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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지는 비결(빌립보서 3장 12절~16절)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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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지는 비결(빌립보서 3장 12절~16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사람은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면 새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운 일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좀더 새로운 각오로 살아가고자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입니까? 새로워지기는커녕 마냥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심지어 뒤로 물러서기까지 합니다.
새롭게 되고자 하는 마음 - 그 마음처럼 살아가지 못할 때에 그 반복되는 실패 때문에 우리는 곧잘 자기환멸을 맛봅니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스스로를 불신합니다. 마침내는 스스로를 저주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 죽는다는 말이 두려워서 술을 마시는 겁니다." 이렇게 대답합디다. 자신을 포기한 것입니다. 자기학대 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살행위입니다.
끝내 이렇게 나아가면 망한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의 건강도 해치고 가정도 사회도 끝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잘 알면서도 자신을 학대하는 것 --- 절망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고민 그 자체는 아직 소망의 여지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는 고민이 없습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흔히 다른 사람 때문에 일이 잘못되었다거나 '조건이 좋지 않아서…' 라고 잘못된 일의 원인을 돌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변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주위에서 좋은 일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립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새해의 인사말도 그렇습니다. 복이 찾아와 주위 환경이 좋아지고 새로운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내가 먼저 변화하여야 합니다. 나는 부동자세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주위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망상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의 새해나 축복이라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내가 변화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면 다른 사람도 달라질 것이며, 내가 새로워지면 내 가정도, 환경도, 국가도 언젠가는 새롭게 바뀌어질 것입니다. 나 자신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새해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잘못된 원인과 새로워지는 비법을 탐구하십시오. 좀더 진실하게 비판해보고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믿음의 대선배인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 가운데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절)" - 미완성 그 자체를 현실로,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현재에 만족하지도 않습니다 마는 그렇다고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다 알았다고 교만하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다 얻지 못하였다고 낙망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자기 고백입니다.
미완성 그대로를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만하지 맙시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 결코 낙심하지도 교만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미완성이기 때문에 무한한 기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지난 일들을 기억해볼 때, 그 언젠가 '이젠 끝이다'라고 생각했던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 길밖에 없다 - 그렇게 절망했었습니다마는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좀더 선할 수 있고, 좀더 진실할 수 있고, 좀더 사랑할 수 있고, 좀더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그 현장에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완성한 것도 아니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순과 갈등도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뼈아픈 자기고백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 자기실패의 악순환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마는 절대로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은혜 안에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자기됨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더 효율적인 세계, 더 능력 있게 사는 세계를 내다보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미완성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은 목표를 재조정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목적은 좋았으나 방법이 나빴다' '방법까지 좋았고 최선을 다했으나 세상이 나빴다' --- 결국 세상을 잘못 만나서, 환경이 나빠서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변명을 위한 똑같은 전철(前轍)을 밟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물어봅시다. '방법이 옳았는가?' '최선을 다했는가?' 좀더 나아가서 '뜻이 옳았는가?' - 목적이 올바르고 목표가 분명했는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정말로 목적이 선했고 분명했고 옳았다면 비록 실패했다고 해도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때 없이 졸다가 쓰러지는 베드로를 보시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종종 자기변명에 쓰입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사랑은 간절하지만 돈이 없어서라고 변명합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정말 마음이 간절했습니까? 마음이 간절했는데 잠이 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베드로를 보고 '너는 싹이 노랗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뜻이 없었다, 마음이 없었다 - 마음이 있는데 졸음이 올 수는 없습니다. 돈을 십만 원만 잃어버려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만 받아도 잠이 안 오고 잠꾸러기 아이들조차 내일 아침 소풍간다고 하면 밤새 잠을 설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메시야가 십자가에 돌아 가신다는데 잠이 옵니까?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졸음 하나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었습니다.
정말 뜻이 있었는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는가 -목적을 재 진단하여야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교인들 가운데 태반은 '남한에 가서 자유롭게 교회 다니며 예수를 믿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서 돈푼이나 벌더니 그만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걱정도 많고 한숨도 많고 문제도 많습니다. 예수만 마음놓고 믿을 수 있으면 된다고 하더니 왜 딴소리입니까? 왜 목적이 변했습니까?
