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비결(빌립보서 4장 4절~9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여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은 아마도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말씀합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32)."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고 이야기하며, 또 그로 말미암아 근심하기도 하는 일입니다.
동물적인 고통과 인간적인 고통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굶으면 죽는다는 사실은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같습니다. 추우면 얼어죽는다는 것도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공통되는 문제입니다.
비록 말로는 통하지 않더라도 그 아픔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인격자로서, 지성인으로서의 인간에게 으뜸가는 아픔은 바로 '후회'입니다. 나 개인의 마음 속에서 가장 큰 아픔으로 남는 것이 후회인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을 못한 데서 생기는 것이 후회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은 데서 후회가 생깁니다. 얼마든지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마는 그 기회를 나 스스로 버렸습니다. 하지 않은데 대한 후회입니다. 그것이 아픔으로 남습니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참으로 좋은 기회였습니다 마는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심 내 마음에 '후회'라는 고통으로 남습니다. 마침내 이것은 '자기불신(自己不信)'으로 정착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어떻다느니 누가 어떻다느니 원망도 해보지만 내가 나를 못 믿는다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나를 부정하며 살아야 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후회의 고통은 절망을 부릅니다. 종국에는 자기학대에 빠집니다. 자기학대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이나 슬픈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자기학대에 연유합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생명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 생명, 내 인격, 내 명예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 인격, 명예 역시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심리적 차원에서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가 감정주도적(感情主導的)인 인간상이요, 둘째가 지식주도적(知識主導的)인 인간상이요, 셋째가 의지주도적(意志主導的)인 인간상입니다. 음식을 먹는 경우에 비유해보십시다. 감정 위주로 사는 사람은 음식보다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의 얼굴을 중시합니다. 그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있느냐 없느냐,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이 입맛을 좌우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에 따라 소화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합니다. 어지간히 감상적이고 무드 취향입니다. 까다롭습니다. 음식을 먹었으면 되었지 그릇이 어떻고 음식 가져오는 사람의 분위기가 어떻고 - 참 힘들게 삽니다. 강아지는 음식을 주면 옆구리를 차든 말든 뛰어다니면서라도 음식을 잘만 먹습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음식을 앞에 놓고도 몇 마디 잔소리만 들어도 소화가 안됩니다. 소화가 안되어야 사람입니다. 동물과는 또다른, 이러한 차원을 가진 것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감정 주도의 인간입니다.
두 번째는 누가 주느냐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만 음식 맛이나 영양가 따위만 생각하고 먹습니다. 누가 주고, 분위기가 어떻고, 식탁이 어떻고 하는 것은 아랑곳없습니다. 영양가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을 지식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나갑니다.
세 번째는 음식맛, 영양가, 분위기 따위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살기 위하여 먹고 일하기 위하여 먹는 사람입니다.
음식이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하루 세 끼 먹으면 됩니다. 쓰면 약으로 알고 먹고 달면 달구나 하면서 먹지 까다롭게 입맛을 가리지 않습니다. 의지 주도의 인간상입니다. 이것은 모든 일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문제가 같은 맥락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이 무엇인가-이 문제를 살펴보십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랑은 끌리는 마음이요, 매력이요 화끈한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현대사회학에서 '결혼은 사회계약(社會契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같이 살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고 결혼한다기보다 오히려 결혼하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을 하겠다는 의지가 먼저요, 그 다음에 세월을 살아가면서 사랑을 배우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이며 살다보니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기분대로 살았다면 벌써 여러 번 사고 났을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이 감정만으로. 또 합리적 판단만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지에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말입니다. 기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무(義務)로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쁘고, 그 다음에 깨닫고, 그 다음에 좀더 다른 의미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은 문제는 어느 것이 우선이냐, 무엇이 주도하느냐 입니다. 감각, 지식, 의지 - 이 세 가지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기뻐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을 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분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공부하고 나니 기분 좋은 것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 가운데 기분 좋게 일어나는 사람도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니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합리적인 이해가 있은 후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므로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 깨달음이 있고 보람을 느끼게 되며 후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기분, 나의 감상, 나의 판단 - 이런 것에 의존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못됩니다. 일하면서, 행동하면서, 실천하면서 배우고 깨닫고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아직도 야만인이라고 일컬음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훈련이 덜 되고, 교양이 덜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학식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없이 감정 위주로 삽니다. 한번 기분이 뒤틀리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가정이고 사회고 국가고 없습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뒤집어놓고 맙니다. 다른 사람 죽는 것은 고사하고 저 죽는 것도 모릅니다. 혹 '남 죽이고 나는 살겠다'라면 이야기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너 죽고 나 죽자'하고 덤비니 정말 무섭습니다. 순간의 기분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참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현대인에게 문제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인은 실용주의적이요, 개인주의적이요, 합리주의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매사에 이치를 따집니다. 나아가서는 내게 돌아올 실리를 계산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러기에 용기가 없습니다. 결과에 희열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생을 산다면 참 유감스럽습니다. 화평과 기쁨과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으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자식으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지위와 명예로 인해 행복이 온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가장 중히 여기는 지식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공부를 많이 하면 근심이 많습니다.
