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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제물(이사야 1:10-20)

by 【고동엽】 2023. 4. 8.
목차

헛된 제물(이사야 1:10-20)

 

너희 소돔의 관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화로 모이는 것이 그러하니 선의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식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지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신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구우주라고 하는 어느 어머니가 모처럼의 특권을 얻어서 평생 바라던 영국 여왕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생 중 처음이자 마지막 되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그는 여왕을 뵈러 가면서 사랑하는 고양이를 데리고 갔답니다. 고양이는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쥐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 고양이는 쥐 잡느라고 돌아다녔습니다. 고양이에게는 쥐 생각밖에는 없었으니까요. 고양이는 한 번도 여왕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궁전을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무엇을 위해서 나왔는지 무슨 목적으로 나왔는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때로는 한 번도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내 걱정 근심에 그대로 매여서 쥐를 쫓아다니는 고양이처럼 세상에 속한 생각으로 맴돌다가 예배를 끝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의 생각도 가지각색입니다.

목적도 각각입니다. 그 자세도 나름대로 다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오라"하고 만인을 향하여 초청하는 말씀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나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 오라"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그 "돌아 오라"고 하는 말씀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 앞에 다시는 오지 말라." 오지 말라.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하는 그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이나 24장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 거룩히 구별한 예물을 가지고 나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니 앞에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한 것이냐. 다시는 내 앞에 재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 성경에 보면 기도하라는 말씀이 곳곳에 많습니다.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또 "항상 기도하라" 했는가 하면, "구하라 주실 것이다" 하시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많이 기도할지라도 안 듣겠다. 기도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자, 이 이율배반적인 두 말씀을 우리는 다 함께 들어야겠습니다.

"오라" 하며 "오지 말라" 하고, "예물을 가져 오라" 하면서 "다시는 제사를 드리지 말라" 하고, "구하라, 기도하라" 하면서 또 이제는 "기도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 사이에서 우리는 깊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누구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가라" 했지만 그 가는 자세가 영 좋지 않아서 짜증내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면 "얘, 그만둬라" 그리지 않습니까? 또 하도 답답해서 어떤 때는 친정으로 가라 하는 남편도 있지요. 그런다고 아내가 "나는 갑니다. 안녕히 계시오" 하며 나갈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가라고 했든 오라고 했든 문제는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느냐, 좀더 깊은 차원에서 말을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죽 답답하시면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제물을 다시는 드리지 말라." 이 깊은 의미를 우리는 깨달아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를 분석해서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받고자 해서 나오는 간구형이 있습니다. asking 타입입니다. 나올 때마다 달라는 것입니다. 나올 때마다 청구서를 써서 냅니다. 이번에 가서는 또 뭘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주세요." 그저 "주세요 주세요" 뿐입니다. 이 "주세요"로 일관된 예배의 자세가 있습니다. 기도도 찬양도 전부 "주세요" 입니다. 이러한 유형은 합당치 않습니다.

또 하나는 명상형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감정 순화를 위해서, 혹은 교양 삼아, 또는 수양 삼아 나와서 처음 앉은 때부터 눈 딱 감고 조용히 명상하면서 자기 마음을 달래고 수양하려고 하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저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계형입니다. 습관형입니다. 안 나오자니 꺼림칙하고, 나오자니 별 것 아니고, 그러다 보니까 언제나 시간이 늦지요. 처음부터 나가자가 아니고 나갈까 말까 생각합니다. 안 나오면 무언가 마음에 안된 것 같아요. 석연치를 않아요 일주일 동안 마음이 불안해요. 또 나가 봐도 별 것 없어요.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이렇다 할 독립적인 자기 체험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손에 끌려서 들락날락하던 그 발걸음이라서 나가는 거지, 이렇다 하게 무엇이 없습니다. 감격도 없습니다. 오래 믿는 사람 역시 이런 타성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문화화하고 습관화되어 버린 신앙의 유형입니다.

또 하나는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은 좋아 보이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공로형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자랑하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생활 자체, 나오고 들어가고 하는 자세를 공로화하고 있습니다.

