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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주자의 고백(디모데후서 4 : 1~8)

by 【고동엽】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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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주자의 고백(디모데후서 4 : 1~8)


인생을 무엇에다 비유해서 나타내어 보려고 하는 것은 모든 시인들의 같은 심성인 줄 압니다. 성경에서도 인생을 여러 가지로 비유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에다 비유하기도 하고,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라고도 했으며,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인생을 농부에다 비유했으며 때로는 싸움터에 나가 있는 군인에다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 있는 비유는 경주자 비유입니다. 그의 서신 가운데 보면 여러 번 거듭해서 인간을 경주자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인생을 한 달리 경주자에다 비유하고 있는데, 이 고린도는 올림픽 경기의 발생지인 아테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이 경주자의 비유는 무엇보다 잘한 비유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으로 읽은 디모데후서가 그의 마지막 편지인 것 같습니다. 나이로 보나 건강으로 보나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서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의 옥중에서 자기의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편지이기 때문에 이 편지는 더욱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 누구든지 마지막 말은 가장 진실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를 사도 바울의 유서라고도 말을 합니다.
마지막 유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평생 가졌던 말, 또한 하고 싶었던 말, 또 평생 목적으로 삼았던 그의 철학, 이것이 마지막에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는 그의 모든 말의 요약이요 또 가장 귀중한 내용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의 가장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그 무엇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이 마지막 말 한 마디만은 자신에 대한 말이며 어느 사람의 교훈을 인용한 말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의 개인적 신앙과 생각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후서는 더욱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생도 하나의 경주로 보았습니다. 한 경주자의 팽팽한 긴장 관계로 일생을 살았고 또 마지막에 그렇게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을 합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라고 하는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경기장의 코스를 말하는데 이것은 달려갈 길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출발점도 중요하고 그 코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 골인입니다. 한 사람의 경주자로서 자기의 코스를 유감없이 완수했다는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그리고 그는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기약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인생의 시작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마지막도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인간의 마음대로 연기 신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모양으로 인생이 끝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마음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뜻하지 않게 갔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갔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자기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으며 그 앞에는 의로우신 재판장이 있다고 합니다. 심판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필름을 보는 것처럼 또한 녹음기를 돌려서 자기의 음성을 들어보는 것처럼 일생 동안 지나온 자기의 생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심판을 받을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경주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경주자로서 충실했노라고 마지막 고백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경주자로서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을 늘 반복해서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목표입니다. 목적과 목표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목적은 추상적인 것이요 목표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 목적에 따르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6절에서 내가 달려 갈 때에 향방 없는 자같이 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방향과 목표가 분명했다는 말입니다.
신문을 읽다 보면 가끔 나침반이 고장나서 배가 표류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됩니다. 그 조그마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나침반 하나가 고장이 나면 배가 아무리 크고 좋아도 또한 속력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동차에다가 조그마한 나침반 하나를 달아 놓고 있습니다. 간혹 제 친구들이 제 차를 같이 타게 되면 이 좁은 땅 덩어리에서 동서남북을 구별하지 못할까 봐 나침반을 달고 다니느냐고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설명은 대단히 철학적입니다. 나는 이 나침반을 볼 때마다 너는 지금 어디로 가느냐? 이대로 가다가 죽어도 후회 없는 길을 가고 있느냐고 자신에게 묻고 있노라고 대답을 합니다.
되는 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떳떳한 걸음을 걷고 있습니까? 이대로 가다가 여기서 멈추어도 후회 없는 걸음을 걸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포로로 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그의 뜻대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길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 절대적 순종으로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중간에서 그 목적을 변경하거나 또 방법이 목적을 배반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을 보면 좋은 목적을 세우고 가다가 중간에서 변경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공과 실패가 여기에 있습니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감에 있어서 변동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것 한번 해 보다가 되지 않으면 저것 한번 해 보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많은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외국 유학생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학교마다 기웃거리며 이 과목을 할까 저 과목을 할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아까운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다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비단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는 일이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목표에 일치한 오늘 하루를 살았는지? 세상에 태어난 근본 목적과 일치한 오늘을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에서 한 발자국도 옮겨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목표에서 이탈하는 일 혹은 반대로 사는 일 혹은 멀리 떨어져서 방황하는 일이 없었느냐, 또한 목적은 머리 속에서 추상화되어 버리고 행위는 정반대로 사는 이율 배반적인 생을 살지 않았느냐고 자신에게 한번 깊이 물어 보아야 될 줄 압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며 적당하게 스스로 정당화 혹은 합리화하여 가면서 계속 목표와는 이탈해 가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고 이 목표에 합당한 코스, 하나님이 정해 준 코스를 끝까지 잘 지켜 나아갔었습니다.
