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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됨의 비유(디모데후서 2:1-4, 디모데전서 1:18-19)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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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됨의 비유(디모데후서 2:1-4, 디모데전서 1:18-19)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아들 디모데야 내게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 는 파선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을 군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을 군인으로 비유한 것은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군인'이라고 말하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앞서 우리는 그 맥락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봄이 좋을 것으로 압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군인에 관한 용어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매우 가까이 따르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8:10)고 크게 칭찬을 하신 대상도 백부장인로마의 군인이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예수를 믿는 것도 군인 정신으로 믿는다면, 그야말로 우등생 교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박애주의자로 쉽게 평가해 버리기도 합니다 만은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라 하여 불의와 죄악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누가복음 22:36 말씀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매우 긴박한 위기의 시간이 왔음을 암시하는 말씀인 줄 압니다. 또한 마태복음 10:34 말씀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싸움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을 안일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은 모든 경우에 용서와 사랑으로 대해야 된다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를 사랑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대한 한계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화평이면 제일인 줄 알고 이를 앞세우기도 합니다 만은 화평이 먼저가 아니라, 의가 먼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화평이 아닌 검, 곧 싸움을 주러왔다고 하신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군인과 같은 자세와 정신을 요구하신 것을 자주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12 말씀에도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며 군인의 침공 행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군인들이 적의 진지를 쳐들어 갈 때 먼저 포위를 한 다음 그 포위망을 점점 좁혀 들어가다가 마침내 와! 하고 돌격해 들어가는 장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침공의 시간에 무슨 딴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적을 향하여 명령을 따라 돌격할 뿐인 그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고 믿는다는 것도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군인이 적진을 향하여 돌격을 하는 그 순간은 나의 생명이 아깝다거나 책임져야할 가족들이 있다는 등의 그 어떤 말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 순간에는 오직 장군의 명령이 있을 뿐 이미 내 목숨도 던져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매우 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군인이란 하나의 힘의 대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양보는 물론 타협이나 화목 같은 것은 없습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는 것이 바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싸움이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서신들을 통하여 '싸운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항상 누구, 혹은 무엇과 싸우느냐하는 그 대상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과 마귀와 더불어 싸운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하고 지나갈 것은 우리가 흔히 쓰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우선, 이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기독교적인 개념과 불교적인 개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자기라고 하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육체적인 본능이나 현상들을 모두 속되고 죄악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적인 본능이나 욕망, 생각을 그대로 죄악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완전한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자기와 싸운다는 것은 중생한 자기와 싸운다는 것이 아니라 타락된 자기, 죄에 물들어 있는 자기와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하는 대상은 죄와 사망, 마귀, 사탄, 불의 등과 싸우는 것이지 결코 자기라고 하는 존재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다 그렇듯이 군인에게도 좋은 군인과 좋지 못한 군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좋은 군인을 말하고 있음인데 거기에는 그만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의 군인은 요즈음 우리와 같이 국민의 기본적 의무로서 군 복무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얼마 동안 군인이 되겠다는 계약과 더불어 보수를 받으며 싸우는 용병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국가관이나 충성심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돈 때문에 돈을 받고 싸워주는 직업 군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연유로 군인이 된 사람들은 돈만 생각하고 상사의 눈치만 살피면서 자기의 안일을 꾀하는가 하면 실전에서 생명을 앗아갈 위기를 맞게 되면 "내가 왜 죽느냐?"는 생각으로 달아날 수도 있는 것이니, 이는 분명 나쁜 군인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을 고려하여 오늘본문에서는 좋은 군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군인이란 자원적인 군인입니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싸운다는 그 목적과 뜻이 좋아서 목숨을 충성심으로 싸웁니다. 그리고 대장이 명령하는 바를 즐거운 마음으로 따릅니다. 만약 그렇지를 못하고 "이렇게 하라"는 명령 앞에서 "내가 어쩌다 여기에 걸려든 신세가 되었나? 빨리 세월이 지나서 계약한 기간을 어서 마치고 돌아가야지!"하는 생각을 하는 터이라면 그는 나쁜 군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군인이란 싸움의 목적을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여 돈과는 상관없이 이 일을 위해서라면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과 각오를 하는 사람이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군사"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할 때 우선 철저한 군인이어야 한다는 거십니다. 