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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종(갈1장 6~10절)

by 【고동엽】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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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종(갈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절로 5절까지의 말씀은 살펴본 바와 같이 문안 인사와 함께 사도권의 근거를 천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사도로 부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복음적인 특별한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6절로 10절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첫단계의 첫마디를 그는 매우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엄한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이 편지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여기에 충분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다른 복음을 좇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변절자, 이단을 좇아간 사람들, 이런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언사로 엄하게 꾸짖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속히 떠나"---'타케오스 메타티데스데'라고 하는 이 말은 아주 급하게 생각을 홱 돌리는 것, 생각이 표변(豹變)하는 것을 뜻합니다. 몸이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떠났다, 생각을 돌렸다, 그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군사적인 용어'라고도 합니다. 탈영, 반역, 배반의 뜻이 됩니다. ''의 편에서 싸우다가 변절하여 ''의 편으로 갑니다. 군대에서는 가차없이 사형 감입니다. 정치적으로도 변절자가 있습니다. 간혹 그런 일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당에 있다가 야당으로 가고, 야당에 있다가 여당으로 가고---이 또한 변절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 변절입니다. 지금까지는 오른쪽으로 주장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을 홱 돌려서 왼쪽으로 주장합니다. 반대하다가 지지하고, 지지하다가 반대하고---이런 줏대 없는 모습들을 우리는 많이도 보고 삽니다.

변절의 상징적인 의미가 그러하거니와 무엇보다 중시할 변절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의 배교(背敎)행위입니다. 완전한 배신, 배교----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속히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천천히 틈을 보는 것도 아니요 어느 찰나에 홱 돌아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크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은혜로 부르신 이를 그렇게 속히 떠날 수가 있느냐, 참으로 모를 일이로다, 이상하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심각하게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말씀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우리는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은혜의 주도권(主導權)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팔짱끼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신 것이 아닙니다. 몸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보더라도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빼고는 모든 비유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탕자 비유에서만 '기다리는 아버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 나서시는 적극적인 분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숙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절로 예수 믿게 된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믿기까지에 얼마나 많은 투자가 있었는지 아십니까? 내가 내 발로 찾아가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종교 가운데서 나 스스로가 골라잡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내가 선택해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이 사실부터가 은혜입니다. 내가 의로워서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나에게는 구원받을만한 의()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크나큰 구원의 경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먼저 나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시작은 여기서부터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음으로 비롯되어 모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그로써 구원의 역사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나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나에게 전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생전에 한번만이라도 복음을 들었다면 예수님을 영접했을 분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주지 않아서 믿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가끔 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다---여기까지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지금 우리는 많은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많은 여자 분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와 앉아 있습니다마는 지금부터 백 년만 이전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어림없는 일입니다. 여자가 밤중에 어디를 나다녀요? 집안이 발칵 뒤집힙니다. 그러니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이것만도 엄청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잘못 찍혀서 한 백오십 년 전쯤에 태어났다면 큰일날 뻔했지."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더랍니다. 백 오십 년 전쯤이라면 그 부인, 교회라곤 문전에도 못 가보았을 것이니 그런 소리를 어찌 우스갯소리로만 돌려버리겠습니까? 복음을 전해들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요꼬이라고 하는 일본인입니다. 태평양전쟁 때 군인으로 출전했다가 전쟁이 끝났는데도 종전 소식을 듣지 못하여 그 후 27년 간을 괌 섬의 원시림에 숨어살았습니다. 27년 동안이나 총대 하나 달랑 메고 산 속에 숨어살았다니 믿깁니까? 하긴 춥지 않은 곳일 뿐더러 나무열매와 과일이 풍성하기는 합니다. 제가 한번은 차를 다고 그곳을 지나다보니 멧돼지가 새끼들을 줄줄이 달고 다닙니다. 조그마한 섬이기는 하지만 원시림이 있어서 열매만 따먹어도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는 됩니다. 정상에 오르면 그 아래로 미군 비행장이 보입니다. 그 청년은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을 보면서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나 보다라고 생각했답니다. 27년을 그렇게 살았다니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반드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걸어다니고 음식을 먹고 하는 것이 모두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인 것 같습니까? 우리를 세상에 낳으시고 키우시고 가르쳐주신 부모님 그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물며 복음에서이겠습니까? 엄청난 은혜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 한사람 예수 믿게 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순교의 피가 흘렀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장렬히 순교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습니다. 그를 전후하여 세계에는 동서고금에 얼마나 숱한 순교의 피가 뿌려졌습니까?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많은 선교사들이 와서 전하고 죽어갔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이 일어났고, 전했고, 모질게 핍박받았고, 순교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일백 퍼센트 하나님의 가없는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런가하면 전해지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은혜입니다. 내가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준다 해도 안될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마음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좋은 눈을 주셔서 예배 시간이면 저 뒤에 앉은 분들의 얼굴까지 다 보입니다. 찬송 부를 때에 보느라면 찬송을 한 구절도 부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예 부르지 않기로 작심한 듯한 태도입니다.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설교할 때에만은 저런 분도 꼭 마음 문을 열게 해주십사고 말입니다. 예배드리러 와서 끝내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마음 문을 열지 않고 딴청만 피우고 있으면 마음속에 잡념이 끓고, 졸리고, 가려운 데가 많아집니다. 남이 보기에도 딱합니다. 이 마음 문을 여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러 와서도 열리지 않는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감동해서 그 마음 문을 열어주어야 온유해 지고 겸손해져서 '주여 오소서' '전적으로 믿겠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하소서'---이렇게 됩니다. 저 백부장의 믿음처럼 됩니다(8:59).

