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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일군(고린도전서 4:1-5)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 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일꾼"과 "맡은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의 편지 중에 일꾼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동일한 표현으로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 원어에는 적어도 네가지 이상의 단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봉사자를 일꾼으로 표현한 '디아코노스',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이 직접 일을 하는 '레이툴고스', 또한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일을 하는 경우의 '수넬고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휴페레타스'와 '오이코노모스' 등 각각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이 우리 말로 번역이 되면서 '일꾼'이라는 한단어로 표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일꾼(휴페레타스)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일꾼이란 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사나 죽으나 주인의 것으로 붙들려 있는 신분이어서 전혀 자유함이 없습니다. 종은 자신이 원하고 원치 않고에는 상관없이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을 두고는 충성이란 말을 따로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자원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운데 어차피 그렇게 살아야 하고, 또한 그렇게 살다가 죽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미 철저히 예속이 되어 달리 충성을 요구할 필요조차 없는 존재가 바로 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꾼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위치에서 일을 합니다. 일꾼은 자유로운 가운데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일을 하며 주인의 뜻과 목적을 알아서 마음에 들도록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여기의 휴페레타스라는 말은 매우 재미있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아래, 밑이라는 뜻을 가진 '휴포' 와 명령에 따라 노를 젓는다는 뜻의 '에레테스' 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헬라 원문대로 보다면 밑에서 노를 젓는 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를 위해 옛날의 배, 특별히 우리의 거북선 같은 것을 보면 양쪽에 길다란 노들이 쭉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노를 배 안에서 한 사람씩 하나씩 붙들고 저어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배 안 저 밑에서 노를 젓는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저을 뿐 어디로 가는지 어느 지점에 왔는지도 모르는 채 열심히 신호에 맞추어 노를 젓는 것인데, 바로 그 사람을 가리켜 휴페레타스 즉 일꾼이라고 한 것입니다. 배의 목적지는 선장만이 알고 있을 뿐 어디로 가느냐고 묻거나 밖을 내다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 노를 저으라면 젓고, 멈추라면 멈추며, 빨리 저으라면 빨리, 천천히 저으라면 천천히 저으면 되는 이것이 일꾼입니다. 일꾼은 주인이 맡겨준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맡겨주는 일을 놓고 왜 이것을 하라고 합니까하는 따위의 이러쿵 저러쿵 하는 다른 이야기는 일꾼으로서 할 말이 아닙니다. 그저 주인이 새끼를 꼬라고 하면 새끼를 꼬고, 오늘은 나무를 하라고 하면 나무를 해야 하는 것이 일꾼인 것입니다.
저는 일꾼이라고 하면 언제나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던 시절 저희 집에서 많은 일꾼들이 일을 할 때 보면, 어른들께서는 어쨌든 일꾼을 놀리지 않기 위해 일거리를 만들어 가면서 일을 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노라면 일꾼들은 돌아서서 "이건 순전히 우리 놀리지 않기 위해 시키는 일"이라며 불평을 하고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은 "흘러가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것으로 일을 하지 않고 놀면 썩게되는 물과 같으니, 쉬지 말고 열심히 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저희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하여 들려주신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어떤 부자 집 주인이 회갑을 맞아 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니, 집안에서는 며칠 전부터 음식준비를 하느라 냄새를 풍기고 소, 돼지를 잡 는등 야단이 났습니다. 이에 일꾼들도 생각하기를 주인의 환갑날에는 우리들도 좋은 음식이나 실컷 먹고 마시면서, 하루를 놀 수 있으리라며 기다리고 있는 터입니다. 그런데, 환갑날 새벽이 되자 주인이 일꾼들을 다 모이게 한 후에 짚 한 단씩을 주면서 오늘 하루 광에 들어가서 이것으로 가는 새끼를 꼬아서 나에게 가지고 오라하고서는 광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광 안에 있는 그 하인들의 불평이 오죽이나 했겠습니까?"나쁜 놈의 영감탱이 실컷 부자로 살다가 죽어라."는 등 별별 소리가 다 나온 가운데 몇 마디 굵게 꼬다가는 팽개쳐 놓고 낮잠만 자는 하인들이 있는가하면, 어떤 하인은 새끼를 꼬라면 꼬는 것이지 무슨 말이 많나하고서 하루 종일 가늘게, 가늘게 새끼를 꼬아 갔습니다. 마침내 저녁이 되자, 주인이 광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각자 너희들이 꼰 새끼를 가지고 오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이 들어 있는 광문을 열어 주면서 내가 이제 너희들을 자유의 몸으로 보내줄 터이니 여기에 있는 돈을 그 새끼줄에 끼워서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가늘게 새끼를 꼰 사람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는 하루 종일 계속 돈을 끼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굵게 꼰 사람은 짚으로 나온 끝에다 몇 개만 달랑 달랑 끼워서는 고개를 떨구며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바로 성서적인 충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꾼은 노를 젓고 일을 할뿐 더 이상 알 것도 물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와 친척과 고향을 떠나라고 하실 때에 목적지를 정해주시면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이는 아직 지시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떠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동으로 가라 서로 가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떠나라하여 떠난 다음에 가르쳐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하여 갈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한참 동안 가고 있는 중에 저 보이는 땅을 너와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침반을 주신 것도 아니요, 지도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무런 표징도 없는 가운데 떠나라고 하셨고, 그리고 떠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너무 많은 이의를 제기하지 마십시다.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느냐하는 것은 그분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통 중의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욥 23:10)라는 깊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이 비참한 처지가 앞으로 또 어떻게 될 것인지 나의 운명을 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알고 계시기에 그는 말씀하시고 나는 따라가는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따라나설 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믿고 좋아라며 졸랑졸랑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휴페레타스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절대 순종입니다. 