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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고난에서 받은 은혜(베드로전서 2:18-25)

by 【고동엽】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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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서 받은 은혜(베드로전서 218-25)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어린아이가 '으앙'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괴롭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생리적인 현상입니다만 그보다는 어린아이의 생후 첫 울음을 그렇게 해석하는 인생관이 문제입니다.

정녕 인생이란 울면서 왔다가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가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인생을 고진감래(苦盡甘來),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또한 눈물로 밤을 세워 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고생을 겪어야 사람이 된다, 심지어는 고난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설명을 해도 고통이 괴롭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인생의 이러한 괴로움은 어느 특정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입니다. 간혹 "저 사람에게는 나 같은 고민은 없겠지?"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조차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지금보다 10년 전이 더 좋았어"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바로 10년 전 그 당시에는 괴로웠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괴로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하나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모면하려 하거나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왜 고난을 당하는지 고난의 의미와 고난에 임하는 자세와 고난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본문에서는 고난을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요, 둘째는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요, 셋째는 스스로 자원하는 선한 고난입니다.

첫째로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고난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려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세상을 복잡하고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잘못을 남에게 책임 지울까?' 하는 간사한 생각이 우리를 번민하게 만듭니다. 모든 고민의 근본은 위선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남에게 그 잘못된 일의 원인을 덮어씌우려는 그릇된 생각에 고민의 근본이 있으며 여기에서 인간의 갈등은 시작된다고 봅니다. 공자는 "네가 남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보답이 없거든 네가 베푼 사랑에 잘못이 없었나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했지만 그 반응에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면 먼저 나의 사랑과 수고에 부족한 것이 있었나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이 점점 더 죄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백성들을 모아놓고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누구의 나귀를 내가 취했더냐? 누구의 빚을 갚지 않았느냐? 누구든지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당장 말하라"고 합니다. 그는 백성들의 타락을 보면서 자신이 불의를 행한 적은 없었는가 먼저 생각하고 이것을 회개하고 난 후에야 백성들을 위해서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잘못된 일의 원인이 언제나 내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만일 그것이 나 때문이요 내가 지은 죄나 나의 게으름 또는 나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면 내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겠습니까? 죄로 인하여 받아야 하는 형벌을 피하기 위해 꿇어 엎드려 있는 것이 결코 회개는 아닙니다. 적어도 회개란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하는 순간, "하나님이여, 이 죄 때문에 오는 어떠한 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무조건적인 항복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벌을 피하려고 이리 쫓기고 저리 변명하는 거짓된 마음을 회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당연한 것이며 이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자세가 바로 은혜의 길,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둘째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스콘 아비코스'인데 파스콘이란 고난을 뜻하며 아비코스란 의롭지 않은(unjust), 불합리한, 부당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파스콘 아비코스'란 부당한 고난, 곧 애매한 고난이란 뜻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모순되고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 사람의 부주의로 불이 난 경우 나의 잘못은 전혀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우리 집까지 불에 타버리게 됩니다. 또 나는 조심스럽게 차를 잘 운전하였지만 뒤에 오던 자동차 운전수가 추월하려다가 내 차를 받아 버렸다면 본의 아니게 나는 손해를 보고 맙니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지만 이 세상에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당하는 애매한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사람에게는 애매하고 부당한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애매한 것이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오늘에 당하는 부당한 고난은 모두 전생의 업보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난을 인과응보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은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성경 본문에 의하면 "애매한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비록 인간 편에서 볼 때는 불합리한 고난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나님 편에 고난의 이유가 있다고 믿는 신앙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있는 것으로 믿고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기도문은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을 무참히 학살할 때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육백만 명을 죽여야만 하는가, 왜 이러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하였으니 이 기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생각을 사람이나 사건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려서 하나님에 대한 양심 때문에 고난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에서 극단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는데 주인이 불쌍히 여기고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인집 대문을 나서다가 그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욕을 퍼부으며 사정하는 친구를 고발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마침 주인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불러다가 "내가 너의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겨우 몇 푼 안 되는 빚을 탕감해 줄 수 없었더냐?"하면서 그에게 다시 빚을 다 갚으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너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으니 너도 친구의 백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하여 주라는 조건은 아닙니다. 요즈음 돈으로 계산하면 일만 달란트는 천만 불에 해당하며 백 데나리온은 이십 불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천만 불과 이십불은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그 기쁨과 감격으로 그 적은 빚을 탕감해 줄 수는 없었더냐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 많은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 감격으로 우리는 애매한 고난을 이기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양심, 이것으로 부당한 고난을 극복한다면 이것이 곧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한 고난이요 자원하는 고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고난입니다. 우리는 가끔 고난에 쫓기는 것을 십자가를 진다고 하거나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나 진실하지 못한 남편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 십자가를 진다고들 합니다만 엄격한 의미로 그것이 십자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 번째 고난으로 스스로 자원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세상은 선을 시기합니다. 죄인은 죄인을 부르고 의인을 싫어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악인의 무리 속에 들어가면 미움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곁에 있으면 자신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며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악인이고 죄인이라면 자신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 같은 심리적인 작용 때문입니다.

