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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태복음 26장 36-46절 )

by 【고동엽】 2023. 4. 8.
 
 

고신일목사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 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26장 36-46절)

 

 <목회기도>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그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심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을 앞둔 종려 주일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옵소서.
예수 믿음으로 주와 동행하는 삶을 원했으나 연약한 저희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지 못했음을 회개하오니 하나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깨끗케 되고 새롭게 되는 날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귀한 예배에 자리에 군대에 나가 있음으로, 객지에 있음으로, 외국에 있음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여기에 참석치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에게도 평안함을 주시고,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멀고 가까운 곳에서 교회를 찾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처음 나온 사람, 방문한 사람 모두에게 신령한 은혜가 임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순서순서를 통해, 장식을 통해, 사람을 통해 은혜받는 시간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 질렀던 날입니다(요 12:13).
 
 호산나(Hosannah)는 히브리어로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그 본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시 118:25, 삼하 14:4, 시 20:9, 마21:9, 막 11:9,. 요 12:13)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은 당시에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먹는 것이 넉넉치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는 것을 아주 귀중히 여겼습니다.  당연히 의료장비라든지 의약품이 충분히 있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때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풍랑을 잔잔케 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신비로운 일들을 행하던 것을 사람들이 봤습니다.  젊은이만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 젊은이만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로마의 압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록 나귀를 탔지만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오는 예수를 향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 개선장군이나 왕에게나 흔들어대는 종려나무가지를 땅에 펴고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무엇인가 큰 일을 하실 분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일주일동안을 '고난주간'이라고 하고 고난주간에는 경건하게 엄숙하게 보내며 생일잔치나 결혼식 또는 즐기던 파티를 전주간이나 다음 주로 미루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오늘 본문(마 26:36-45)에 보면,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분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자연을 지배하는 기적을 행하시던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지만, 자신이 가르치신대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 자기와 싸워 이기기 위해 특별한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한 후에, 자기를 포기한 후에 자기를 굴복시킨 후에 십자가를 들 수 있다고 가르치신 대로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1. 어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에 갔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시는 그 자리에 다 가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예수를 팔기 위해, 예수를 잡기 위해, 예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마 26:47).
신앙생활하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어디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하는 것이기 때문에(요 14:13-14) 언제든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가시는 겟세마네에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6장 24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변함없는 믿음, 변함없는 사랑, 변함없는 순종,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어디 그렇습니까?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 은 30냥 같은 가치를 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지만 '내가 이때 이 일만 하면 은 30냥 같은 것이 생길텐데' 하는 그런 유혹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예수 믿지만 '이것만 해보면 좋을텐데'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조차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럴 때는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떨어져 있으면서 예수님을 팔아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 그런 순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2. 어떤 제자들에게는 앉아 있으라고,
    어떤 제자들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하는 장소로 11명의 제자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정확히 11명이라는 숫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유다 외에는 다 참석한 것으로 모든 정황을 보면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초입에 앉아 있으라 하신 8명의 제자에게도 기도하라는 뜻이며, 가만히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란 뜻은 아닐 것입니다.  좀더 데리고 가신 3명에게 깨어있으라 하신 것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11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자리 배정하시는 대로 따랐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특별히 선택받지 못한 8명의 제자들은 상대적인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왜 우리들은 여기에 앉아있으라고 하고 왜 저 세 명만 특별히 가깝게 하시지, 아니 왜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왜 세 명만 데리고 다니는거야?'라고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를 더 데리고 갔습니까?  예수님은 가끔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세배대의 두 아들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이 번번이 이 세 명만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 마태복음 26장 36절에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하시고,
- 37절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 38절에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고 하셨습니다.
① 마태복음 17장 1절 - 변화산에 올라갈 때
② 마가복음 5장 37절 - 회당장의 집에 가실 때
③ 마가복음 13장 3절 - 감람산에서(이 때는 3명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심)
④ 마태복음 26장 37절 -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런데 오늘 겟세마네 동산에 갈 때도 8명은 앉아 있으라고 하고 세 명은 특별히 더 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가끔 '왜 쟤만 저 일을 하지?'  자신이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여덟 제자들은 불평하거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앉아 있으라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 중에 자리 때문에 바보되고, 자리 때문에 원수되고, 자리 때문에 한심해 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큰 자리를 맡기면 줘도 능력이 없어서 감당하지 못하고 작은 자리를 주면 시시하다고 안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안합니다.  여러분 자리가 어떠면 어떻습니까?  봉사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궂은 일이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구석진 곳에 보이지 않게 있으면 어떻습니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면"(히 12:2)됐지 자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선택받았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이 자신의 고통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에 보니 예수님은 고통스런 자신의 심경을 여덟 명의 제자에게는 얘기하지 아니하시고 세 명의 제자에게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하십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인데 왜 여러분들은 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기도요청 카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것을 줄 때마다 못 받거나 안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한 목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에 가시다가 여덟 명은 여기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세 명은 조금 더 데리고 가서 앉혀 놓고(마 26:39, 막 14:35), 누가복음에 보니 돌 던질 만큼 거리에 예수님이 따로 가셨습니다(눅 22:4).  그리고 거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장면을 다 살펴보면 예수님은
  - 무릎을 꿇고(눅 22:41)
  - 땅에 엎드리어(막 14:35)
  - 얼굴을 땅에 대시고(마 26:39),
  -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마 26:44).  
 
