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일 목사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 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마태복음 9장 27-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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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
지금 제가 들고 있는 것은 '주민등록증'입니다. 저의 것입니다. 여기에는 제 이름이 한글과 한자로 되어 있습니다. 생년월일, 본적, 주소, 호주 그리고 병역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플라스틱 카드로 바뀐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다 가지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그렇게 감동 없이 이것을 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 가운데 특별히 한국국적을 갖지 못한 교포들은 이 주민등록증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미국에 가서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시민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영주권입니다. 미국에서 영원히 살아도 좋다는 증명서입니다.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갖지 못한 사람이 외국에서 사는 사람을 가리켜 '불법 체류자'라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람가운데 미국에 불법 체류자가 많습니다. 제가 주민등록증을 가질 수 있었고, 여러분들이 이런 신분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라를 갖지 못했다면 이런 증명서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강단에는 나라의 꽃인 무궁화가 꽂혀 있습니다. 내일은 한때 나라를 잃었다가 잃은 나라를 다시 찾고 싶은 열망을 표출한 것을 기념하는 '삼일절(3·1절)'입니다. 우리 모두 특별한 애국자는 아닐지라도 이런 때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어리석어 보이기만한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이 시간만이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이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옵소서. 청소년을 비롯한 성인들의 도덕적인 타락, 그리고 이 민족의 분단된 아픔을 주여 하루속히 풀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계시다면 감사하시기를 바라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한숨이 나고 캄캄하다 할지라도 살았음에 감사요, 뜬 눈으로 볼 수 있음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저를 쳐다볼 수 있고, 제가 여러분을 볼 수 있는 그것만 해도 우리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 눈가지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큰 아들의 졸업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졸업식때 성적표를 받았을 것 같아서 성적표를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을 뭐하러 보시려고 하냐면서 안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져오라고 했더니 성적표를 가지고 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성적표를 내놓기 전에 "아빠 좋은 사람 눈에는 좋은 게 보이는 거에요. 설교하신대로 좋은 것, 잘한 것만 보세요." 라고 말합니다. 제가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설교한 대로 보라고 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우리가 뜬 눈 가지고 무엇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그 시대에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소경이 많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중해 연안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사막에서 부는 그 모래바람, 그리고 그곳은 석회성이 많기 때문에 석회성 먼지와 합쳐서 눈을 멀게하는 그런 요소가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햇빛이나 먼지로 인해 시력을 나쁘게 하고, 시력을 잃게하는 요인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두 소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씩 짝을 지어 다니면서 구걸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지, 아니면 눈으로 보고 살다가 환경에 의해서 눈이 나빠져 눈이 멀게 되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소경이라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다시말해서 소경이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어갈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을 못보는 것 때문에 약을 찾지도 않고 의사를 찾지도 않고, 눈을 뜨기 위해서 비법을 찾아 다니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늘의 소식을 전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신비한 소리를 하는 신기한 일을 하는 그런 예수라는 청년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들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는 중에 믿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이미 있는 믿음도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좋은 소식을 전하고, 좋은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것은 행복입니다. 자신이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하는 소리가 다르고, 들리는 소리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자장가로 듣고, 어떤 분은 가슴 뜨거운 말씀으로 받아 아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물을 먹고도 소는 젖을 내지만, 뱀은 독을 냅니다.
요 임금이 '허유'라는 사람을 불러서 천하를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허유가 "못들을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천에 가서 그 말을 들은 귀를 씻었습니다.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 있던 소부가 "왜 귀를 씻느냐"고 물었더니 "못 들을 소리를 들어서 귀를 씻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을 먹이고 있던 소부가 소를 잡아 끌어 내면서 "더러운 소리를 들은 귀를 씻은 물을 우리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세이식' - 귀를 닦는 의식은 우리 선조들의 문화속에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더러운 소리, 지저분한 소리, 부정한 소리는 안듣겠다는 말이고,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귀를 씻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소리를 많이 듣고 사십니까?
오늘 본문의 소경들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예수에 대해서 알았고, 예수에 대해서 듣고 알고나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들었던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소경들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를 쫓아갔다고 했습니다. 아스팔트가 포장되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평평한 길도 아닐 것입니다. 사막지대입니다. 그런데 소경이 예수님을 쫓아갑니다. 아마 넘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소리를 지른 것을 보아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소경이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에 대해 '예수님이 들으라고 질렀겠지'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경들을 불쌍히 여기기 보다는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무슨 죄가 많아서 저런 장애자가 되었을까, 성경에도 나옵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누구의 죄로 인하여 저렇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가족 중에 그런 장애인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그리고 집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쫓김을 당해 구걸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곁에 죄인이라고 갈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해 소리지르고 예수님을 향해 쫓아갑니다.
뭐라고 소리를 질렀냐하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메시야여, 왕이여"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정치상황이 어떤지 아십니까?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그냥 왕이 아닙니다.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이여, 메시야여, 구원자여"라고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잡히면 죽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은 무슨 뜻이냐하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왕이시여, 구세주여 우리를 살려 주세요. 한번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소경들의 표현처럼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명상을 말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큐티(QT)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되새기고 하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잘 들어야 합니다. 큐티가 전부가 아닙니다. 무슨 큐티가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적인 묵상, 명상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표현되어야 하고, 드러나야" 합니다. 소경들이 소리 질렀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도, 사람앞에도 신앙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구원도 표현해야 됩니다. 시인해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믿는 자의 선행도 표현되어야 합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라고 했고,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했습니다.