밀턴의 [실락원]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단이 천국에서 쫓겨난 후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여 에덴 동산에서 살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덴 동산으로 들어와 아담과 하와를 죄인 되게 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을 모두 지옥으로 끌고 가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자기들을 천국으로 다시 불러 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죄인은 혼자 죄짓기를 싫어합니다. 될 수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죄인 되기를 바라며 오히려 자기 자신보다는 더 큰 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자신의 죄가 더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불어넣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3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들은 밝은 것이나 선한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세상은)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고도 안일하고 거룩하며 깨끗한 영광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미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만 하는 비상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서 영광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그 분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비참하게 돌아갔습니다.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도 일생 동안 예수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교인들조차 그를 비난했으며 결국 목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천년 후의 기독교인들은 왜 안일한 믿음만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헐값의 은혜만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세 번째의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란 불가피하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찾아가서 당하는 것이며 이것이 참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마지막의 빌라도 법정에서 약간의 변론만 하셨더라도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시고 맙니다. 무기력해서도 무지해서도 무능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오직 사랑만으로 고난을 택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며 우리 믿는 사람들도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자신의 구원을 가져오는 제자의 특권입니다.

본문 21절에 예수의 본을 받아 뒤따라오게 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란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요, 둘째는 고난에 대하여 궤사인 변명이 없었다는 것이요, 셋째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모든 인간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살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쳐 세상을 구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이 그 본을 따라가기 위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참된 고난이며 축복의 약속이 있는 고난입니다.

혹시 이러한 고난을 당할 때 남을 욕하고 저주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는가를 반성해 봅시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의 본을 생각하며 앞으로 전진할 때에 오히려 그는 고난을 통하여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10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기도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길 되신 주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에 변명하지 않으시고 끝내 참으심같이 주의 뒤를 따르는 저희들에게 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약한 것을 돌보아 주시고 넘어질 때에 강건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며 우리가 불신앙적으로 생각할 때에 신앙의 길로 인도하소서. 고난을 통하여 더 큰 은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비옵니다. 아멘.  

고난에서 받은 은혜(베드로전서 218-25)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어린아이가 '으앙'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괴롭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생리적인 현상입니다만 그보다는 어린아이의 생후 첫 울음을 그렇게 해석하는 인생관이 문제입니다.

정녕 인생이란 울면서 왔다가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가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인생을 고진감래(苦盡甘來),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또한 눈물로 밤을 세워 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고생을 겪어야 사람이 된다, 심지어는 고난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설명을 해도 고통이 괴롭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인생의 이러한 괴로움은 어느 특정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입니다. 간혹 "저 사람에게는 나 같은 고민은 없겠지?"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조차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지금보다 10년 전이 더 좋았어"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바로 10년 전 그 당시에는 괴로웠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괴로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하나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모면하려 하거나 벗어나려 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왜 고난을 당하는지 고난의 의미와 고난에 임하는 자세와 고난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본문에서는 고난을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요, 둘째는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요, 셋째는 스스로 자원하는 선한 고난입니다.

첫째로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고난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려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세상을 복잡하고 어지럽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잘못을 남에게 책임 지울까?' 하는 간사한 생각이 우리를 번민하게 만듭니다. 모든 고민의 근본은 위선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남에게 그 잘못된 일의 원인을 덮어씌우려는 그릇된 생각에 고민의 근본이 있으며 여기에서 인간의 갈등은 시작된다고 봅니다. 공자는 "네가 남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보답이 없거든 네가 베푼 사랑에 잘못이 없었나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했지만 그 반응에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면 먼저 나의 사랑과 수고에 부족한 것이 있었나를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이 점점 더 죄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백성들을 모아놓고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누구의 나귀를 내가 취했더냐? 누구의 빚을 갚지 않았느냐? 누구든지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당장 말하라"고 합니다. 그는 백성들의 타락을 보면서 자신이 불의를 행한 적은 없었는가 먼저 생각하고 이것을 회개하고 난 후에야 백성들을 위해서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잘못된 일의 원인이 언제나 내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만일 그것이 나 때문이요 내가 지은 죄나 나의 게으름 또는 나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면 내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겠습니까? 죄로 인하여 받아야 하는 형벌을 피하기 위해 꿇어 엎드려 있는 것이 결코 회개는 아닙니다. 적어도 회개란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하는 순간, "하나님이여, 이 죄 때문에 오는 어떠한 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무조건적인 항복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벌을 피하려고 이리 쫓기고 저리 변명하는 거짓된 마음을 회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당연한 것이며 이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자세가 바로 은혜의 길,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둘째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스콘 아비코스'인데 파스콘이란 고난을 뜻하며 아비코스란 의롭지 않은(unjust), 불합리한, 부당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파스콘 아비코스'란 부당한 고난, 곧 애매한 고난이란 뜻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모순되고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 사람의 부주의로 불이 난 경우 나의 잘못은 전혀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우리 집까지 불에 타버리게 됩니다. 또 나는 조심스럽게 차를 잘 운전하였지만 뒤에 오던 자동차 운전수가 추월하려다가 내 차를 받아 버렸다면 본의 아니게 나는 손해를 보고 맙니다.