순례자의 고행처럼 이렇데 다님으로써 이 공로가 축적되어 축복이 주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연중에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좀 먼데서 나와야 하고, 차 타고 오기보다는 많은 고생을 치르면서 걸어서 나오는 게 더 공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고 또 나오고 하면서, 혹은 바치기도 하면서 공로를 쌓아 나가려고 하는 율법주의적 신앙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 관해서 좀더 분석해 말씀드리면 기도를 해도 많이 해야 됩니다. 조금하면 아쉬워지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많이 해야 뭐가 좀 들어지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밤새껏 해 보기도 하고, 금식하면서 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두 마디 가지고야 되나요? 좀 많이 해야지, 바쳐도 많이 바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증언 부언하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로 아는 생각이 있는데, 그건 이방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무엇이 필요한지 벌써 아시느니라, 구하기 전에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말을 많이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를 공로화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 되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바알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해가 지도록 소리를 질러 보아도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단 한 사람의 외마디 기도였지만 그 기도에는 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그 자체를 공로화하려고 하는 생각은 아름답지 못하고, 또 제물을 많이 드려야 될 줄 아는 그런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의 옛날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데, 무려 십팔만 육천 마리의 양을 하루에 드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피가 강과 같이 흘렀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한 자리에서 십팔만 육천 마리의 양과 소를 죽였고, 피를 흘렸다면 이것이 강과 같이 흘렀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마치 도살장이었을 것입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도살장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많이 드려야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자꾸만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많이 드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또 한번 하나님 앞에 죄짓는 일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그 길은 결코 긴 기도나. 많은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다시는 내 앞에 그런 제물은 가지고 오지 말라" 하십니다. 제사 드리는 그 양이나 형식, 또는 장엄한 의식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로마서 11:35에 말씀하십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 갚으심을 받겠느뇨."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음을 받을 만큼 아름답고 또 많은 제물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드린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서 어찌 이를 이루어 보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외식적인 것을 미워하십니다. 마음 없는 선물은 뇌물입니다. 마음 없는 순종은 욕입니다. 모독입니다. 정성 없는 예배는 언제나 가증한 것입니다.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 중심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음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통회하는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시편 51편, 다윗의 참회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하시지 아니하시나니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나 주는 번제를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통회하는 마음, 이것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선지자들은 외쳤습니다. "옷을 찢지 말고 네 마음을 찢으라." 언제나 우리는 통회하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 그리고 이 처지 이대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 이 진실과 이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형식이 아닌 붉은 중심을 주님 앞에 내놓는 제사가 참된 제사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내 뜻을 하나님 앞에 내놓기 위해 나오기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계속적으로 말씀을 상고합니다. 계속적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이것을 하나님은 언제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 그리고 순종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피비린내와 혹은 고기 불태우는 냄새를 좋아하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 제물을 바치라 하셨느냐? 신학적인 의미로 말하면 이것은 의로운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사랑하실 때에 하나님 스스로 지불하시는 희생의 대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 그 공의로운 사랑의 계시가 제물 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죽어지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희생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찢어지고 깨지고 부서지는 그런 죽어진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손을 들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그런고로 제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에 있음을 보여 주는 계시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희생하는 의로 내세우려고 한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하나님의 마음, 상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신다." 공동번역에 보면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 그랬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공의를 원하고 긍휼을 원한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마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형님입니다. 탕자는 차라리 집을 나갔다 돌아왔습니다만 탕자의 형님은 집을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은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맹종이요, 그것은 복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기뻐 잔치하는 때에 그는 원망을 합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내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주어서 친구들과 같이 즐기게 하지도 아니하시더니, 동생은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왔는데 잔치를 베푸는 겁니까" 하고 불만합니다. 그 동안 쌓였던 물만이 터져 나옵니다. 이러한 순종이라면 집어치우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원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 순종해야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 또 아버지가 기뻐하는 마음,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서 동생을 사랑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수단의 방편으로 삼는 신앙은 미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그 귀한 마음을 알고자 할뿐입니다. 계속 알아 나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미가서 6:8에 보면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와 사랑과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의와 진실과 사랑과 선행과 긍휼을 원하시고 나아가서 화목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누가 너를 원망하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놓아두고 다시 가서 화목하고 그 다음에 제물을 바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화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이 화평과 이 거룩이 없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자가 없습니다.

로마서 11:34을 봅시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알았다 할 것입니까? 또 한 번 알고, 또 한 번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내가 동참하고 동화되고 하나되는 그런 역사, 이것이 참된 제사입니다.

또한 이 제사는 행동적인 것입니다. 윤리적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함이 다만 감상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의 예식만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내 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것이 제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남편이 낚시질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보십시다. 쉴 시간만 있으면 그저 낚싯대를 들고 나갑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이것을 싫어합니다. 남편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낚싯대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어느 날 꺾어 아궁이에 집어넣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러고도 사랑이 통할 것 같습니까? 자기 소견에야 어떻든 간에 남편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아내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남편도 소중히 여기고, 자식이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그 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압제 당한 자, 눌린 자, 소외당한 자를 우리가 또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를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를 위해서 나 또한 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손으로 선행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제사입니다. 이 마음과 이 행위 자체가 산 제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통회하는 눈물, 가장 깊은 겸손 그리고 그 겸손 속에 있는 진실한 감사, 눈물로 감사하는 그 감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행동, 이 행위 자체가 제물입니다.

로마서 12:1에 '그런고로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이것은 합리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행위 자체가 예배요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공로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제물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 사랑의 고백에서 이루어지는 행이, 그 선행과 그 희생 자체가 하나의 제물이 되어 주님 앞에 들려질 때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시고, 그를 기뻐하시고, 그를 만나 주시고, 그에게 다함이 없는 은총을 날마다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들에게 예배의 처소를 주시고, 예배의 시간을 주시고, 또 예배할 수 있게 하신 놀라운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여, 헛된 발걸음이 되지도 않게 하시고, 헛된 예배가 되지 않게 하시며, 헛된 제물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나옴을 주께서 기뻐하시며, 우리의 기도가 주께 상달되며, 우리의 제사가 진정 하나님께 영광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는 영광이 되고, 우리는 주께 바쳐진 제물로서의 가장 복된 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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