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일체의 비결(빌립보서 4:10-13)

by 【고동엽】 2023. 3. 19.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일체의 비결(빌립보서 4:10-13)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공로(共路)를 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같은 모양으로 태어나고 같은 모양으로 살아가고 같은 모양으로 죽어 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의 자세로 각자의 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각자의 세계관 대로인 것입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남이 알든 모르든, 남이야 어떻게 평가하든 각자 나름대로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victim approach'--피해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입니다. 상황과 환경의 피해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태어난 것도 피해요, 죽는 것도 피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것도 피해요, 실패도 피해요, 병드는 것, 헤어지는 것도 피해입니다.

모든 사건이 다 나를 괴롭히자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피해자다'--이렇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늘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주도적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황의 반응자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상황이 변할 때마다 웃었다 울었다, 좋았다 슬펐다 합니다. 상황대로 끌려갑니다. 그래서 늘 불평입니다. 뿐만 아니라 책임은 언제나 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으로 그렇게 평생을 삽니다. '도대체 내 생()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피해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running approach'----항상 수련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는 자세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경우에서 배웁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왜 이 사건이 내게 있느냐? 왜 내게 이런 사건이 생겼느냐?'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하여 나는 오늘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는가?'라고 깊이 생각합니다. 이렇듯 언제나 배우고 또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leading approach'--주도적인 자세로 살고 창조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고 가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남 때문에 내가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남이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내 책임은 당연히 내가 질 뿐더러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집니다.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스스로 인생의 우등생이라고 말씀합니다. 달관자요, 도통한 사람입니다. 동양적인 도행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군자로 자처함입니다 스스로 성숙한 인격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기란 그래도 쉬운 편이지만,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기란 어렵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부()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할 때에는 남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실패할 때에는 남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논어를 보면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공자는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하면서도 예를 좋아할 줄 아는 것만은 못하다." 멋진 대답입니다. 가난하여도 비굴해지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가난 가운데서 스스로 즐길 줄 아는 것, 부하다고 해서 건방떨지 않고, 출세했다고 해서 거만하지 않고 스스로 예를 지킬 줄 아는 것--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더 중요한 일이라고 이 동양의 성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인격으로서 사도 바울은 비굴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임을 자처합니다. 환경의 지배에 완전히 초연할 수 있는 인격에 다다랐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된 인격을 높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하는 날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어려운 일 당할 때에 비굴하지 않을 수 있고, 가난할 때에 남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고, 부활할 때에 오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숙한 인격을 봅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일체의 비결'이라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모든 것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라는 말씀입니다. '자족하기를 배웠다'--이미 습득하였다는 것입니다. 과거지사입니다. 자족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이것이 신앙인의 인격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인격을 세 가지로 요약 정리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 자세요, 둘째는 낙관적 자세요, 셋째는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이 같은 자세가 그의 삶의 자세요 사람됨의 모습이었습니다. 긍정적 자세를 영어로는 'gain-oriented world view'라고 표현합니다. 언제나 gain, ()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적자로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흑자를 생각합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얻는다고만 생각할 줄 아는 세계관으로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비천함에 처할 때에도 비천을 모릅니다.

풍부할 때에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궁핍하든지 핍박을 받든지, 어떤 환경에 있을 때든지 손실을 생각하지 않고 얻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언제나 배움의 자세로 살아갑니다. 이런 인격이 바울의 인격이요, 삶의 자세였습니다.