지금까지 예를 든 것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지만 이 세상에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당하는 애매한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사람에게는 애매하고 부당한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애매한 것이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오늘에 당하는 부당한 고난은 모두 전생의 업보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난을 인과응보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은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성경 본문에 의하면 "애매한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비록 인간 편에서 볼 때는 불합리한 고난이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나님 편에 고난의 이유가 있다고 믿는 신앙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있는 것으로 믿고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기도문은 독일의 히틀러가 유태인을 무참히 학살할 때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왜 육백만 명을 죽여야만 하는가, 왜 이러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하였으니 이 기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생각을 사람이나 사건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려서 하나님에 대한 양심 때문에 고난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에서 극단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는데 주인이 불쌍히 여기고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인집 대문을 나서다가 그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욕을 퍼부으며 사정하는 친구를 고발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마침 주인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불러다가 "내가 너의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겨우 몇 푼 안 되는 빚을 탕감해 줄 수 없었더냐?"하면서 그에게 다시 빚을 다 갚으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너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으니 너도 친구의 백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하여 주라는 조건은 아닙니다. 요즈음 돈으로 계산하면 일만 달란트는 천만 불에 해당하며 백 데나리온은 이십 불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천만 불과 이십불은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그 기쁨과 감격으로 그 적은 빚을 탕감해 줄 수는 없었더냐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 많은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 감격으로 우리는 애매한 고난을 이기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양심, 이것으로 부당한 고난을 극복한다면 이것이 곧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한 고난이요 자원하는 고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고난입니다. 우리는 가끔 고난에 쫓기는 것을 십자가를 진다고 하거나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나 진실하지 못한 남편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 십자가를 진다고들 합니다만 엄격한 의미로 그것이 십자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 번째 고난으로 스스로 자원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세상은 선을 시기합니다. 죄인은 죄인을 부르고 의인을 싫어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악인의 무리 속에 들어가면 미움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곁에 있으면 자신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며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악인이고 죄인이라면 자신의 죄가 정당화되는 것 같은 심리적인 작용 때문입니다.

밀턴의 [실락원]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단이 천국에서 쫓겨난 후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여 에덴 동산에서 살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덴 동산으로 들어와 아담과 하와를 죄인 되게 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을 모두 지옥으로 끌고 가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자기들을 천국으로 다시 불러 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죄인은 혼자 죄짓기를 싫어합니다. 될 수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죄인 되기를 바라며 오히려 자기 자신보다는 더 큰 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자신의 죄가 더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불어넣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3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들은 밝은 것이나 선한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세상은)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고도 안일하고 거룩하며 깨끗한 영광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미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만 하는 비상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서 영광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그 분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비참하게 돌아갔습니다.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도 일생 동안 예수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교인들조차 그를 비난했으며 결국 목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천년 후의 기독교인들은 왜 안일한 믿음만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헐값의 은혜만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세 번째의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란 불가피하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찾아가서 당하는 것이며 이것이 참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마지막의 빌라도 법정에서 약간의 변론만 하셨더라도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시고 맙니다. 무기력해서도 무지해서도 무능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오직 사랑만으로 고난을 택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며 우리 믿는 사람들도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자신의 구원을 가져오는 제자의 특권입니다.

본문 21절에 예수의 본을 받아 뒤따라오게 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란 그가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요, 둘째는 고난에 대하여 궤사인 변명이 없었다는 것이요, 셋째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모든 인간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살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쳐 세상을 구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이 그 본을 따라가기 위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참된 고난이며 축복의 약속이 있는 고난입니다.

혹시 이러한 고난을 당할 때 남을 욕하고 저주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는가를 반성해 봅시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의 본을 생각하며 앞으로 전진할 때에 오히려 그는 고난을 통하여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10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기도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길 되신 주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에 변명하지 않으시고 끝내 참으심같이 주의 뒤를 따르는 저희들에게 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약한 것을 돌보아 주시고 넘어질 때에 강건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며 우리가 불신앙적으로 생각할 때에 신앙의 길로 인도하소서. 고난을 통하여 더 큰 은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비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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