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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의 소원(누가복음 15장 17절~24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대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라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지금 우리는 아버지 없는 사회로 가는 길 위에 있다'라고 어떤 사회학자가 탄식했습니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가부장적인 지배형태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지나치리만큼 엄한 가부장제도(家父長制度)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로부터 별로 시간이 흐르지도 않은 지금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무참히 짓밟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있게 자란다는 것과 아버지 없게 자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자란 사람과 아버지의 권위를 모르고 자란 사람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오늘날, 사회질서가 어지러워진 원인은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들의 불량기에 있습니다. 질서도 없고 정의도 없고, 공의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야 우리의 사람된 존재가 확정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는 인간 존재 자체도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40년 역사에서 역력히 보아왔습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부정했더니 사람도 없더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프로이트(Freud, Sigmund)는 '사람은 아버지의 이미지에 따라서 그의 신관(神觀)이 결정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어떤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관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의식도 달라집니다. 비근한 예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신학을 들 수 있습니다. 루터의 신학은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창세기의 홍수사건을 설명한 것만 보아도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서운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듯 하나님의 진노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랄 때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매질을 많이 당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언젠가 좌담을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라고 하면 언제나 매질하는 무서운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미지(father image)' 란 그 사람의 인생관에 그렇듯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 공간에 버려진 미아(迷兒)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보호를 받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공경하며, 그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된 바른 모습이 이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철학적인 하나님도 아니요, 자연과학적인 하나님도 아닙니다. 율법적인 하나님도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주기도문에도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 개념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당시에 생각하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먼저, 생명의 근원입니다. 생명이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아버지는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고 경륜하십니다. 그 경륜 속에 우리가 삽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명예와 신분을 물려받습니다. 귀족의 자식은 귀족입니다. 양반의 자식은 양반입니다. 왕의 자식은 왕자입니다. 그리고 노예의 자식은 노예였습니다. 이렇듯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권세와 신분은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기업을 우리에게 물려주십니다. 미래를 보증하십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거의가 아버지의 기업을 자식들이 이어갔습니다. 자식이 기업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음으로 미래를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는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는 바,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진노적이면서 공의로운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자애로운 것이라고 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공의로운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한다.' 때로는 아버지의 사랑이 침묵합니다. 때로는 매로 나타납니다. 그 침묵의 깊은 곳에, 그 매질의 깊은 곳에 엄청난 사랑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귀중한 비유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이라 할만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때로는 탕자를 너무 극대화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때로는 집에 남아 있던 큰아들의 훌륭함을 부각시켜서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아닙니다. 탕자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탕자비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의도는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타나는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입니까? 허용하는 아버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고약한 아들을 둔 것도 한심하거니와 그런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또 있습니까? 우리네 상식으로는 분명히 어수룩한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야말로 정녕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사랑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사랑에는 허비성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음과 재산과 명예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 14,15)"---나의 모든 것을 허비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탕자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가출을 허락하는 바보스럽고 무능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아버지의 깊은 소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발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그 깊은 곳에 깃들여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아버지는 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재산 따위야 다 버려도 좋으니 부디 좋은 아들이 되어서 돌아와다오----이것이 소원입니다. 탕자는 지금까지 무엇을 달라고 할 때, 청구서를 내보일 때에만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달라고 할 때가 아니고는 아버지를 찾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소원하는 것입니다. 네게 준 재물을 네 밤대로 쓰고 다녔어도 좋으니 돌아올 때에는 부디 깨끗한 마음으로 와서 '아버지'라 불러다오----아버지의 소원은 그뿐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소원은 없습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아들이 되어 돌아와 달라는 그 하나의 소원이 있어서 엄청난 낭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비웃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한결같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없는 사랑으로 아들을 기다립니다. 끈기 있게 기다립니다. 출세해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탕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탕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지 번연히 알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엄청난 믿음이요 엄청난 소원입니다.
또한, 아버지에게는 탕자가 어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성장하고 깨달아 주기를,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불렀던 노래 가운데 요즘 아이들도 곧잘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그린 그 가사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하는 내용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그것은 노래의 가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실제로 부모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나 알 것 같습니까?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가 겪어보지 않고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흔히들 "너도 커서 자식을 두어봐라"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식을 낳아 겪어보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결코 남의 이야기로 돌리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추운 겨울날 길을 지나다가 아파트 밖의 길가에 나와서 벌벌 떨고 서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안쓰러워보이기에 다가가 왜 그러고 서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운데 집에서 기다리지, 왜 밖에 나와 기다리느냐고 했더니 말하더군요. "아닙니다.