현대 지성인에게 고민이 많은 것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용기가 없어집니다. 종국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 : 28)"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르라,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 먼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리하면 알게 된다, 평안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평강'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평강'이라는 말은 '샬롬'입니다. 구약성경에만도 350회 이상 나오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의미도 깊고 뜻도 다양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은혜'는 헬라식 표현이요, '평강'은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이것을 복합하여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평강'은 '온전함'을 가리킵니다. 전인교육(全人敎育)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전인적인 것만이 아닌 전체적인 것까지 말씀함입니다. 구원과 자유와 번영과 건강과 화목과 행복입니다. 소극적인 것이 아니요, 도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감상적인,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정신적인 기쁨과 평안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고독은 결코 평강이 될 수 없습니다. 가난도 평강이 아닙니다. 공동체적인 것,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전한 관계가 평강입니다.
평강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웃과의 화목한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진실과 평안을 얻는 자유한 관계를 말합니다.
또한 물질에 대하여 넉넉한 관계, 곧 물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관계를 평강이라 말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십시다. '하나님의 평강'이라든가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라는 표현을 보면 평강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평강이 옵니다.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마음을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나의 환경을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나의 세계를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먼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행기 여행을 하다보면 종종 재미있는 일을 겪게 됩니다. 한번은 비행기에서 내려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운전사는 내 신분을 모르고 이런 질문을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고장이 나서 죽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 말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한번도 불안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사고가 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설령 사고가 난다고 해도 기왕 한번 왔다 가는 세상인데, 깨끗하고 간단하게 갈 수 있어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내가 탄 비행기는 절대로 사고가 안날 것이라 생각해서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고 생각하니 평안한 것입니다." 운전사가 제 말을 받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디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평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점이 좋은 것 같아서, 전도하는 내용을 들어보기도 했었지요." 사실입니다. DC 10을 탔다고 불안하며, 보잉 747을 탔다고 평안합니까?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비행기 탔다 해서 불안하며, 자동차 탔다 해서 평안한가요? 자전거도 문제요, 걸어가도 문제요, 누워 있어도 문제입니다. 하늘 아래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명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합니다만,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을 위한 생명보험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은 다음 뒷처리 편하게 하라고 드는 것이 생명보험이지요. 도대체 누가 내 생명을 보장할 것입니까? 생명보험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거기에 무슨 보험이 따라갑니까? 생존여부(生存與否)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모든 평안의 기본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특별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하는 관계이어야 하고, 나아가 감사함으로 아뢰라 --- 하나님께 전체를 맡기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고 말씀합니다. 넘치는 평안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불만을 말하지 맙시다. 끓어오르는 정욕과 미워하는 마음과 분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어느 부인은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늘 술시중을 해야 합니다. 더구나 술이 만취되어 들어오는 날이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곤 해서 그 시중들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남편이 어지럽혀놓은 것들을 다 정리하고 나서 잠든 남편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신세타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는 언제까지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합니까?" 구슬피 울며 탄식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성령이 감동하사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지……' 그래서 고쳐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감사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순간 스스로 마음이 감동됩니다. '그래도 과부 신세보다야 낫지 않은가? 지금은 저 꼴이지만, 언젠가는 사람이 될는지도 모르지.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제 집 찾아오는 것 하나는 신통하다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랍니다.
토요일은 특히 술을 많이 마셔서 주일날은 꼼짝 못하고 누워서 집을 보면서 아내보고 교회 나가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렇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데, 남편이 눈을 떴습니다. 밤중에 혼자 앉아 실실 웃고 있는 아내를 보자 남편이 놀라서 묻습니다. "왜 웃는 거요?"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그 부인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다 듣더니 "나도 예수 믿어줄께."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제 그 부인은 간증합니다. "내가 10년을 기도하여도 응답이 없으시던 하나님께서 한 번의 감사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 불만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을 것입니다. 사정이 많은 것도 압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감사함으로 모든 사정을 아뢰어보십시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신다고 하셨기에 다행이지 얼굴 보신다 했으면 큰일날 뻔했다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보기가 아주 흉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얼굴 표정이 어이하여 그렇게 우거지상입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 표정,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각이 넘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으로 내 생각으로 말미암아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사 평안한 것입니다. 내 의지로 인해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마음에 참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좀더 읽어봅시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배우고'-지적인 이해를 말합니다. '받고'-가슴으로 받는 것입니다. 수락(受諾)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받는다-이것은 정적(靜的)인 것입니다. '듣고 본'-경험을 말합니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이제는 행하여야 합니다. 내가 행한 만큼 평강을 얻게 됩니다. 행한 만큼 기쁨을 얻고, 행한 만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느끼고 경험한 바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무효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행하지 않음'이 우리의 마음에 후회와 고민과 위선으로 남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6․25 때 최일선에서 참전하고 있을 때입니다. 장티푸스가 무섭게 돌아 수천 명의 군인이 모두 예방주사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사를 놓는 간호사들은 남에게는 주사를 놓아주면서 정작 자기들은 주사를 안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공교롭게도 그 아가씨들만 장티푸스에 걸려 머리가 홀랑 빠진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병은 예방하면서 정작 나의 병은 예방하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지성인들, 참으로 유식합니다. 도덕을 논하라면 철학자 수준이요, 언변도 좋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안 합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바로 그 부분만큼 고민과 위선과 후회가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차라리 듣지 않았고,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들었고 보았음으로 죄가 더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성인에게는 죄가 많습니다. 고민도 많습니다. 하루는 젊은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여쭈었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너의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 율법학자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차라리 예수님께 묻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물었기에 그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최후에 가서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 좀 무리가 되고, 억지가 된다 하더라도 순종하십시다. 순종하면 끝에 가서 보람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끝내 자유하였고,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능력을 동반합니다. 여기에 생산성이 있고, 창조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강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 안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 평강의 길이 있고, 평강의 비결이 있고,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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