필립스(Phillips, T.B.)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저런 시련과 유혹이 당신의 삶에 끼여들거든 그것을 침입자라고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친구로 삼아라. 시련과 유혹은 내게 가르치는 것이 많으니까.' 현대인은 돈만 있으면 좋은 스승까지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는 확실히 훌륭한 수단이요 생의 도구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훌륭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배가 고파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이 어떻다는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할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어려움과 고통이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장 귀하고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적으로 손실이 있을 때에는 정신적으로 얻어지는 이익을 생각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속적인 것에 손실이 있을 때에는 신령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고통이 있을 때에 거룩한 인격을 생각하고, 핍박이 있을 때에 참 믿음을 지니고, 환난이 닥쳤을 때에 영원한 참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믿음을 얻고 항상 지혜를 얻고 항상 높은 인격으로 성장하고 항상 더욱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더 큰 것을 얻는다고 생각했지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소득이 있다고 생각했지 손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gain-oriented'--이득을 생각하는 자세,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격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잃어버린 것에 정신없이 빠져서 인생마저 잃어버리지는 마십시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허상을 잃고 진실을 얻었습니다. 명예를 잃고 겸손을 얻었습니다. 모처럼 진실한 사람, 진짜 사람이 한번 되어보는 것입니다. 항상 더 크고 더 소중한 것을 얻는다고 하는, 긍정적 자세가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낙관적인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joy-oriented'입니다. 감사와 기쁨을, 기뻐할 줄 아는 비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나눔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이 비결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찬송을 합니다. 그때의 심경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다메섹 도상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때를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사울아' 하고 부르시던 주님의 음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억울하게 맞아 죽는다 해도 찬송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름의 secret--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2:17)"---피를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4:15)"라고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만족하는 사람에게 속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유가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행복이 있습니다. 높은 지위가 사람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진실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 명예를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은 상당히 유족하게 사는 편인데도 안방에 들어가 보면 다 해지고 먼지가 묻은 룩색(rucksack) 하나가 한쪽 벽에 걸려 있습니다. 궁금해서 언젠가 물어보았습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 저것 말입니까? 내가 38선 넘어올 때입니다. 인민군이 뒤에서 총을 마구 쏘아대는데 저것을 멘 채로 나는 그저 벌벌 떨면서 정신없이 기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도망을 쳐서 정신을 돌이키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룩색이 총알막이 구실을 한 덕분이지요. 그래서 저 보따리를 차마 버릴 수가 없습니다. 혹 사업이 어려울 때에도, 마음이 어지럽고 괴로울 때에도, 좀 불행하다 싶을 때에도 저것만 쳐다보면 마음에 감사가 일고 걱정도 없어지지요.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만, 625를 겪었던 사람은 절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지금 와서 허튼 소리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감히 불평하는 마음을 가집니까? 죄송스럽지도 않습니까? 간혹 제게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십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평생토록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시는데 그렇게 하루도 안 빠지고 한결같이 30년 동안이나 해 나오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결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마는, 그것을 오늘 이 시간에 공개하지요. 제가 고향을 떠나올 때에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고향집을 떠난 다음부터 이 어미는 언제나 너를 위해 기도하마." 제 어머니는 평생토록 새벽에 교회에 기셔서 기도하는 분입니다. 저 고생스러운 북한에서 새벽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저는 편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편하게 잠을 자면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습니다. 북녘에서 고생하는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렇다할 큰 것은 못해주더라도 같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는 하리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제가 새벽기도를 빠뜨리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 간증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나름의, 종류는 다를지언정 이 같은 비밀이 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항상 감사할 줄 알고, 항상 기뻐할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자기 비법이 있어야 합니다. 찾아보면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지 비법은 있는 법입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맨 밑바닥 끝까지 자기를 비하시키고 사는 사람은 어떤 굴욕을 당해도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밑바닥까지 이미 떨어졌으니까요. 맨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로, 그렇게 비하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당해도 억울할 것도, 분할 것도 없습니다.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보다도 스스로 그보다 더 낮고 더 천하게 나를 평가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이제는 남들이 나더러 죄인이라 한대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죄인보고 죄인이라 하는데, 나쁜 사람보고 나쁘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딤전 1:15, 고전 15:8)"라고 자기를 철저히 비하시켰기 때문에 어떠한 비난과 고통에도 불평 한번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바울은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nd-oriented world view'입니다. 끝까지 선을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고, 하나님의 지혜에 있고, 하나님의 경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순경(順境)도 역경도, 핍박도 환난도 순교도 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불행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끝에 가서는 해피엔드(happy end)로 끝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 영광에 내가 참여할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은 내 것이다'라고 믿었기에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관계치 않았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부하냐 가난하냐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의연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제목은 'Anyway'--'어쨌든'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분별하고 터무니없고 이기적이다. 그러나 어쨌든 너는 사랑하라. 당신이 선을 행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혹시나 배후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어서 선을 행한다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선을 행하라. 당신이 성공하면 가짜 친구들이 나타나고 적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성공하라. 정직과 성실이 당신을 유약하게 할지라도 어쨌든 정직하고 성실 하라. 오늘 당신이 행한 선이 내일 잊혀진다 하여도 어쨌든 선을 행하라. 위대한 사람이 변변치 못한 생각을 지닌 소인들에 의해서 넘어지는 것을 볼지라도 어쨌든 크게 생각하라. 사람들은 패자의 편을 드는 것 같아도 실상은 승자를 추종한다. 그러나 어쨌든 너는 패자를 위하여 싸워라. 몇년 걸려 지은 것이 하룻밤 사이에 파괴되는 것을 본다 할지라도 어쨌든 너는 건설하라. 당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여러분, 환경에 좌우되지 마십시다. 세상이 변하는 것에 덩달아 맞물려 돌아가지 마십시다. 바울 사도는 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순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을 가졌으므로 결코 유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늘 자유 하였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감사하고 늘 찬송하면서 초연하게 성도 되어 가야할 길을 의연히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체의 비결(빌립보서 4:10-13)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공로(共路)를 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같은 모양으로 태어나고 같은 모양으로 살아가고 같은 모양으로 죽어 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의 자세로 각자의 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각자의 세계관 대로인 것입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남이 알든 모르든, 남이야 어떻게 평가하든 각자 나름대로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victim approach'--피해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입니다. 상황과 환경의 피해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태어난 것도 피해요, 죽는 것도 피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것도 피해요, 실패도 피해요, 병드는 것, 헤어지는 것도 피해입니다.