제가 젊었을 적 집을 나와 늦게 돌아올 때면 늘 문밖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리시다가 제 손목을 잡고 왜 이리 늦었느냐고 하시면서 울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서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보니 그 여인, 쉰 살쯤 된 것 같습디다. 사람이 철들기란 이렇듯 어려운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이런 경험 저런 경험, 이런 실패 저런 실패를 모두 겪으면서 빨리 성장하기를, 그래서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이요 어리석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간절한 소원이 있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불량 청년이 여러 차례 범죄를 하여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또다시 범죄 하여 이번에는 십 년 징역 선고를 받습니다. 선고를 받고 쇠고랑이 채워진 채 법정을 나서는 아들을 보고 그 어머니가 재판정에 주저앉아 엉엉 웁니다. 딱하게 여긴 판사가 그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말합니다. "그런 몹쓸 자식, 이젠 포기하세요. 잊어버리세요" 순간, 그 어머니는 눈물을 씻고 정색을 합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천만에요! 절대로 단념할 수 없습니다. 20년 30년, 아니 무기징역을 산다 해도 나는 내 아들을 단념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라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단념하여 내버린다 해도 부모 된 자는 그 자식을 마음에서 내몰지 못합니다. 그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가느라면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참으로 구슬픈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아들들 중에서 유난히 잘나고, 출중했습니다. 어느새 국민들의 인기가 그에게 모이면서 마침내는 맏이를 제치고 이 셋째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압살롬은 왕위를 계승할 큰형을 제치고 왕이 되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그는 세력을 모아 아버지 다윗 왕의 신복을 살해하고, 아버지마저 해치려듭니다. 다윗에게는 저를 넉넉히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보좌를 내놓고 정처 없이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아들을 죽일 수 없어서, 차마 아들과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서 보좌까지 내놓고 광야의 길을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치 않으십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 안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자 다윗왕은 오열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고 울부짖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렇듯 아버지의 사랑은 주도적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적극적이요 창조적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잃은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 백 마리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놔두고 그 잃은 것을 찾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열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를 잃었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잃은 것은 찾아야 한다'----성경은 사랑의 적극성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아버지의 적극적인 사랑을 말씀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적극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재물은 잃어버렸다고 해도 땅에 묻혔으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인격입니다. 아들은 지금 멀리 도망을 갔습니다. 찾아간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기다릴 뿐입니다. 아들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다림, 이것이 적극성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절)"----먼 거리에 있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나가 맞습니다. 아마도 그 아버지는 여러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저렇듯 아들을 간절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지금 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알아볼 수도 없는 먼 거리이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아들임을 압니다.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영접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1989년, 중국의 외교부장과 그 일행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외교적인 방문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미국의 방송들도 앞다투어 내보냈습니다. 미국에서 텔레비전으로 그 모습을 보던 한국인 노인 한 분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에 비친 그 일행의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은 내 아들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모두들 칠십 세 노파가 망령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하도 성화를 하는 바람에 자녀들이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가족은 일제 때에 중국에서 줄곧 살다가 해방이 되어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졸업반이었던 큰아들만 중국에 남게 되었는데, 그것이 영원한 이별로 이어졌습니다. 그후 서울에 있던 나머지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중국의 공산화로 그들은 이산가족이 된 채 35년을 보냈습니다. 중국에 있던 큰아들은 세월 따라 중국에 동화하고 마침내는 중국 외교부의 고위직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일본방문단에 끼어 외교부장관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름도 나타나지 않아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만은 스치듯 지나가는 화면만으로도 자신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본문말씀에서도 보지 않았습니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대번에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지 않습니까? 부모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복귀에 있어서도 적극적입니다. 탕자를 아들로 영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수속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이렇듯 빠를 수가 없습니다. 물어볼 말도 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것 말고 다른 조건이 필요없습니다. 그간의 걱정근심이며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푸념이 없습니다. NO condition입니다. 어떠한 조건도 필요치 않습니다. '아버지'라 불러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만약 그 아버지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놈아, 그러게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돈은 얼마나 남겨 가지고 왔느냐?"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도 캐보지 않았고, 자신이 겪어온 고통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장난이 너무 심한 아이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아이로 인하여 그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속을 썩입니다. 녀석이 아이들과 싸워서 상처를 입힌다든지, 남의 물건을 깨뜨린다든지----하루도 사고 안치는 날이 없습니다. 보다못해 아버지가 꾀를 짜냅니다. 아들에게 일주일 동안만 말썽을 안 부리면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자전거가 몹시 가지고 싶었던 터라 아이는 용케도 일주일 동안 사고를 한번도 안내고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면서 말합니다 "얘야, 이렇게 착할 수 있는데 그 동안은 왜 그렇게 말썽을 피웠느냐?" 그랬더니 그 아들, 자전거를 팽개쳐버리고 뛰쳐나가더랍니다. 말 한마디가 이렇듯 중요합니다.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단 하나라도 조건이 들어 있다면 그 아들은 다시 집을 나가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무조건 아들을 용서합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완전히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큰 기쁨으로 아들을 맞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기쁨 속에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아들이 모든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죄송스런 마음과 죄책감을 다 묻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기쁨에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아들에게는 본래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이것이 아들의 생각이요, 자기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고백을 할 겨를도 주지 않습니다. 종들에게 명하여 좋은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좋은 신발을 신겨라 하면서, 풍악을 울리게 하여 잔치까지 벌입니다. 아들의 귀가(歸家) 그 자체를 이토록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보십시오. 그에게서는 도무지 염치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내주시는 의복이며 신발이며 보석을 넙죽 받을 수 있으며, 벌어진 잔치에 버젓이 참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믿음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염치없어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뻐하시니 어찌합니까? 아버지의 소원은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는 이 한 가지 기쁨에 더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아버지의 이 벅찬 기쁨을 함께 수용하고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여러분, 효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자녀가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이런 자식이 효자입니다. 용돈 몇푼 드리는 것으로 효도했다고 자위하지 마십시오. 부모님은 자식이 기뻐하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자식의 자기정체는 두 가지입니다. 스스로를 율법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전혀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소원과 그 기쁨을 생각하면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기다리심과 영접하심을 생각하면 나는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깊은 사랑으로 아들을 기다렸고, 커다란 기쁨으로 아들을 영접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걸. 아버지가 이렇게 사랑하시는 줄을 알았다면 돼지먹이로 연명하는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을"----아마도 이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효란 아버지의 사랑과 소원 안에서 자녀된 존재를 발견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내 소원을 깨끗이 버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수용하십시오. 내 기쁨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을 때, 그것이 비로소 효(孝)인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이요, 그것이 은혜임을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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