드러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행도 무조건 남모르게 해야만 되는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남모르게 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이 알 게 한 선행은 하나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34장 16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다 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한 쪽만 보고 성경전체인 양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에 보면 분명히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마태복음 5장 16절에는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너희 선행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서 사람들이 그 착한 행실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될 일도 있지요. 그러나 드러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소경은 예수에 대한 소리를 들었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그 가진 믿음으로 소리를 질러 자신들의 필요를,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금방 들어주신 것 같지 않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는데 예수님이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항상 어디에 가실 때는 사람들이 항상 많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병 낫기를 원하는 환자를 위해서 형제, 친구들이 지붕을 뜯어서 예수님이 있는 곳에 내렸던 기사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죄인 취급을 받았던 이 소경들이 집으로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조금만 어쩌면 삐지고, 돌아서고, 앞에 장애물만 있으면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응답이 없으면 기도하다가도 포기해 버립니다. 신앙생활은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축복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축복된 삶을 살게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소경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Do you believe that I am able to do this?) 길게 되어있지만 간단하게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믿느냐, 날 믿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순간에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돈 있니? 공부는 어디까지 했니?, 어느 집에 사냐? 고향이 어디냐? 나이는 몇살이냐?" 그런 것을 물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믿음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늘 예배를 위해 교회에 찾아나온 여러분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는지, 여러분들이 믿음 가지고 살고 있는지를 하나님은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믿음이 있는가를 우리 주님이 물으셨고, 소경들에게 답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소경들이 뭐라고 답했습니까?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가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 말은 무슨 사극에 나오는 대사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감마마 앞에서 '예 그러하오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소경이 막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 앞에 찾아오고, 사람들이 막 '이 죄인들이 여기 오느냐'는 방해의 소리도 듣고, 집에 찾아 들어가서 '너희가 믿느냐'라는 물음을 들었는데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문 성경을 찾아 보고, 영문 성경을 찾아 보니 이것은 상투 틀은 할아버지들이 폼나게 번역한 것입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Yes, Lord"(예 주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믿느냐?', '예 주님,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급하게 답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라는 이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너무 멋있습니다. 너무 엄숙합니다. 너무 폼잡고 있습니다. 기도도 형편이 좋을 때 '자비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미사여구가 많지요, 급해 보세요. "주여"라는 한마디로 끝입니다. 더 이상 뭐라고 말합니까? 여러분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신앙생활할 때 너무 격식에 얽매이고, 너무 형식적이고, 너무 폼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의 주보도 이 주일날 예배순서가 찬송가 다음에 뭐고, 그다음에는 뭐고, 하는 것을 조만간 없애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도 '주의 인도하심따라' 드려야 하는데, 요즘엔 '주보인도하심따라'드리는 것입니다. 너무 격식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소경들이 예수님 앞에서 '너희가 믿느냐?'하고 물으실 때 "예 믿습니다"라고 다급하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지십시다. 간단해져야 합니다. 육체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달려올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해 너희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소경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보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모여 예배를 드리고,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원래 나는 소경이지, 저 사람 만난다고 별거 있어?'라고 했다면 소경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쉽게 얘기합니다. '난 원래 이래요, 난 타고 나기를 이렇게 타고 났어요.'라고 합니다. 사업의 어려움을 겪어서 다 잃어 버렸습니다. 이제 이렇게 살다가 죽는거지라는 자세는 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저는 지난 번에 미국에 가서 저녁 시간에 프로농구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서는 농구하는 것을 볼 시간이 없어서 잘 보지 못했는데 거기서 농구 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조그만 사람이 농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NBA농구입니다. 미국 프로농구는 키가 2미터가 넘는 사람들이 대개 나와 농구를 하는데, 조그만 사람이 거기에 나와 농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아마 고등학생이 거기에 껴서 연습게임을 하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미국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저 사람 모르냐고 합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그 사람은 진짜 선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암만 봐도 저보다 작을 것 같아서 나보다 작은 것 같다고 했더니 저보고 키가 얼마냐고 합니다. 5피트 9인치 즉 1미터 75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5피트 7인치도 안된다고 합니다. 저보다 더 작은 사람이 2미터가 넘는 사람들 틈에 껴서 농구를 하는데 얼마나 농구를 잘하는지 돈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보그스(Bogues)'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때까지 키가 커야만 농구를 하는지 알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농구를 할 걸 그랬습니다.
우리는 쉽게 단정지어 버립니다. '이런 경우에는 안돼. 난 끝났어'. 그러나 소경들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가슴속에 담고 믿음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 참으로 우리가 들어야 될 소리를 듣는 삶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생활속에서 용기 있게 믿음을 드러내며, 표현하고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삶과 주변 조건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고백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향해서도 함부로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내 자식은 안돼. 넌 틀렸어' 누구맘대로 안됩니까? 누구 마음대로 틀렸습니까?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 영적인 소경에서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했을 때 아랍나라의 군사밖에 보지 못했으나 영적인 눈을 뜨고나서 하나님의 군사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신령한 눈을 뜨시고 새로운 마음 가지고 주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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