모든 사건이 다 나를 괴롭히자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피해자다'--이렇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늘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주도적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황의 반응자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상황이 변할 때마다 웃었다 울었다, 좋았다 슬펐다 합니다. 상황대로 끌려갑니다. 그래서 늘 불평입니다. 뿐만 아니라 책임은 언제나 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으로 그렇게 평생을 삽니다. '도대체 내 생()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피해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running approach'----항상 수련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는 자세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경우에서 배웁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왜 이 사건이 내게 있느냐? 왜 내게 이런 사건이 생겼느냐?'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하여 나는 오늘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는가?'라고 깊이 생각합니다. 이렇듯 언제나 배우고 또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leading approach'--주도적인 자세로 살고 창조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고 가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남 때문에 내가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남이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내 책임은 당연히 내가 질 뿐더러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집니다.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스스로 인생의 우등생이라고 말씀합니다. 달관자요, 도통한 사람입니다. 동양적인 도행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군자로 자처함입니다 스스로 성숙한 인격임을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기란 그래도 쉬운 편이지만,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기란 어렵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부()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할 때에는 남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실패할 때에는 남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논어를 보면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공자는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하면서도 예를 좋아할 줄 아는 것만은 못하다." 멋진 대답입니다. 가난하여도 비굴해지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가난 가운데서 스스로 즐길 줄 아는 것, 부하다고 해서 건방떨지 않고, 출세했다고 해서 거만하지 않고 스스로 예를 지킬 줄 아는 것--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더 중요한 일이라고 이 동양의 성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인격으로서 사도 바울은 비굴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임을 자처합니다. 환경의 지배에 완전히 초연할 수 있는 인격에 다다랐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된 인격을 높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하는 날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어려운 일 당할 때에 비굴하지 않을 수 있고, 가난할 때에 남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고, 부활할 때에 오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숙한 인격을 봅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일체의 비결'이라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모든 것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라는 말씀입니다. '자족하기를 배웠다'--이미 습득하였다는 것입니다. 과거지사입니다. 자족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이것이 신앙인의 인격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인격을 세 가지로 요약 정리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 자세요, 둘째는 낙관적 자세요, 셋째는 종말론적 자세입니다. 이 같은 자세가 그의 삶의 자세요 사람됨의 모습이었습니다. 긍정적 자세를 영어로는 'gain-oriented world view'라고 표현합니다. 언제나 gain, ()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적자로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흑자를 생각합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얻는다고만 생각할 줄 아는 세계관으로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비천함에 처할 때에도 비천을 모릅니다.

풍부할 때에도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궁핍하든지 핍박을 받든지, 어떤 환경에 있을 때든지 손실을 생각하지 않고 얻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언제나 배움의 자세로 살아갑니다. 이런 인격이 바울의 인격이요, 삶의 자세였습니다.