아시다시피 군인이란 다른 직업과는 다릅니다. 다른 직업은 대체로 집에서 출퇴근을 하며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고, 갑작스레 무슨 일이 생기거나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결근계나 전화 한 통화로 안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군인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군인이란 군인 그 자체의 신분이 있을 뿐 다른 어떠한 신분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이 부업을 가졌다거나 군복을 입은 차림으로 장사를 한다면 그는 분명 군인의 신분과 직무를 벗어난 나뿐 군인인 것입니다. 군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군인의 일밖에 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군인은 꿈을 꾸어도 군인의 꿈을 꾸어야 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싸움터에 나와 있는 군인이 잠시 조는 사이에도 예쁜 아가씨 꿈이나 꾸고 있다면야 어떻게 전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군인은 꿈을 꾸어도 철저히 군인다운 꿈을 꾸어야 온전한 군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군인을 두고 보면, 우선 정해진 자기 옷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있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군인은 좋아도 군복 나빠도 군복입니다. 게다가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만 하더라도 보급 사정이 좋지 않아서 헌옷 받아 입고 세탁도 못한 채 그냥 그대로 지내고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누구하나 군소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터의 군인에게는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이지, 옷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군복은 군복일 뿐 새옷이면 무얼하고 더러우면 어떻습니까? 군복은 한번 입어 놓으면 군복이라는 그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한 역할을 다하게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길에서 쉽게 만나는 깨끗한 차림의 군인들은 외출하여 다니느라고 차려 입었으니 그런 것이지, 일선에 있는 군인들이야 어는 세월에 바지에 줄을 세우며, 구두에 광을 내겠다고 앉았을 수가 있겠습니까? 일선에 있는 군인들이야 옷에서 피비린내가 나고 약 냄새가 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군인에게는 군복 뿐 다른 옷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군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군인은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아니함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군병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일에 앞서 사적인 일을 너무 앞세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군인에게는 사적인 일이 통하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 결혼식을 했다하더라도 '소집'하고 통보가 내리면 그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군인입니다. 그 앞에서 "나 오늘 결혼했으니 신혼 여행이라도 다녀와서 가겠습니다."하는 말이 통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저 아내와 자식이 있던 없던 이리 가라하면 이리로, 저리가라 하면 저리로 명령을 따라 지체없이 행동해야 하는 것이 군인입니다.

가정을 아무리 사랑한다하더라도 군인에게는 가정이 먼저가 아닙니다. 군인에게는 나라에서 부르면 모든 것을 제쳐놓고, 살든 죽든 나가서 싸워야 하는 것이 먼저요 의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군인은 군인 하나의 신분뿐인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잔소리가 많고 앞세우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할 것은 군인은 절대로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하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않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새벽 기도회에 나오고 싶은데 워낙 집이 멀어서 못나온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그 자리에서는 듣기 싫을 것 같아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만은 제가하고 싶은 말은 집을 팔고 오면 되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제가 집이 없는 사람이어서 쉽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은 무엇 그리 대단한 집이라고 그것 붙들고 있노라 새벽 기도를 못나오느냐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장로님 한 분은 새벽 기도 나오기 위해서 자기 집 팔아버리고 가까운 곳에 전세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간단한 처사입니까? 복덕방에서 하는 말에 의하면, 신사동, 압구정동 일대에 집 값이 계속 올라가는데 그 이유는 소망 교회 교인들이 교회 가까이 에서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집을 구하러 와서 하는 말이 "여기 와서 새벽기도 나가며 예수 잘 믿고 살다가 죽으려고 그러니 값이야 어떻든 집 한 채만 구해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사람 몇 명만 있어도 집 값은 올라가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선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사사로운 감정, 사사로운 이익에 매여서는 아니합니다. 대개 보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발단도 사사로운 감정이나 일 때문에 비롯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사로운 것들을 완전히 벗어 버려야만 본래적인 좋은 분위기를 회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군인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공부가 우선이며, 그래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이이 생각 저 생각 다하고 나면 공부는 언제 하겠습니까.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만은 특별히 군인은 절대적으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군인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입니다. 맨 위에 있는 장군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른이 있고 또 있고, 그렇게 하여 마지막에 대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장께 절대 복종하며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군인이 되려면 대장을 기쁘게 하는 자라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대장을 기쁘게 하는 것일까 할 때 그것은 자율적인 충성을 하는 일입니다. 