 해서 교회를 다 지었습니까? 다 못지었습니다. 아니요 이 세상에서 완공은 없습니다. 이제 앞으로 유리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붙일 것입니다. 그것을 다 붙인다고 해서 교회를 다 짓는 것입니까? 완공되었다 싶으면 이곳에서 터지고 저 구석에서 터지고 수리해야 할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닙니다. 미완성입니다. 보이는 건물인 교회만 이렇습니까? 보이지 않는 교회도 에베소서 2장 22절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건전하게 잘 될 일을 서로 얘기하는 것은 좋지만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공사중인 곳에 가서 '아이구 왜 이렇게 지저분해, 왜 이렇게 만들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완공이 되어야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미완성입니다. 고신일목사도 미완성입니다. 되어가는 중입니다. 교회의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다 미완성입니다. 지어져가는 중입니다. 완전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만 비로소 완전한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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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1. Region : 지역, 경계, 영역 즉 들어가야 되는(Enter into)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나라에 다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Reign :치세, 영향력, 통치, 지배, 주권 즉 이루어야 하는(ruling power of God,finger of God, has come than healing)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성전에 주님이 들어와 계시고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거룩한 주일 예배를 드린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다 들어와 계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들어가 계신 줄 믿지만 다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머니가 "왜 우리에게 근심하고 찾게 했느냐?"고 물으셨을 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은 깨닫지 못한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품에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전에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을 향해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어찌하여 나를 염려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품에 있는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망하고 좌절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침통하게 여기고 불쌍하게 여기는 그 앞에서도 "어찌하여 나를 불쌍히 여깁니까? 내가 하나님의 품에 있는데".
여러분, 예수님처럼 선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가치하고 쓸모없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 것도 무가치 한 것이 없습니다.
인도양의 모리티우스라는 섬에 이상한 새가 있었습니다. 그 고기는 너무나 질겨 먹을 수가 없었고 그 새는 칠면조처럼 크지만 날지 못했습니다. 부리는 휘어져서 먹이를 잡아 먹지도 못하고 해변가에서 밀려 들어오는 죽은 물고기를 먹는 새입니다. 그런데 17세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 섬에 들어가보니 그 도도새(DoDo)가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도도새는 잡아 먹을래야 고기의 맛도 없고 그래서 아무런 쓸모 없는 도도새를 포르투갈인들이 사냥개를 풀어 모조리 포획하여 죽였습니다. 그런데 도도새가 멸종된 후 그 모리티우스 섬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리티우스 섬에서만 자라는 '칼비리야'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죽게 되면 다시 회복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식물학자들이 칼비리야의 멸종 원인을 조사하게 되었더니 놀랍게도 칼비리야의 씨앗은 도도새가 삼켜서 위에 들어갔다가 내장을 통해서 나온 뒤에야 싹이 트게 되지 그냥은 도저히 싹을 틔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칼비리야의 열매를 도도새가 먹고 그 배설물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는 것이며 그 씨앗이 칼비리야 나무로 성장을 한 것이었습니다. |
여러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귀중한 존재입니다. 다 필요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길거리에서 찾으려고 하고 자신의 주변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에 가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있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교회로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 가정, 주님을 모시고 살면 그곳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십니까? 왜 나를 염려하셨습니까? 왜 나를 근심하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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