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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누가복음 17:7-1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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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누가복음 17:7-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모든 말씀이 다 그러하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은 대단히 실제적인 말씀으로 우리들의 하루 하루 생활 자세에 기준이 되는 소중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가다가 우리들의 믿음이 없어지기도 하고 신앙 생활에 피곤을 느끼기도 하며 혹은 가정생활, 사회생활에 무력함이 오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지시하는 바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더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좋은 뜻으로 시작하였다가 낙심하며 돌아서는 나약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 또한 이유를 찾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문맥대로만 두고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는 노예 제도를 옹호하거나 인정하는 것같은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의 예수님이요, 누구보다도 인권을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노예제도를 지지하고 인정하며, 혹은 묵인하느냐 하는 질문이 나오게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잘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결코 사회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교훈으로 주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며, 제자들에게 필요한 참된 믿음을 가르쳐주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두고 먼저 생각할 것은 이 이야기 역시 하나의 비유라는 점입니다. 이 내용을 비유로 하여 어떤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 자체인 그 내용, 그 소재에 대해서는 달리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유란 앞에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구체적이요, 누구나 다 아는 사건이며 매일같이 경험하는 사건이라야 합니다. 그럴 때에 가장 효과적인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만인에 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거나 전 역사 중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이야기는 비유적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는 희한하게 들을 수 있지만 내 사건 속에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사건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먼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비유 역시 그들의 생활 풍속과 경험 속에서 익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잘 아는 비유의 내용을 소재로 하여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설명하시려는 데 그 의도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이 내용은 노예제도에 대한 관심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로지 이 사건,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뿐입니다. 그 사건 자체를 논하여 옳고 그름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은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인 노예제도에서의 한 면을 예로 들어 진리의 말씀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비유라는 점에서 이해하면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목적은 본문 말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였는데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진정 믿음이 있으려면, 믿음이 자라려면, 믿음이 점점 온전해지려면, 이러한 마음과 이러한 자세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자들이 믿음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것만 해도 이제는 제법 상당한 수준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이야기를 잘 알고있습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 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 : 5) 하실 때에 솔로몬은 치리자로서의 필요한 지혜를 구하게됩니다. 그럴 때에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 3 : 10)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솔로몬은 지혜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부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 자체가 상당한 것이요, 믿음을 구하는 믿음 자체도 상당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단 한 가지만 구하라 하신다면, 여러분은 단번에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잘 될 것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해놓고는 굉장한 준비를 하고서 나올 것입니다. 좌우간 자꾸만 길어지는 문장을 한 마디로 줄이느라 아쉬움도 많고, 시간도 제법 걸릴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의 소원은 복잡하고 그래서 기도가 긴 것입니다. 소원이 복잡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진실치 않다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한 말은 외마디로 끝납니다. 오늘 이 마지막 하나밖에 없는 소원! 거기에 진실이 있습니다. 진실한 소원은 하나뿐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이 제자들이 믿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구하는 정도라면 저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말이 됩니다. 저들 역시 돈, 명예, 출세 등 이 모든 것을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다보니 배운 것이 많습니다. 아직도 무엇인지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역시 믿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의 믿음이 대단하시더란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를 생각하며, 혼자 짓궂게 옷을 때가 있습니다. 만일에 "나사로야, 나오너라"해서 나오지 않으면 어쩌시려고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시는 겁니까? 그것도 사람이 없어 좀 조용할 때라면 몰라도 많은 사람이 밀려와 둘러 서있는 판인데 말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 이것을 이 제자들이 배운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제자랄 것도 없고 도대체 상대도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 믿음이 귀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는 청원을 하게된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하면 "기도"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많고도 길지만 어느 때이고 한 번쯤 이러한 기도를 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아멘." 이 얼마나 정확하고 똑바른 기도입니까? 믿음 하나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합니다. 이상한 것은 밤낮으로 믿음, 믿음 하면서도 기도할 때는 딴소리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복잡하고 청구서가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실족치 않으려면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사랑을 하는 데에도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전도를 하려해도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이적을 행하는 것도 그 결정적 열쇠가 믿음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은 저들 제자들이 바로 이 믿음을 구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좋겠다고 하십니다. 대단한 믿음, 바윗덩이처럼 큰 믿음이 아니라 이 작은 겨자씨, 요 살아있는 조그만 믿음만 있어도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순종할 것이라는 믿음의 위대성을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비유로 믿음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종이라고 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종이라고만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내 친구"라 하시며,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로까지 높여 대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친구라 할 수 있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여 친구라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상것들 사이에서나 오가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찬송가 가사에서도 "예수는 내 친구"하는 표현을 보면 이것은 삼강오륜을 모르는 서양 사람들이나 부르는 찬송가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하여 너는 내 친구다 해주신다면, 그야 우리에게는 영광이요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쳐다보면서 당신은 내 친구요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방자하기 그지없는 무례한 짓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너희는 내 종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향하여 다정하게, 너희는 내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오로지 종일뿐입니다" 하는 그 마음을 가져야 믿음이 자란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종이라는 의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이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지 가운데에는 언제나 "나는 사도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이 빠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노예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나 제자들이 실수한 그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일들을 머리 속에 새기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종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종이란 첫째,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지만 자기의 생명마저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합니다. 자기의 재능은 물론 심지어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 되고 맙니다. 모두가 주인의 것일 뿐 나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있어야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더 많은 복을 받아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가지고있는 동안은 믿음이 자라지는 않음을 알아야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좀 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내가 기적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신 것일 따름입니다. 또한 내가 말씀을 전했다 해도 주님께서 내 입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 아무 것도 내가 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도, 기능도, 내 자신마저도 나에게는 전혀 소유권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이요, 종의 의식입니다.

