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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신(고린도후서 5:20-21)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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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신(고린도후서 5:20-21)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오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의 신분을 가리켜 사신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신이란 '프레스베오멘' 이라는 헬라 원어를 번영한 것으로 영어로는 엠베서더(ambassdor), 즉 대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신으로 번역을 한 것은 어느 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주재 대사라기 보다는 어떤 정해진 사건을 위하여 임시로 보내지는 신분이라는 의미에서 대사로 번역하지 않고 사신으로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왕의 특사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왕의 특사란 왕의 특별한 명령을 받은 사람으로 특별한 임무와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왕을 대신하여 보내지는 신분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특사, 대사 혹은 사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지는 바 권위의 문제입니다. 이 권위는 자신의 권위가 아닌 보낸 이의 권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사를 맞는 편에서는 그 특사의 외모나 인격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가 누구의 이름으로 오느냐에 있으므로 특사를 보낸 분을 직접 맞아들이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를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특사의 지식이나 인격, 현재 그가 본국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나 신분 같은 것은 전혀 고려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본국에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 선정하여 보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왕이 보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위나 존재의 의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오직 보낸 자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보냄을 받는 자나 그를 영접하는 자가 다같이 생각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가끔 외국의 대사들이나 영사들이 함께 한 자리에 가보면, 각각 다른 나라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급장이나 훈장을 단 것도 아닌데, 거기에는 상당한 계급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계급이란 큰 나라, 부한 나라의 대사는 뻐기고 으시대는가 하면 작고 약한 나라의 대사는 기를 펴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나라는 대사관 집세도 제대로 낼 수가 없어서 쫓겨다녀야 할 정도이니, 그런 모임에 와서도 허리를 펼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비참할 정도로 기가 죽어서 지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문제는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 보냄을 받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의 보냄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의 권위에 합당한 위신과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담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나의 지식이나 재산, 신분에서 비롯되는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곧 사신으로서의 권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사신이라고 하면 왕이 아니면서도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왕과 같이 행세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왕의 권위, 왕의 마음으로 가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비굴함이나 초췌함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자기 나라와 자기를 보낸 왕만을 생각하면서 담대하게 나가야 하는 것이 곧 사신의 신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담력이 있느냐 할 때 생각해 봐야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신은 담대한 반면 한편으로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신에게는 교만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위는 자기의 권위가 아님은 물론 왕이 임시로 맡겨준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 교만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내 앞에 와서 머리를 숙여 굽신거리며 환대를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나를 보고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만할 이유가 없는 것이 바로 사신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언제 어디에서나 담대해야함과 동시에 교만할 수 없는 이중적 성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겠다며 1963년 처음으로 미국 갔을 때의 일입니다. 생전 처음 미국 땅에 떨어지고 보니, 그 동안 제법 영어 공부를 한다고 했음에도 들리는 것도 없고 말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자니 누가 곁에 오기라도 하면 도망가고싶은 마음이 앞서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제가 한국에서 온 목사라고 하여 매우 귀하게 영접해 주면서 예배 시간에 축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나는 영어로는 자신이 없으니 한국말로 해도 되겠느냐고 하였더니 그래도 좋다기에 우리말로 축도를 하고 내려왔는데 그 이후에 저를 얼마나 극진하게 대해 주는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저들이 내 이름을 압니까? 내가 저들의 이름을 압니까? 그저 예수 믿는다는 그것 하나로 인해 한국에서 온 이 조그마한 목사를 그렇게 대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정말 예수 덕 많이 보는군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담대하십시다. 하지만, 교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요, 예수님 덕분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전능을 주시고 그리고 보내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 사신의 임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두 가지의 측면, 즉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면에서 생각을 하면 사신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맡은 이번 일이 중요하다거나, 혹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가라고 했으면 가야 하는 것뿐, 현재의 자기 존재 가치를 두고 스스로 평가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부엌에서의 일이든 직장에서의 일이든, 혹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상에는 무슨 일을 하든 모두가 소중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것은 큰 일이요, 이것은 작은 일이라며 내가 스스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나는 사신으로서의 임무만 다하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자기에게 주어진 그 한 달란트를 소홀히 여겼음을 보게 됩니다. 