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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사도행전 26:24-29)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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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사도행전 26:24-29)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니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어느 실업가에서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같이 앉아서 담소할 기회가 있어 여러 가지 얘기들을 주고받던 중 자녀들에 대한 문제에 이르렀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자기 아들은 제발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람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실업가는 이 말을 들은 후로 그 목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사업가들은 일을 하다가 보면 가끔 자기가 하는 일에 후회도 하고 낙심도 하지만 성직자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니, 진정한 성직자라면(물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자기가 택한 일에 만족하며 자기 자식에게도 제발 같은 길을 걸어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미국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같이 예배도 드렸고, 여러 가지 교회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떠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만일 다시 태어나도 목사가 되고 싶은데 꼭 한국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처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후회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날에 대서 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또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는 내가 그 때 공부를 좀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등 여러 가지 후회할 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후회는 과거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불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단지 과거에 대한 후회로 나타나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라는 것이 세계관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과거도 보고 미래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지난날들의 일을 잊어버리거나 또 잊지 않았더라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그 때 내가 배신을 당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또는 그 때 내가 병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즉 현재에 만족한 사람은 지난날의 모든 일(잘되고 못된 것 가리지 않고)이 다 합쳐서 잘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있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있었다라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대한 후회, 뉘우침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현재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인간 관계 등 무엇이든지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불만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현재에 대한 불만도 현재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미래가 암담하고 불투명하고 아무 보장이 없기에 현재가 불안하고 자신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망한다는 것뿐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소망은 하나도 없습니다. 절망적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 약혼을 하고 결혼 날짜를 기다리는 아가씨가 있다고 합시다. 지금 그의 여건에 좀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는 불만할 것이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의 불만은 참을 수 있고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원망, 불평, 성공, 실패의 원인이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오늘에 불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된 미래, 확실한 소망만 있다면 현재의 고난은 다 정당화할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에 보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즉 장차 나타날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도 문제되지 않고 다 소화하고, 다 흡수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현재 자기 지위나 소유나 처지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최상의 행복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하나님이 은혜로 내게 주신 분복이요,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헬라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집이라고 는 나무통 하나가 있었는데 다닐 때는 통을 굴리면서 다니다가 적당한 데 세우고서 그 나무통 안에 들어가 하루 밤을 자고 또 아침이 되면 굴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헬라에서 유명한 철학자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어느 날 만났습니다. 대왕은 디오게네스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디오게네스는 "특별한 소원은 없습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지금 내가 햇빛을 쪼이고 있는데 국왕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방해가 되오니 조금만 옆으로 비켜주셨으면 합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때 알렉산더 대왕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걸세." 만일 내가 왕이 아니라면 네가 되고 싶다라는 말입니다.

자기 존재, 자기 가치, 자기 처지를 깊이 알고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다윗 왕은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읊었습니다. 원문에는 아무 소원도 없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만 기도하는 것을 보면 소원이 너무 많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대로 좋습니다. 이대로 만족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자기 불만의 발산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기 노력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자기 된 바에 대한 감사와 만족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의 절정을 살아가는 인생이 신앙인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바울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고 사는 자에게는 만사형통 해야 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이상하게도 얽혀서 법정에 서게 됩니다. 로마 총독 앞에서 생사 문제를 놓고 바울은 일장 연설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 말을 다 들은 베스도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이렇게까지 비난을 했습니다.

고난도 당하고, 환난도 당하고, 핍박당하고, 매맞고, 투옥되고, 억울함을 당하고, 마침내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는 이 순간에도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하고도 놀라운 신앙을 이 순간에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게 되기를 원하노라." 즉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미래적 의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매맞은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훈장으로 바뀔 것이고, 오늘 내가 능욕을 당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는 영광으로 바뀌어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는 이 모든 것이 자랑스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행복했고 만족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믿는 바에 대하여 확실하고 절대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내가 믿고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천벌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내가 믿는바 십자가의 도리가 너무나 확실했기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을 지녔기에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믿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지금까지 그가 좋아하던 지식과 명예와 족보를 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즉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에 그 동안에 얻은 많은 지식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 얘기입니까? 그는 복음에 대한 지식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잘했고 그 감격이 넘쳐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기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은 영원히 가치의 것이고, 언제 생각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어떤 분들은 녹음해 놓은 설교 테이프를 한꺼번에 10개씩 사가는 것을 봅니다. 내가 들은 말씀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고, 내가 받은 그 감동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그 마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내가 들은 것을 얼른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들은 귀한 복음의 말씀을 꼭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행복입니다.

나의 나 됨, 은혜로 된 나, 현재 이대로의 나를 감사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니 무한히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영광과 긍지와 자랑에 살았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에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서 일생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기뻐하며 살아갔습니다. 새 술에 취하고 그리스도에 붙들린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뿐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인 자세로서 "당신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즉 나처럼 믿고, 나처럼 알고, 나처럼 행하고, 내가 가는 길을 여러분도 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전도가 있고, 여기에 선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적극적인 면이 없습니다. 내가 나가는 교회에 자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한 번만 같이 가보자고 권면할 수 없습니까?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라고 하면 성경을 잘 몰라서 전하지를 못하니 우선 성경공부를 하고 전도하겠다고 합니다. 설교는 목사가 할 일이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까지 데리고만 오면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도 깨달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그것으로 전도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벅차고 넘쳐서 외국까지 좇아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여러분, 내 자녀도 나 같기를 바라고 내 친구도 내 마음 같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행복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즉 나를 닮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참 지혜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는 자체는 만족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치지 못할 과거를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벅찬 감격과 내 생애 최고의 절정을 누리며 벅찬 은혜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좀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까? 은혜 안에서 나의 나 됨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불평과 원망도 많은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은혜 안에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이 날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 처지와 오늘을 감사, 감격할 수 있는 깊은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요, 분복이요, 축복임을 알게 하사 여기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리고 온 생을 바치며 여기서 이대로 끝나도 아무 후회도 뉘우침도 없는 영광과 감격에 살아갈 수 있는 귀한 생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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