이런 옥토(沃土)와도 같은 마음이야말로 큰 선물인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은혜에는 우리의 공로가 필요치 않습니다. 온전히 '은혜'일 뿐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가운데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타락(total corruption)이 구원의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사람은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하는데 거짓이고, 이것이 하나님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우상이더라'---은혜가 아니고는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도 바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부를 수 없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라고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고 감격하던 갈라디아교회의 몇 사람이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로 돌아서버렸습니다. 본디 갈라디아교회의 배경에는 율법주의적인 이단(異端)이 있었습니다. 밖에 있는 이단이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이단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만으로 부족하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공로를 세워야 한다---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것이 그 이단의 특색입니다. 자칫 그럴듯하게 들리기 쉽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반복하여 말씀드리게 될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마는, 생각 같아서는 꼭 선한 일 해야만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조심해야 됩니다.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믿음만 가지고 되나, 가끔 좋은 일도 해야지----아닙니다. 선행도 믿음의 열매일 따름입니다. 선한 일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 물질을 주셨습니다. 오로지 은혜일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공로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유대사람의 사고에 박혀 있는 '공로주의'란 이를테면 '도둑질을 했습니까, 구제를 해야지요. 도둑질한 것의 4배 만큼 구제를 해야 됩니다, 간음을 했습니까, 고행을 해야지요. 살인을 했습니까, 평생 봉사를 해야지요, 앞으로는 낙을 바라지 말고 평생토록 남들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고생고생 봉사하시오'------이런 식입니다. 죄의 댓가를 치르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요? 그러나 잘 생각해야 됩니다. 이를테면 내가 도둑질을 했다고 칩시다. 그로 말미암아 크게 피해를 보고 마음이 상한 나머지 피해자가 울화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칩시다. 이제 내가 뉘우칩니다. 훔친 것의 열배로 갚겠다고 나섭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아니면 속죄의 뜻으로 내가 불우한 이웃을 구제했습니다. 그 선한 행위로 해서 그 죽은 사람이 되살아납니까? 이것이 용서될 수 있는 일입니까? 사건은 이미 '상황끝'입니다.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워서 이미 지은 죄를 속죄해보겠다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속죄하는 뜻으로……'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데서 자주 볼 수 있는 대사입니다. '속죄하는 뜻으로'라니, 저 마음대로 죄지어놓고 저 마음대로 손씻고 입닦고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성경적으로 볼 때 속죄하는 뜻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죄인이 행하는 선행도 죄이기 때문에, 죄인이 행하는 소위 '공로'라는 것도 그 자체가 한낱 위선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하거늘 갈라디아교회의 이단들은 저러한 율법주의의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집요하게 끌어당겼습니다. '안식일도 지켜야 한다, 주일만 지켜서야 쓰나'----주일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뒤죽박죽이 되어갑니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 할례 안 받다니 말이 되는가'-----나이 많은 사람들이 할례 받느라고 청승떱니다. 기구 망측하게 수선스럽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겠습니까? 그 저의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그 의미를 실추시키자는 것입니다. 무효로 돌려버리려는 수작입니다. 그렇게 살살 꾀어서 유대주의로 율법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어버립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한 전도사가 부흥회를 열심히 인도해서 잘 마치고 천막을 거두는 중입니다. 젊은이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저도 구원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떤 선한 일을 하면 됩니까?"하고 묻습니다. "늦었습니다." 전도사가 대답했습니다. "?" 하고 젊은이가 눈을 크게 뜹니다. "부흥회가 끝나서 늦었다는 말씀입니까? 부흥회에는 내일 와도 되지 않습니까?" 전도사는 정색을 하고 젊은이에게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할 일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행하여야 할 선한 일이 따로 없습니다"--위트가 넘칩니다마는 정곡을 찔렀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따로이 없습니다. 있다고 하는 그 생각, 그 발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 필요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22 : 114).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고 손들을 청했습니다. 종들을 보내어 청한 사람들을 오라 했더니 모두가 이 핑계 저 구실을 대며 오기를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하러 온 종들을 잡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대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동리를 불사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합니다. "잔치는 푸짐하게 준비되었는데 청한 사람들은 그 모양들이니 차라리 사거리 길에 나가 서서 사람이면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라."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건 선한 자건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그제야 집안에 손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임금이 나타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손 하나가 임금의 눈에 띄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예복도 입지 않은 채 여기 들어왔단 말이냐?" 임금은 그 사람을 엄히 꾸짖어 내쫓아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시고 결론을 주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오라고 하면 ""하고 따르면 됩니다. 초청자가 예복을 보내주었으니 그것을 입고 잔치에 참례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토록 어렵습니다. 왜일까요? 알량한 자존심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부잣집 외동딸이 노처녀가 되었습니다. 시집은 가야 되겠는데 좀처럼 사랑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준수하고 착한 총각 하나가 이 노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 경우, 총각이 마음에 들었으면 선뜻 사랑을 받아들였어야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노처녀, 아직도 그 신세 면할 때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우리 집이 부자니까 내게 돌아올 유산이 탐나나보지?"--삐딱하게 생각합니다. 총각의 순정을 의심하고 맙니다.