그와 같이주어진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그리스도인 신분을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내게 맡겨진 일은 모두가 소중한 일이라는 확실한 인식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남편이 하는 일은 중요하고 아내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저 사람이 하는 일은 의미가 있고 내가 하는 일은 의미가 없으며, 때로는 내가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별 것이 아니라는 식의 평가는 절대로 할 것이 못됩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왕이 보낸 이상 모두가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신은 전해야할 메시지(Message)를 창작하거나 고쳐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이 전해야 할 내용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왕이 시키는 대로 가서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메시지를 놓고 자기 마음대로 바꾸거나 가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좀 알아야 되겠는데 아는 것이 없다며 주저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많이 알고 공부도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후에 전도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교회에까지 오게만 하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목사가 할 것이란 말입니다. 일반 교인이 언제 성경을 다 알아서 전도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교회에까지 나오게 하는 책임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전해야 할 말씀은 전문가인 교역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사신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설득을 할 수 있을까 하여 메시지를 창작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시는 절대로 자기 영광을 구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어떻게 환대해 주는 것은 왕이 보낸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지 사신에 대해서 아는바가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자기를 위한 것인 냥 좋아서 돌아간다면 참으로 못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경우를 풍자하여 원님을 태우고 가던 당나귀가 많은 사람들이 원님에게 인사를 하자 자기에게 하는 줄을 알고 꾸벅 꾸벅 인사를 받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인사가 원님에게 하는 것이지 어디 당나귀에게 한 인사더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가끔 어떤 선물을 받은 것으로 인해 아내로부터 그분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는 말을 듣고도 따로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보고 준 것이지 나를 보고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마음으로 교역자에게 한 것을 따라가면서 인사를 치를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그 점에 관한 한 철저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향한 것이지 목사인 나를 보고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신은 자기의 안락과 기쁨이 목표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는 적어도 자기의 감정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신에게는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니 잘해주고,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니 나도 잘못해 주고 하는 그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의 감정에 따라서 누구를 미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교육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거니와 특별히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자면 쌀쌀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똑 같이 대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교역자의 신분인 것입니다. 그 누구이든 자기 자신의 안락이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신은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절대 이탈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가끔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보면, 관계국의 대사가 본국에 상황 보고를 한 다음 본국으로부터 오는 지령을 받아서 그대로 답변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때에 지령이 빨리오지 않는다고 하여 대사 마음대로 말을 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이 걸리더라도 본국에서 오는 지령을 기다렸다가 그대로 전하고 시행해야 하는 것이 대사의 본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신인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지시를 기다려야 하고 그 지시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기다리는 시간이 괴롭고 지루하다하더라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적극적인 면에서 사신의 임무를 생각해 봅시다. 사신은 먼저 보내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왕이 북으로 가라고 하면 북으로 가고, 바벨론으로 가라고 하면 바벨론으로 가야할 뿐 내 마음대로 갈 곳을 정하거나 방향을 바꿀 권리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나의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도 다시스로 갔다가 큰 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가라시는 곳으로만 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신은 만나라고 한 자를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이 사람 저 사람 선택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인 한 분이 아프리카의 미개한 한 나라에서 3년간 대사의 일을 하고 돌아온 후 "밀림지대도 보고,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구경을 많이 하셨겠습니다."하는 말에 "사람 같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좋은 한국 음식 대접하느라고 식모 노릇하다가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이겠습니까? 거의가 벌거벗고 있는 미개한 나라에서 가정부도 없는 처지에 1년에 몇 차례씩 한국 음식을 차려놓고 그 나라의 고관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하노라면 옷을 입은 듯 마는 듯 한데다가 신발도 신지 않고 다니던 발로 집안에까지 그대로 들어와서는 차려 놓은 음식을 손으로 마구 집어먹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상만 하여도 어처구니가 없는 장면입니다 마는 그래도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위해서는 계속 대접을 해야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나로서는 저들이 좋은 것도 반가운 것도 아니지만, 나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계속 저들을 만나며 대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키신저가 모택동을 만났을 때에 무슨 마음으로 포옹을 하고 키스를 했겠습니까? 