종은 절대 순종합니다. 무슨 일을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며 묻거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입니다. 폭우가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종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루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도 고프고 피곤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말하기를,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에 수종을 들며 심부름을 한 다음에 먹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은 이렇게 이치를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양을 치라면 양을 치고, 밭을 갈라면 밭을 갈아야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 일하라면 해야합니다. 밤을 새우라면 밤을 세워야할 뿐 거절이란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불평이 있고 질문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여기에 바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가리고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면 주님에 대한 절대 순종, 절대 위탁이 있어야합니다. 그럴 때에 주인의 말씀이 종에게서 능력화되어 그것이 종으로 하여금 능력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지혜롭게 주신 말씀대로 하면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또한 종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나타난 말씀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생각하는 종의 특징은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을 시킨 일군에게는 그 대가로 삯을 줍니다. 그러나 종에게는 보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마디의 고맙다는 인사도 없는 것이 이 종입니다. 보상은 없더라도 알아주기라도 해야겠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모두들 보면 결국은 안 알아준다고 불평들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종의 마음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까지도 깨끗이 없습니다. 그러니 낙심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소라도 받고자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고자하다가 나중에는 받고자하고, 처음에는 무조건 바친다고 했다가 뒤에는 조건으로 바치며 점점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조석변개라고는 하지만 가는 마음과 오는 마음이 그렇게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수고를 시작할 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제법 하다가보니 무엇인가 좋은 반응, 최소한 칭찬이라도 받아야될 것이 아니냐는 당위성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 가지고는 믿음이 자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세상은 당연히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나를 먼저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며, 따라서 내 제자가 되었다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례도 없고, 보수도 없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노예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칭찬이나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는 깨끗한 마음!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적합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한 선교사가 홍수에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중국 사람 하나가 이 선교사를 건져내어 구해주었습니다. 이에 이 선교사가 너무 고마와서 일생 동안 은혜를 기억하며 살겠으니 이름을 좀 가르쳐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름이 있소? 있다면, 내 이름을 말해주겠소" 하더니 그대로 가버리더랍니다.

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우리가 남을 도울 때에도 그렇습니다. 자기 개인의 이름이 나오면 모처럼 좋은 일을 했지만 그것은 무효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내 이름을 파는 것이요, 내가 인사 받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아예 처음 기분에서부터 어떠한 보상이나 알아주는 인사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종은 이와 같이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음 네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종은 불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곤이나 불평, 원망이 전혀 통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는 절대 의무, 절대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때와 장소 성격도 가릴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힘들다는 말은 할 것이 아닙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게되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는 이미 앞선 수많은 순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도 순교 아니면 순직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딴소리하거나 불평할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종의 마음입니다.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결정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수고하였으나 그 마지막 생각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지칠 만큼 많은 수고를 하고도 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하여야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네 동양인의 겸손한 마음과 생각의 표현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수성찬을 준비해 놓고서도 차린 것이 없다는 것은 주인의 당연한 인사말로 되어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 가정에 초대받은 미국인이 "차린 것은 없으나 많이 먹으라"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한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차린 것이 많은데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없다면 못 먹는 것이지 왜 먹기는 많이 먹으라는 것인가 말입니다. 이는 서양 사람들의 합리적인 이론을 가지고 그 깊은 뜻을 알 수 가 없습니다. 오직 동양 사람들의 의식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죽도록 수고하고도 일한 것이 없다는 마음! 이 마음으로만 살아간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불평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리고 아내의 마음, 남편의 마음이 이렇게만 된다면 아무런 불평이나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수고하고도 부족하고 주고도 부족하며 오히려 죄송해지는 마음이 되는 거기에 진실이 있고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쉬임 없는 수고를 하고도 부족하기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당연히 하여야할 일을 했을 뿐이니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종은 언제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하여야할 일을 했고, 일을 했다고는 하나 부족하게 하였으며, 더 충성했어야 할 것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사실을 말하자면 얼마든지 더할 수 있었고, 잘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단 한가지라도 선한 일을 했다면 그것은 은혜의 열매일 뿐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 그러한 충성심을 가지고 역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본다면 내 자신은 지금 어떤 자리에 서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자녀를 대하고, 어떻게 남편을 대하며, 어떻게 아내를 대합니까? 교회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어떠하며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자세는 어떤 상태입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이런 이야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인 즉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면 창고가 넘치도록 복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내가 십일조를 다 바쳤는데도 왜 사업이 잘 안되느냐며 따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헌금하고, 이러한 마음으로 수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백 년을 수고한들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는 아무 데도 쓸모 없는 종입니다. 종 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종입니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충성된 자의 자기 의식은 곧 무익한 종의 의식입니다. 주님은 나를 친구라 하시고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아들, 딸이라 부르십니다. 그래도 나는 종입니다. 참으로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러한 마음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불평이나 원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며, 부족한 중에도 감사하고 심지어는 실수를 하고도 감사합니다. 이는 지금의 이 모두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는 가운데 다만 순종이 있을 뿐이요, 당연한 일을 할뿐입니다. 이러한 겸손과 이러한 충성심이 있을 때에 믿음은 자라게됩니다. 신앙이 자라고, 인격이 자라며, 경건이 자라서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진정 믿음이 더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자라게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충성심도, 우리의 겸손도, 우리의 종됨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는 자기 의식 속에서 보다 더 성장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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