사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되겠는데 애초부터 그런 마음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한테서 선물을 받을 때,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못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알고 보면 선물을 주는 마음보다 받는 마음이 더 귀한 법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도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는 것보다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말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더 어렵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는 누구나 체험하는 바입니다. 나의 공로,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 나의 의를 완전히 포기할 때에만 깨끗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이라니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다만 복음으로 각색한 것일 뿐입니다. 위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헤테론 유앙겔리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another gospel(또하나의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7)"---또 하나의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복음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왜 생겼을까요?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7)." '요란케 하여'의 헬라어 원문은 '타라손테스'로 아주 혼미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혼미하게 하여 그 틈에 신앙을 떨어뜨리려고 그런 교리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째서 그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쪽으로 기울어지겠습니까? 인본주의(人本主義) 때문입니다. 그때문에 그런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아서입니다. 자기의를 내세우고 교만한 사람이 이런 시험에 빠집니다.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실제로 이런 일이 많습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을 만큼 깊이 죄악에 빠져 있던 구제불능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불덩이처럼 열렬한 신앙인이 됩니다. 전적으로 은혜이니 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큰 죄를 지은 적이 없는------도둑질이나 간음, 살인 같은 죄를 모르는 보통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문제가 있습니다.

믿기는 하는데 아직 은혜가 없습니다. 완전히 깨뜨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와 교만이 완전히 깨어져서 손바닥이 땅에 닿아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 일어서야 은혜를 은혜로 압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교회에 나와도 그냥 오락가락 하는 것일 뿐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척 어렵습니다. 큰 충격을 받거나 중병에 걸리거나 해서 나로서는 안되겠다 하고 백기를 들어야 합니다. 완전히 줄항복을 해야 됩니다. 완전한 자기부정이 이토록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으로 안됩니다. 내 의지로 될 일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서기관들도 사두개인들도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전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먹혀들지 않습니다. '나도 공로가 있는데' '나도 이만하면 괜찮은데'------이래서 은혜를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스꽝스러운 옛날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뚜껑 없는 지프차를 몰고 갑니다.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인 아주머니가 저만치서 힘겹게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고생하는구나 싶어 도와주려고 차를 세웁니다. "아주머니, 태워다드릴 테니 여기 올라타십시오." "아유,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호의를 받아들여 차에 오릅니다.