저는 사진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한참 동안 웃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키신저가 늙은 모택동이가 예쁘고 정겨워서 키스를 했겠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라하니 갔으며 만나라고 하니 만났고, 친절하게 하라하니 다가가서 끌어안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찾아가서 반갑게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신은 존경과 체면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의 대사로 왔기 때문에 대사인 내가 잘못하게 되면 곧 그리스도에게 욕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외교관 하나가 실수하게 되면, 그 나라 전체가 욕을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외국에 나가기 전에 소양 교육을 받으러 가보면, 계속 강조하는 말이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이 모두 외교관입니다."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외교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내가 외교관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외국에 나갔을 경우 내가 잘못하게 되면 한국 사람은 나쁘다고 할 것이며, 내가 좋은 인상을 주었을 때에는 한국 사람은 좋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예수님의 체면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얼굴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의기분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면 그리스도의 높으신 이름을 생각하며, 거기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신은 용기와 담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신의 맡은바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언제나 담대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사신은 자질 향상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 주재하는 외교관들을 보면, 우선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문화나 풍속은 물론 정치, 경제, 산업, 자원 등에 관한 세밀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본국으로부터 그 나라에 관한 어떤 질문이 오더라도 그때 그때에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합니다. 이는 저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고민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대비하므로 전도가 용이하고 설득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한 사신은 인내해야 합니다. 어떠한 모욕과 핍박을 받더라도 맡은 바의 임무 수행을 다할 때까지는 끝까지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의 사신인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인가할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인 우리들은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죽어주셨다는 귀중한 사랑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사신은 하나님과 사람과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언젠가 한번 제가 열심히 연애를 했으면서도 결혼을 못할 지경에 이른 처녀 총각에게 결혼을 성사시킨 일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한참 연애를 하던 이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장인 장모가 될 처녀의 아버지 어머니가 딸의 애인 되는 총각을 싫어해서는 절대 딸을 줄 수 없다며 여간 성화가 아닙니다. 일이 그쯤 되고 보니 양쪽에서 오고 가는 말들 또한 보통으로 험한 것이 아닌지라, 이 딸은 중간에서 울고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가 있다가 그 딸아이에게 "너 정말 그 남자한테 꼭 시집을 가고 싶으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꼭 가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러면 너 부모님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싶으냐? 아니면, 부모님의 축복을 받으며 가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야 물론 부모님의 축복을 받으며 가고 싶지요."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런데 왜 그렇게 미스터 김 앞에서는 부모님이 너 욕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또 부모님 앞에서는 미스터 김이 어머니, 아버지를 좋지 않게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했느냐? 그렇게 나쁜 말만 하고 돌아다녔으니 어떻게 일이 되겠느냐? 그래가지고는 화해가 되지 않는다."하고서는 한 달만 기간을 두면 되는 일이니 이렇게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 아무리 나쁘다 하다가도 조흔 이야기가 한 마디쯤은 있을 것인, 그러면 미스터 김한테 가서 아버지가 그래도 미스터 김이 남자답게는 생겼다고 하시더라는 등 이래 저래 좋게 하신 말만 옮기고 또한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미스터 김이 어머니, 아버지께서 철저하게 반대하시는 것을 보니 고집도 대단하시지만 의지가 굳으신 분이라고 말했다고도 하면서, 이쪽 저쪽을 오가며 한 달 동안만 칭찬을 전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고맙게도 이것이 적중하여 부모님의 축하를 받으면서 복된 결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화해는 서로 좋은 뜻을 전할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과 하나님과 화해케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화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하는 이 말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을 놀랍도록 사랑하시고 그리고 초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모르기 때문인지 본래는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좋은 사람들이니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해자란 어떤 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장점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기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을 화해시키고 싶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좋은 말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는 너만 생각하면 죽고 싶다더라."는 말을 들려준다면 어떻게 화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떠냐며 너 보는 재미로 사신다더라"고 말하면 거기에는 불화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사신에게는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화해는 하나님께서 먼저 원하고 계시는 바입니다.

우리가 화목케 하는 자의 책임을 다하고 그 능력이 나타나게 될 때, 사신으로서의 임무 수행을 완수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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