가끔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 그럴 듯한 폼을 잡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성경도 보지 않는 사람이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장면은 무릎 꿇고, 엎드려서 얼굴을 땅에 대고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기도
① 육신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서, 자기 중심의 기도를 먼저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if it is possible,…) 이 잔(cup)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이 '잔(cup)'이 무엇입니까? 잔은 컵, 받아든 잔입니다.  받은 잔은 받아든 사람이 마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십시오.  안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예수님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②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will)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우리들의 필요한 대로 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도 해 주세요.  저것도 해 주세요.  나 이거 하고 싶어요.  나 이거 하기 싫어요.  나 이런 것 되고 싶어요." 라고 마음껏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③ 낙망치 않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낙망치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되지 아니하니까 한번 기도하고 두 번 기도하고 똑같은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셨습니다(마 26:39, 42, 44).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답을 듣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낙망치 않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시편 40편 1절 말씀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는…" 기도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최선을 다한 예수님의 기도는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④ 하늘로부터 사자(angel)가 나타난 돕는 기도였습니다(눅 22:43).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기도하는 것을 도와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지극히 적은 어린아이 하나도 하나님을 뵈옵고 기도하는 천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분이 계신 것을 믿습니까?  성경에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만 하면 나와 함께 계시기로 약속하신 성령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적은 어린아이 하나를 위해서도 하나님 얼굴을 뵈옵는 천사가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 때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하는 성령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시 118:6)라고.  그러나 내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지 않으면 여호와는 내 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예수님 처럼
- 내 생각을 아뢰며
- 그러나 하나님의 뜻(will)을 구하고
- 낙망치 말고 기도하며
- 주의 도우심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실 때
3. 깨어 있으라고 명 받은 제자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육신이 약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졸립다는 이유로 자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부름 받은 소명감도, 부름받은 감격과, 감동도, 감사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덟 명을 저 아래에 놔두고 세 명만 따로 불러서 특별히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한 부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동도 없이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다 와보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도해야 하는 큰 이유는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무너질 때, 실패할 때, 절망할 때가 언제입니까?  시험에 들 때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일들이 시험을 당하게 하고, 기도를 막게 하고, 사랑을 막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막아버립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① 유혹해 오는 죄악의 시험(창 3:1-6)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거스리게 하는 죄의 유혹을 말합니다.
 
② 엄습해 오는 고통의 시험(욥 1:6-2:13)이 있습니다.
    욥의 시험입니다.
 
③ 침투해 오는 마귀의 시험(벧전 5:8)이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④ 연단키 위한 시련의 시험(창 22:1-) 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입니다.
 
⑤ 맘(속)에서 나는 정욕의 시험(삿 16:16)이 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는지 알고 싶어 했을 때 삼손이 맘 속에서 번뇌한
    유혹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깨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사이좋은 부부 사이를 깨는 유혹도 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 믿음 좋은 가정의 행복을 깨는 유혹도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욕심 때문에 생기는 유혹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욕심입니다.
 