필립스(Phillips, T.B.)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저런 시련과 유혹이 당신의 삶에 끼여들거든 그것을 침입자라고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친구로 삼아라. 시련과 유혹은 내게 가르치는 것이 많으니까.' 현대인은 돈만 있으면 좋은 스승까지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는 확실히 훌륭한 수단이요 생의 도구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훌륭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배가 고파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이 어떻다는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할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어려움과 고통이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장 귀하고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적으로 손실이 있을 때에는 정신적으로 얻어지는 이익을 생각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속적인 것에 손실이 있을 때에는 신령한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고통이 있을 때에 거룩한 인격을 생각하고, 핍박이 있을 때에 참 믿음을 지니고, 환난이 닥쳤을 때에 영원한 참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믿음을 얻고 항상 지혜를 얻고 항상 높은 인격으로 성장하고 항상 더욱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더 큰 것을 얻는다고 생각했지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소득이 있다고 생각했지 손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gain-oriented'--이득을 생각하는 자세,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격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잃어버린 것에 정신없이 빠져서 인생마저 잃어버리지는 마십시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허상을 잃고 진실을 얻었습니다. 명예를 잃고 겸손을 얻었습니다. 모처럼 진실한 사람, 진짜 사람이 한번 되어보는 것입니다. 항상 더 크고 더 소중한 것을 얻는다고 하는, 긍정적 자세가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낙관적인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joy-oriented'입니다. 감사와 기쁨을, 기뻐할 줄 아는 비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나눔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이 비결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찬송을 합니다. 그때의 심경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다메섹 도상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때를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사울아' 하고 부르시던 주님의 음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억울하게 맞아 죽는다 해도 찬송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름의 secret--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2:17)"---피를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4:15)"라고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만족하는 사람에게 속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유가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행복이 있습니다. 높은 지위가 사람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진실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 명예를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은 상당히 유족하게 사는 편인데도 안방에 들어가 보면 다 해지고 먼지가 묻은 룩색(rucksack) 하나가 한쪽 벽에 걸려 있습니다. 궁금해서 언젠가 물어보았습니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 저것 말입니까? 내가 38선 넘어올 때입니다. 인민군이 뒤에서 총을 마구 쏘아대는데 저것을 멘 채로 나는 그저 벌벌 떨면서 정신없이 기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도망을 쳐서 정신을 돌이키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룩색이 총알막이 구실을 한 덕분이지요. 그래서 저 보따리를 차마 버릴 수가 없습니다. 혹 사업이 어려울 때에도, 마음이 어지럽고 괴로울 때에도, 좀 불행하다 싶을 때에도 저것만 쳐다보면 마음에 감사가 일고 걱정도 없어지지요.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만, 625를 겪었던 사람은 절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지금 와서 허튼 소리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감히 불평하는 마음을 가집니까? 죄송스럽지도 않습니까? 간혹 제게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십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평생토록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시는데 그렇게 하루도 안 빠지고 한결같이 30년 동안이나 해 나오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결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마는, 그것을 오늘 이 시간에 공개하지요. 제가 고향을 떠나올 때에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고향집을 떠난 다음부터 이 어미는 언제나 너를 위해 기도하마." 제 어머니는 평생토록 새벽에 교회에 기셔서 기도하는 분입니다. 저 고생스러운 북한에서 새벽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저는 편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편하게 잠을 자면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습니다. 북녘에서 고생하는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렇다할 큰 것은 못해주더라도 같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는 하리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제가 새벽기도를 빠뜨리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 간증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나름의, 종류는 다를지언정 이 같은 비밀이 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항상 감사할 줄 알고, 항상 기뻐할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자기 비법이 있어야 합니다. 찾아보면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지 비법은 있는 법입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맨 밑바닥 끝까지 자기를 비하시키고 사는 사람은 어떤 굴욕을 당해도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밑바닥까지 이미 떨어졌으니까요. 맨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로, 그렇게 비하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당해도 억울할 것도, 분할 것도 없습니다.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보다도 스스로 그보다 더 낮고 더 천하게 나를 평가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이제는 남들이 나더러 죄인이라 한대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죄인보고 죄인이라 하는데, 나쁜 사람보고 나쁘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딤전 1:15, 고전 15:8)"라고 자기를 철저히 비하시켰기 때문에 어떠한 비난과 고통에도 불평 한번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바울은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nd-oriented world view'입니다. 끝까지 선을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고, 하나님의 지혜에 있고, 하나님의 경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순경(順境)도 역경도, 핍박도 환난도 순교도 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불행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끝에 가서는 해피엔드(happy end)로 끝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 영광에 내가 참여할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은 내 것이다'라고 믿었기에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관계치 않았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부하냐 가난하냐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의연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제목은 'Anyway'--'어쨌든'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무분별하고 터무니없고 이기적이다. 그러나 어쨌든 너는 사랑하라. 당신이 선을 행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혹시나 배후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어서 선을 행한다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선을 행하라. 당신이 성공하면 가짜 친구들이 나타나고 적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성공하라. 정직과 성실이 당신을 유약하게 할지라도 어쨌든 정직하고 성실 하라. 오늘 당신이 행한 선이 내일 잊혀진다 하여도 어쨌든 선을 행하라. 위대한 사람이 변변치 못한 생각을 지닌 소인들에 의해서 넘어지는 것을 볼지라도 어쨌든 크게 생각하라. 사람들은 패자의 편을 드는 것 같아도 실상은 승자를 추종한다. 그러나 어쨌든 너는 패자를 위하여 싸워라. 몇년 걸려 지은 것이 하룻밤 사이에 파괴되는 것을 본다 할지라도 어쨌든 너는 건설하라. 당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여러분, 환경에 좌우되지 마십시다. 세상이 변하는 것에 덩달아 맞물려 돌아가지 마십시다. 바울 사도는 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순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을 가졌으므로 결코 유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늘 자유 하였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감사하고 늘 찬송하면서 초연하게 성도 되어 가야할 길을 의연히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