오직 하나의 소원이 있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병들든 건강하든 문제가 안됩니다. 자유롭게 예수 믿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패는 죄가 아닙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가 됩니다. 어느 지위에서든 어느 형편에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었다면 더는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사는 데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왜 삽니까? 내 뜻이 어디에 있으며. 구체적인 궁극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생각해본 일이 있습니까? 목표 - 추상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결과적이서도 현실적이어서도 안됩니다. 더구나 자기변명적 이어서는 안됩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이제와서 옛날이야기나 하면서 '이랬노라'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음입니다. 그 속에 정말로 그러한 본래적인 목적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잡힌 바 된 것 - 내 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붙잡은, 나를 포로로 한 그것을 내 목표로 삼고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또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4절)" -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을 향하여, 위에서 부르는 부름에 진실하게 응답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목표를 새롭게 하십시다. 새로운 올해는 왜 살아야 하며 왜 내게 있어야 하는지, 생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13절에 보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날을 잊어버리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잘살고 성공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교만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실패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낙담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 잊어야 합니다. 망각은 은사(恩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여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것도 괴로움이지만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입니다. 잊을 것은 깨끗이 잊어야 합니다. 과거와 관계가 없는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망각이 아니라 능동적인 망각입니다. 스스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간혹 쓸데없는 옛날 일을 기억하면서 교만해지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우등생이었다 - 그것이 오늘에 와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지난날에는 대단하였다 하여 그 때문에 지금까지 가슴 부풀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잘한 것 잘못한 것 가리지 말고 잊어버립시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과거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과거에 사는 사람이지 오늘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미래에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과거지향적인 생에서 탈피하여 미래지향적인 생을 사는 것이 새로워지는 비결입니다.
아이들의 경우를 봅시다. 밖에서 놀 때에는 숙제 안한 것 때문에 마음껏 놀지 못하고, 공부할 때에는 놀 때를 생각하느라고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공부할 때에는 놀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공부만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놀 때에는 공부는 싹 잊어버리고 유쾌하게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이쪽에서는 저쪽 생각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생각하면 두 가지 모두 망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오늘과 내일만을 생각합시다. 그것이 바로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나 비판에 몹시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좀더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남이 나를 평가하는 것은 모두 과거에 속한 일입니다. 적어도 오늘에 대한 평가는 그 후에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에 대한 소문이나 평판에 신경을 쓰고 사는 사람은 과거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나됨은 오늘에 있는 것이지 지난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18장 22절에 보면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과거에서 떠나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지난날의 죄가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럴진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는 과거를 내가 왜 기억합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한 나를 내가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저는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 때마다 깊이 생각해봅니다. 탕자가 마침내 돌아왔을 때에 그의 아버지는 '소를 잡아라' '반지를 끼워라' '옷을 입혀라' 하며 아들을 극진하게 영접합니다. 아들이 얼마나 거북스러웠겠습니까? 아들로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내버린 탕자일 뿐입니다. 극진한 대접이 거북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용서하는데 배가 나를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기에 내가 나를 용서하여야 했고, 아버지가 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기에 나도 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혹자는 이런 사람을 보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마는 그 속에 진정한 신앙이 있습니다. 과거가 어찌되었건 오늘 새로워지고 새로워진 입장에서 나를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용서할 때에도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용서란 물질의 거래가 아닙니다. 그사람 만날 때마다 옛날일을 생각하면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모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음행한 아내의 행위까지도 용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과거가 있는 여자라 하더라도 그 과거를 잊고 용서하여 새사람으로 대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깨끗이 잊어버려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는 망각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속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좇아가노라 --- 이 말은 '디오코', 즉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뛴다는 뜻입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장을 뛰는 모습을 가리킨 것입니다. 생각도 마음도 모든 힘을 모아서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목표가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내가 목표를 향해서 뛰어야 합니다. 세상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내가 세상을 향해서 뛰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화해해주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내가 먼저 찾아가 화해의 악수를 청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희생해주고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내가 희생을 쌓아야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앞에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세계적인 코치를 데려다가 훈련받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마라톤이야 열심히 뛰기만 하면 될 일이지 무슨 코치가 필요하냐고 미련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전문가의 말이 마라톤이야말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운동이라고 합디다. 기술 중에서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을 정확히 측정하여 2시간 안에서 알맞게 안배, 소모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처음에 열심히 뛰어 1등으로 달리다가 절반쯤 가서 쓰러지고 뒤쳐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반대로 골인한 다음에도 힘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골인한 다음에는 쓰러질 정도로 기진 해야 한답니다. 출발부터 골인 지점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적절히 쏟아 부어 최대의 효과를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목표를 한번 정했으면 온 힘과 온 정열을 다해서 뛰어야 합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마누엘 칸트의 저 유명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 - '너는 그것을 할 수 있다. 네가 그것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자동차 운전만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꼭 하여야 한다, 안 하면 죽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못할 일이 없습니다. 또 새벽기도회에는 아무래도 못나오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또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못나올 턱이 없습니다.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내 운명을 건 목표다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내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로움이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새로운 세계에서 듣고 힘을 키웁시다. 목표만 보고 총력을 기울여 뜁시다. 그러면 새로운 기적이 내 앞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새해가 진정한 새해가 되게 하고 싶습니까? 적어도 금년만은 새롭게 살아보고 싶습니까? 뜻을 새롭게 하십시오.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십시오. 아흔 아홉 번 실패했다고 해도 성공할 수 있는 한 번의 가능성을 향해서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될 때에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됩니다.
내가 새로워질 때에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새로워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양심이 나를 칭찬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무쪼록 내가 나를 성원하는 명랑한 새해를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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