한참을 가는데 아주머니가 좀 이상합니다. 뒤돌아보니 아직도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습니다. "저런 쯧쯧……" 선교사는 어이가 없습니다. "그 보따리는 여태 왜 이고 계십니까, 내려놓지 않으시고……" 그랬더니 아주머니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나 한몸 차를 탄 것도 미안스러운데 보따리까지 차를 타서야 쓰겠습니까요?" 염치를 찾는 아주머니의 마음씨야 가상한 바 있습니다마는 짐을 머리에 이고 있다 해서 사람만 차를 탄 것이 아니잖습니까? 미지근하고 어정쩡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꼭 이 아주머니와 같습니다. 기왕에 예수 믿을 양이면 시쳇말로 '화끈하게' 믿어야 됩니다. 요것은 내가 하고 조것은 네가 하고---이렇게 시시콜콜이 가릴 것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내 주여 뜻대로' 하고 깨끗이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야 참신앙입니다. 전적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이것이 신앙입니다. 전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뿌리뽑아 내버리지 못한 자기교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에도 까만 마귀가 있고 흰 마귀가 있다.' 루터의 설명에 따르면 마귀는 원래 까맣다고 합니다. 저는 본 적이 없는데 루터는 보았다고 합니다. 즉 이세상의 마귀는 모두가 까만데 이것이 성직자들의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가 흰 마귀라고 한 것은 당시의 교황을 빗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는 사람들이 흰 마귀입니다. "그렇게 믿어서야 쓰나요? 더 잘 믿읍시다, !" 우리 앞에 와서 "에이, 장로교 그렇게 믿어 가지고 되나요, 좀더 잘 믿어야죠." 이렇게 수작을 거는 자가 흰 마귀입니다. '거룩'을 빙자하고, 의인인 체하고, 의식(儀式)을 빙자하고, 자신은 철두철미하게 잘 믿고 있는 듯한 태를 냅니다. 어수룩하고 착한 사람을 '문제아'로 몰아 겁을 줍니다.

오늘의 본문 8절은 이 같은 흰 마귀를 단호히 응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나데마 에스토----천벌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디 여유있는 인격을 지닌 사람입니다. 전도할 때에 보면 헬라사람에게는 헬라사람답게, 로마사람에게는 로마사람답게, 히브리사람에게는 히브리사람답게 대하고 가르칩니다. 또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 13)" 합니다. 이만큼 마음이 큰 사람입니다. 로마서 93절에서는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한이 없겠다'라고 굉장한 스케일을 보입니다. 이토록 도량이 넓은 사람이지만, 보십시오. 복음과 진리에 관한 한은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서릿발같이 절대성을 지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복음에 관한 한 한치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절대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어야 능력이 있습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하는 식의 신앙은 헛것입니다. "이분(그리스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공동번역성서)"---사도행전 412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양보 없는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태국에서 14년간 활동했던 선교사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국은 우리 나라보다 훨씬 일찍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교회가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시작이 잘못되어서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불교의 나라인지라 교회 나오라고 해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절에 가면서 교회에 나와도 좋다"라고 꾀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 주일날 아침에는 교회에 나왔다가 오후에는 절간에 갑니다. 이렇게 양다리 걸치고 양쪽을 왔다갔다하도록 했으니 교회가 부흥될 턱이 없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의 교회는 영 부흥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다행스럽게도 우리 한국의 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의 절대성을 내세우고 들었습니다. 예수 믿으려는 사람은 먼저 우상을 불태우고 오라---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믿은 연후에 불태우면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미리 불태우고 오라---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조상제사 하는 것도 딱 잘라 금했습니다. 담배를 금했습니다. 교회 나와서 끊으라 한 것이 아니라 끊고 나오라 했습니다. 이를 두고 혹자들은 믿는 사람들까지도 그건 지나쳤다고 점잖은 소리들을 하지만 한국의 교회가 부흥되는 까닭이 그런 절대불가용(絶對不可容)의 자세에서도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타협'이라는 것이 하나의 미덕일 수 있습니다마는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결단코 비타협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일제시대 우리네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국민의례라 여기고 하면 되지 않는가 했지만 그런 유혹에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태극기 앞에 절하는 것도 안된다고 기독교인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손을 가슴에 갖다대는 정도의 의식으로 정착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근본정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현재의 한국 교회는 이러한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기에 부흥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복음은 절대입니다. 그러므로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능력은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절대성 앞에 충성을 맹약하고 있습니다. 일백 퍼센트의 은혜를 주장하는 데서 일백 퍼센트의 충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공로는 전혀 없습니다. 일백 퍼센트 은혜이므로 일백 퍼센트 충성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미 죽었던 몸인데 다시 죽는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미 죽은 몸이라고 여길 때에 충성이 나옵니다. 그 충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입니다. 털끝만큼도 가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이 진리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서슬푸르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축소감소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충성을 맹세한 결과 사람의 기분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누가 나더러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고집불통이라고 하든 지독한 사람이라고 하든 상관없습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태도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똑바로 보십시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10, 공동번역성서)"-오직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 오직 은혜에 응답하고 있기에 그는 참된 종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미움받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기 때문에 고집불통의 인간, 비타협적인 인간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일백 퍼센트 은혜임을 믿는 절대적 신앙의 그리스도인,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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