사람이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세상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주변에도 여전히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배암은 있습니다.  유혹합니다.  "한번만 해봐, 별거 아니야, 남들도 다 하는거야" 우리들 주변에 우리를 실족하게 만들기 위해서 유혹하는 에덴 동산의 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 14-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하면서 드는 시험의 대부분은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지게 하기 위한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연단을 위한 시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3절 "내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장 13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을 연단키 위해 시험을 하시고(test), 시련을 주시지만(trial)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덫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 빠지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시험하여 악한 일에 빠지게 했던 뱀들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삶의 현장에도 득실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우글거리는 세상에, 사탕 바른 쓴 나물이 쌓여 있는 세상에, 교묘히 위장한 위험스런 덫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이 세상에,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이 세상에,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선택의 자유를 주셔서 이 길로 가야할지, 저 길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진정한 용기와 비겁, 관대한 마음과 이기심, 참된 사랑과 거짓된 아첨을 분간하기 어려운 이 세상에, 오늘 우리가 걸어가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은 마치 빛과 어둠이 뒤섞여 버린 엉망진창이 된 이 세상에, 다시 말해 수단만 난무하고 목적을 상실해 버린 이 어려운 세상에,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바르게 서 있으려면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와 바램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것, 쉽게 지치는 것, 피곤한 것, 아픈 것, 부족한 것…등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줄 알고, 쉽게 지치는 줄 알고, 피곤하고 병든 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연약한 것, 쉽게 지치는 것, 병든 것 때문에 시험에 들고 그것 때문에 실족하게 됩니다.  연약한 것, 부족한 것, 그것은 오히려 더 기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사람도 병들었습니다.  아팠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때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유창하게 못해도 좋습니다.  미끈하게 뽑아내지 못해도 좋아요.  품위없이 해도 괜찮습니다.  안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쟤는 기도를 왜이리 요란스럽게 해 그냥 소리를 질러가면서 '주여 주여' 하나님이 귀먹었냐?"라고 지성적으로 예수를 믿어야지, 점잖게 그게 뭐냐고 비난합니다.  소리 질러 가며 기도하는 사람은 또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하는거야 마는거야"라고 비난합니다.  여러분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하는 사람은 조용히 할 수 있도록 두고 소리 지르는 사람은 소리 지르게 두세요.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사람은 다급해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서 의사 앞에 앉아서 '머리가 지끈 지끈 아프고요, 배가 살살 아파 죽겠네요'라고 작게 얘기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괜찮은 사람입니다.  병원에 가서 '간호원 미치겠네'라고 소리 지르는 그 사람은 죽게 된 사람입니다.  저도, 병원에 심방가면 얼마나 점잖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아프세요?  기도하세요." 아주 점잖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님이 쓰러지시는 것을 보고 앰블런스에 싣고 병원에 가서 저는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뭐하는 거야 지금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뭐하는 거야  확인을 해야지", 아마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제가 목사인 것을 알면 '뭐 저런게 다 있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에 대해서 비난하지 마세요.  비지성적이라고 함부로 얘기하지 마세요.  기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4. 깨어 있으라는 명을 받은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깨어 있으라는 명을 받은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한번 와서 깨어 놓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는데, 또 가서 기도하고 와보니 또 자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기도하고 와보니 그때도 또 자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41절에 보니 제자들이 자다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렇게 점잖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라 자"라는 말입니다.  '그만이다'라는 말은 영문성경에는 "enough!" 지금의 말로 "됐네. 그만하면 됐다"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자다가 일어나 예수님께 뭐라고 답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으니까 "자라자.  됐다, 됐네. 자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래 있기를 원하셨습니까?  단지, "한 시(one hour) 동안", 잠시동안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기도와 연합하는 특권을 잠으로 잃어 버렸습니다. 피곤하고 약하다는 자기 입장만 생각함으로 영적으로 중요한 일에 소외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은 쉽게 내 입장만 생각합니다.  "주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졸렸는데요 뭐"  우리들의 핑계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 책을 보니 이런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 오는 어린이에게 엄마가 오백원 짜리 동전 두 개를 주면서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하고 하나는 주일날이니까 오늘은 사먹지 말고 내일 학교 갔다 와서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동전을 양손에 쥐고 교회에 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손을 쫙 펴니 돈이 데구르르 굴러갔습니다.  하나는 찾았는데 하나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시궁창 하수구가 하나 있는데 아무리 봐도 그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돈을 주워 든 아이가 고민합니다.  '이게 하나님 걸까?  내 걸까?'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건 내 거예요.  하나님은 저기에 있는 것 찾아 가지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잠시동안, 한시동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편한 대로 해석하고 우리 편한 대로 판단하고 우리 편한 대로 자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는 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정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신앙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데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벧전 5:8)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가 잠시 동안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오늘 예배 드리는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기  도 >
전능하신 하나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물으시는 그 질문이 겟세마네 동산에 그 제자들에게만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을 향하여 물으시는 물음인 줄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답하기 원합니다.  주여 깨어 살게 하여 주옵소서.  깨어 살게 하여 주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육신이 약하기에,
깨어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kt6707&logNo=222980967497&navType=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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