알든 모르든 선장의 말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멈춰라 하면 멈추고, 빨리 저으라고 하면 빨리 저어야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절대 협력이어서 몇 명이 되든 북을 치는 대로 신호에 마추어 똑같이 노를 저어야 됩니다. 만약 그 중 누구라도 노를 젓지 않거나 거꾸로 젓는 날에는 배가 큰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노를 저을 때에 꼭 같이 저어야지 불평을 하거나 자기만의 할 일을 위해 비협력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 생활이나 예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 부를 때에 같이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에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앉았을 때에는 나도 앉고 다른 사람이 일어설 때에는 나도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훈련입니다. 때로는 마음에 흡족하지 않더라도 일단 따라가노라면 어느 사이에 내 마음도 함께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 잘난 것도 없는 다 그렇고 그런 처지에서 굳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여 다르게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결코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노를 젓는 자와 같은 일꾼에게는 언제든지 함께 협력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꾼은 이 일을 하고 저 일은 못하겠습니다하는 식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김을 매고 너는 물을 길으라고 했을 때, 왜 나는 하필 김이며 물이냐며, 주인이 맡겨준 일에 대하여 불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위치에서든지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필요를 느끼게 하며, 그리고 데려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위치에서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데려가는 사람도 없는 거기에서 끝나는 신세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서경에서 이름과 같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봄으로 더 크고 좋은 자리를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눅 16:10)
그럼에도 어떤 일 하나 맡겨 놓으면 내가 어디 이런 일 할 사람이냐며 불평을 하고 나오는 이들을 볼 때가 있는데, 이미 그런 사람은 그 일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평객은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으며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불평으로 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불평이 체질화 되어있기 때문에 일생 불평만 하다가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중생의 역사가 없이는 구제 불능한 문제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이것저것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은혜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맡겨진 일 그대로를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일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맡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맡은 자라는 구역을 공동 번역에서는 관리인으로 번역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 원어로 '오이코노모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 라는 말에 관리한다는 어미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가정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익숙한 우리말 표현으로 하자면 집사(執事)가 됩니다. 집사란 역시 노예 제도 내에 속한 것으로 주인이 많은 종들을 다스리기가 귀찮고 힘이 듦으로 그 중 제일 똑똑한 종 하나를 선택하여 그에게만 지시하면 그가 다른 모든 종들을 알아서 다스리도록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서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로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아직은 어린 나이에 비록 노예로 팔려온 처지였지만 그가 충성을 다하므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이 자기 아내 외에 가정의 모든 것을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사에게는 상당한 자율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두고 이제 일꾼과 집사를 비교해 본다면, 일꾼은 전적으로 타율적인 것에 비해 집사는 비교적 자율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을 소위 알아서 처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집사는 자기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야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일꾼은 순종의 자유 밖에는 없으나, 집사는 주인의 것을 주장하면서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집사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경우에는 무조건 순종해야 되는 일꾼과 같은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스스로 일을 만들어 가면서 자율적으로 순종해야 되는 집사, 맡은 자 같은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꾼이든 맡은 자이든 간에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충성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이 충성 하나만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절대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충성이란 어떤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꾼은 이 모든 일이 나의 일이 아닌 주인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나는 지금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그리고 누리며 삽니다마는 어느 순간이라도 청지기가 아닌 내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바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충성이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하는 거기에 충성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순간이라도 이것은 내 것이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 한 충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이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도, 자식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내게 잠깐 맡겼다가 찾아가실 것이며, 자식은 내게 맡겨서 키워 달라고 부탁하신 생명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의 육체, 나의 건강, 나의 생명, 나의 의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전부가 다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느 사이에 자기의 것이라는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 결코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눅 12:16-21). 