두 번째로, 경기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경기규칙 입니다.
경기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파울이 많아지고 파울이 많아지면 이겨도 소용이 없으며 어쩌다 골인을 해도 무효가 되고 맙니다.
경기는 언제나 정당한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5절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고 법을 떠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에 도달하겠다고 하는 데 항상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청년 범죄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여러 번 들어오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면 한 탕만 잘 되면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것이 잘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과만 가지고 승부를 따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합리적, 합법적 코스를 따라야 합니다.
잠시 제가 학장 일을 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학부모들이 입학 시험에 떨어진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입학만 시켜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고 법이나 불법을 따지기 이전에 자녀를 이런 식으로 입학을 시킨다는 것은 그 자녀로 하여금 평생이 가책으로 살게 하며 장차 어머니가 되어서도 자녀들에게 떳떳한 교훈 한 마디를 주지 못할 것이니 그 학생 자신을 위해서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을 하지만, 부모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입학만 시켜 달라고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경기 규칙을 바로 지키지 아니하면 무효인 것같이 우리의 인생도 규칙을 벗어나면 떳떳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듣는 자의 믿음이 사람의 말과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명백히 썼으며, 로마서 14장 23절에서는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든지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천하없는 구제를 했어도 무효이며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겼어도 무효입니다. 믿음의 길, 이 길을 통해서만 성공이 있음을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도요 오직 믿음만을 위해서 산 사도 바울의 철학입니다.
셋째로 경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절제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기자의 자세로서 절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절제라고 하는 이 말은 성경상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연하면 Excise of self control 이 됩니다. self control, 자기 조절 즉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기자가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경기자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자고 싶은 대로 다 자면 절대로 경기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음식도 적당히 조절하면서 먹어야 되고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몸만 조절해서도 안 됩니다. 마음도 허탄한 생각을 버리고 집중적으로 한 곳에 정신을 통일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미국의 뉴욕과 시카고에 한국인 의사가 약 400명 가량 있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한 의사가 말하기를 한국인 의사들이 미국에 와서 돈은 많이 벌었는데 믿음도 없고 할 일이 없으니까 술 마시고 아편도 맞고 도박을 하며 부부가 서로 싸우고 이혼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기가 한국인 의사라는 것을 말하기가 창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격이 없이 돈을 벌었고, 확실한 철학이 없이 출세를 하면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스릴 줄 모르는, 절제 없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돈은 벌었지만 인격은 땅에 떨어지고, 명예는 얻었지만 진실은 잃어버렸고, 업적은 있다고 하지만 믿음으로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결코 성공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를 벌었느냐고 묻지 말고 자기가 자기를 얼마나 지배하고 살았느냐고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달려 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 마쳤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과 헬라어로 똑같은 단어입니다.
"다 이루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이 말들은 모두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정말 부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고, 전도해야 될 사람도 많고 전도해야 될 곳도 많은데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이 말은 양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에서이며, 또 자기가 자기로서의 할 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코스, 내게 주신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하며 자기의 코스를 끝내는 바로 그 시간에 앞에 있는 상급,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 년을 끝내는 오늘 이 시간이 내게 마지막이라고 한다
내 앞에 무엇이 보입니까? 이제 면류관이 내 앞에 보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암흑과 절망과 뉘우침만이 있는 것입니까? 또한 바울은 이 상급을 자기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귀중한 고백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의 일년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고 하는 바울과 같은 담대한 고백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있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일 년이라고 하는 귀중한 시간을 허락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주신 그 코스를 변경했고 마침내는 목표마저 버리고 곁길로 간 때가 너무도 많았던 것을 뉘우칩니다. 이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언젠가는 바울과 같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 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앞날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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