충성을 함에는 억지로 하는 것과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에도 보면, 어떤 아이는 시키자마자 ""하고 즐겁게 뛰어나가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시무룩해지면서 못마땅해 할 때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거듭 "가라"는 말로 재촉을 하기 마련이고 마지막에 아이는 퉁명스럽게 "가요 가"하고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기는 가지만 보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만 두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군인은 대장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장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명령에 따라는 자신도 기쁜 마음으로 충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장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고난에 동참해야함은 물론대장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 분은 끝까지 나라를 위하고 또한 우리 대원을 위한다는 신뢰를 가지고, 때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명령이 있다하더라도 그래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하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하들이 사관을 전적으로 믿어 줄 때 그 대장은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대장을 계급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기합이 무서워서 계급 때문에 억지로 순종해 놓고 돌아서서는 욕이나 하고 한다면 그는 대장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공로와 영광은 대장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서 아는 대로 싸우기는 맨 아래 사람들이 싸우고 훈장을 탈 때에는 언제나 부대장이 탑니다. 그렇다고 해서 "싸우기는 내가 싸웠는데요."라며 따지는 군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장을 기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이렇게 좋은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군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최 일선에 있을 때에 참으로 마음 아픈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기관단총만 보면 그 일이 문득 문득 생각이 나고는 합니다.

옛날에는 총이 귀했기 때문에 625때에 기관단총을 처음 보았습니다.

하루는 같은 부대에 있는 제 친구에게 친구가 왔는데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하게 생긴 이 기관단총을 보고는 "그것 어떻게 쏘는 거냐?"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친구가 "이렇게 쏘는 거다."하고 ""하고 쏜 것이 친구를 쏘아서 죽게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 친구가 아주 미쳐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할 때 그 원인은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총 하나를 다루는 일이 한 두 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이렇게 쏘는 것이다 하고 배우는 시간만 따진다면야 30초만 하여도 다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총 하나를 완전히 다룰 수 있기까지는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강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강한 훈련을 몸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의 엠 16총은 가볍습니다 만은 옛날의 엠원(M1) 총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들어보면 이런 것을 들고 어떻게 싸웠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거운 엠원 총도 며칠을 들고뛰어 다니면서 훈련을 하고 나면 막대기처럼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군인에게는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강한 훈련으로 몸과 마음을 단련해 둠으로 어느 때 불러도 나가 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하고 완전한 군인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좋은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의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저에게 "목사님 새벽기도 매일 나오시려면 피곤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어 보는데 그럴 때이면 제가 "이것도 도사가 되려면 3년 이상 걸립니다."하고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몇 년이 지나야 체질화되어서 잘 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전 안 하던 사람이 시작해 놓고 보면, 처음 몇 달 동안은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군인은 장시간의 강도 높은 훈련을 쌓음으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좋은 장군이 좋은 군인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좋은 군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하고 나면 모두가 좋은 군인으로 평가됩니다. 반면에, 패전국의 군인은 모두가 나쁜 군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로 끌고 가는 훌륭하고 강한 장군 밑에는 약한 병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장군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부족함이 없는 강한 장군이시기에 그를 따르는 병사는 모두가 다 강하고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 세상을 이기신 장군의 음성입니다. 우리 또한 완전하게 승리하신 장군인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승리하고는 강하고 좋은 군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히 대장과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대장이 고난을 당할 때에 기피한 병사는 대장이 영광을 얻을 때에 나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이 어려운 일을 당한 그 곳에서 함께 고난에 참여한 병사는 대장이 영광을 얻을 때에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로마서 8:17 말씀에 보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10말씀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군인으로서 앞서 가시는 우리의 대장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면서 마귀와 사탄, 죄와 불의, 정욕과 율법으로 더불어 싸우고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먼저 싸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약속된 승리를 바라보면서 남아 있는 작은 싸움을 마저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나가서 싸워 이기는 일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함에는 패전의 염려 같은 것은 조금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7 말씀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이 말씀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이어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인해서 넉넉히 이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자신 만만하게 싸움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승리는 곧 우리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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