거기에 보면, 한 부자가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 생각하기를 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둘 것이며, 그리고 자기의 영혼에게 말하기를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이 편안히 쉬면서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하였는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고 하신다면 그 모든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충성된 그리스인은 무엇을 하든지 결코 이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문패를 대리석으로 하여 박아 놓은 것을 볼 때마다 마음에 와 닿는 아픔을 느끼고는 하는데, 그것은 며칠 있다가는 그렇게 튼튼히 박아 놓은 문패를 곡괭이로 파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문패는 언젠가는 바뀔 것을 생각하여 너무 튼튼하게 붙일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일꾼인 우리의 충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을 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두 번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알면서도 충성된 사람은 그 일을 자신의 일처럼 정성과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내 일이 아니니 되는대로 해버리자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될 말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면 사실은 더 소중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남의 물건과 나의 물건을 함께 써야 할 때가 있다면 여러분께서는 누구의 물건을 더욱 소중히 다루십니까? 바로 여기에 여러분의 충성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적어도 남의 물건을 내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충성된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내 것이라면 그까짓 것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것이기에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의 건물을 두고 생각을 하여도 이것은 나의 건물도 우리의 건물도 아닌 하나님의 것이기에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도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몸도 내 몸이 아닌 그리스도의 거시요, 하나님의 것이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시간도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 것이 아니기에 더욱 소중한 마음으로 정성과 정열을 다해서 일하는 그것이 충성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충성은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의 믿음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의 진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둘째는, 그 사람의 능력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12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주님께 감사하기를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신실하다는 것이요, 믿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날 한국 선교사로 일하던 분 중에 킨슬러(kinsler)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영국 신사 타입으로 언제나 한국 사람들을 약간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조금 교만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킨슬러 선교사가 황 목사님이라는 분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6․25 직전에 성경 구락부의 일 관계로 몇 십 만원이나 되는 돈을 잠깐 맡겨 두었는데 6․25가 터지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황 목사님께서는 자기의 것은 다 놓아둔 채 피난길을 떠나면서도 그 돈만을 가지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한 장도 쓰지 않고, 그저 그 돈이 잘못될까봐 붙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사실은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우선 좀 쓰고 뒤에 갚아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러다가 6․25가 끝난 다음 그대로 킨슬러 선교사에게 그 돈을 돌려주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킨슬러 선교사가 "목사님 이 돈 쓰시고, 뒤에 갚으셔도 될텐데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니까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황 목사님은 자기의 것은 다 버리고 갔지만 그 돈은 남의 것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더욱이 그 어려운 지경에서도 단 한 장을 쓰지 않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신 바 대로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작은 일에는 충성치 않으면서 큰 일을 맡겠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보신 다음 보다 큰 일을 맡기십니다. 이와 같이 충성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을 맡겨보고 믿을 수 있을 때에 다시 맡기고 보다 큰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을 때에는 하던 일도 거두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충성의 상황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충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여론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충성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 뭐라고 하든 오직 주인만을 생각하며 주인의 인정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여론에 신경을 쓰면 이미 충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시원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는 충성하고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여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느니 안 알아주느니 하고 있으니 충성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른 사람의 평판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을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가 많아서, 나는 무능하고 부족해서라는 부류의 말들을 하면서 자신을 격하시킬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그것도 교만인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하면 될 것을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이러쿵저러쿵하며 꽁무니를 빼느냐는 말입니다. 부족하고 무능하다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겸손한 것 같지만 두 번 그런 말을 한다면 사실은 아주 교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만 하기에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판단으로 자기를 학대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은 결국은 마귀를 위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허물이 많고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그저 하나님께서 맡기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나는 그 사람이 충성된 일꾼인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지만, 하라고 하시니 묵묵히 따르는 그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께만 칭찬을 받으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선 재림하시기까지 나 스스로나 그 누구에게도 판단하지 않기로 하십시다. 오직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며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내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충성된 일꾼은 오늘 당장에 칭찬 받을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목표를 두고 묵묵히 순종할 뿐입니다. 그날에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일꾼이 되기 위하여 오늘 우리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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