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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화목하라(마 5:21~26)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 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앞장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러 오심을 배웠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 교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율법의 의미를 잘못 해석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얽매여서 괴롭다 못해 율법으로부터 무작정 해방되고 싶도록 가르쳤고, 율법의 길을 좁혀서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에 대해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에 전문가들인 자기들만이 율법을 지켰다고 교만해 하며 지키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을 멸시하여, 결국은 자기들의 명예와 지위를 높이는 데 율법을 사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서 창세기의 선악과에 대해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고 물었을 때, 하와의 대답이 어떠했습니까?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먹지 말라는 말로써 끝내야 하는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더 보태었다는 것은 사탄의 시험입니다. 말씀은 보태어도 줄여도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도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에서 안식일에는 옷고름이 풀어졌으면 매지 말고 매었으면 풀지 말고, 불이 켜졌으면 끄지 말고 꺼졌으면 켜지 말고 등 계속해서 말을 붙이어 복잡한 법을 자꾸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이 법을 다 기억할 수도 없으니, 지킨다는 것은 점점 먼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 예수께서 오시어 복음을 전하시자 복잡한 율법에 매였던 사람들이 율법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아신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완성케 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의 문화 속에서 말해보면 "예수를 믿음으로 양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양심을 완성케 하러 왔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완전케 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율법을 완전히 이루는 것인가를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살인입니다. 흔히 십계명 중에서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를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다섯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를 사람에 대한 계명이다라고 말합니다만 때로는 부모에 관한 계명을 하나님께 대한 것으로 보고,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째 계명을 사람에 대한 첫째 계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이 가진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불효이고, 둘째로 큰 죄는 살인입니다. 살인이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구약성경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나타나는 십계명 중 제 여섯째 계명을 예수님께서 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어떻게 해야 완성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는데 그것을 이루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는 길이 바로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대단히 무서운 내용입니다. 형제를 향하여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미워하지 않는 데서부터 지켜야 합니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싶다고 생각까지 했으나 실제로 죽이지 않았으면 괜찮다고 편안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율법을 이루는 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미워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길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좀더 철저하게, 좀더 청결하게 좀더 근본적으로, 즉 동기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나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법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형식적이거나 나타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교만하기 쉽습니다. 가령, "나는 절대로 살인한 일이 없고, 간음한 일도 없고, 물론 도적질한 일도 없거니와 오히려 얼마를 구제했다"고 겉으로 나타난 것을 말하게 되면 교만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을 보다 싶은 의미로 혹은 영적인 면으로 돌려 생각하면 누구도 이 법을 지켰노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진리대로 살았다고, 누가 양심 그대로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미워한다는 조그마한 불씨가 얼마나 엄청난 일까지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말 형제를 미워함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되 근본적으로 지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네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살인은 미움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워서 하는 일은 곧 살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연하게 정말 본의 아니게 실수해서 사람을 죽인 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고(accident)입니다. 윤리학에서 말하는 행위에는 항상 정신이 따라갑니다. 따라서 정신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하는 일만이 행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윤리학에서는 생각 없이 하는 일은 행위가 아닙니다. 정말 잘 생각해 보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이전에 분명히 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하지 않으려면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인간의 첫 살인 사건을 보면 형이 아우를 죽입니다. 그것도 돌로 쳐죽인 비참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드린 제사는 받지 않고 동생이 드린 제사는 받았다는 질투심에서 마음이 들끓어 동생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미움이 주된 원인입니다. 마틴 루터의 유명한 말 가운데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을 수 없지만 그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가운데 미운 생각이 슬쩍 지나갈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잡고 머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미운 생각이 잠깐 스쳐야지 마귀가 틈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처럼 미움을 해가 지도록 품지 말고 곧 회개하며 훌훌 털어서 미운 생각이 뭉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미움이 모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건으로 내딛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가 십상입니다.
둘째로, 미움은 살인과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일쯤이야 있을 수 있고 탐심 정도야 하고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마음속으로 지은 죄도 큰 죄로 생각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수도원 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죄를 지을 수 없는 여건에서 생활하는 그였지만 하루에도 여러 번씩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주로 "내 죄, 내 죄"하면서 시기, 질투, 미움, 낙심, 의심 그리고 정욕등에 대해 자복을 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그가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모두가 심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매일 찾아오는 루터가 귀찮은 신부님은 "제발 죄를 좀 모아서 가지고 오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직접적으로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간음한 것을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잠 못 이루고 회개한 내용들은 모두가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속에 있는 죄를 행동으로 나타난 죄처럼, 즉 미움을 살인으로 생각하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율법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그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미운 생각이 들면 곧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그렇다고 해서 미움과 살인을 똑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가령, 마음으로 지은 죄나 행동으로 지은 죄가 같다면, 이왕이면 행동으로 지어버리자고 혼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경죄 중죄로 나누기도 합니다만 행동으로 지은 죄는 행동까지 간 것이고, 마음에서 지은 죄는 어디까지나 마음에서 끝난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에서 지은 죄는 회개하기가 쉽고, 행동으로 옮겨진 죄는 회개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미 깊이 빠졌기 때문에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마음에서 끝난 것은 나 혼자의 문제이기에 홀로 회개하고 끝날 수 있지만, 행동으로 옮긴 죄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으므로 나 혼자서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마음에 있는 죄가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에는 이 죄가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지은 죄나 행동으로 지은 죄가 꼭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마음으로 지은 죄는 마음의 죄요, 행동의 죄는 행동의 죄입니다.
넷째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정신적인 살인입니다. 내가 직접 손을 대어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입니까? 다윗은 우리아를 죽일 때 그가 직접 죽인 것이 아니라, 그의 왕권과 지혜로써 교묘하게 죽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연한 살인입니다. 오늘날에도 직접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나 붓으로나 그외 어떤 행위로써 간접 살인이 행해지고 있음을 얼마든지 보게 됩니다. 남의 아픈 가슴을 그대로 찔러서 정신적인 살인을 버젓이 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인한 일이 없노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상대방을 남에게 절망케 하고 병들게 하여 정신적으로 죽이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이것으로 인해 육체까지 죽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별히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만 생각했는데, 이제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워하지 않은 것만으로 율법을 다 지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율법의 정신은 미워하지 않았거나 살인하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생기면, 그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구하며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행위로까지 발전하면 미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언젠가 제 아내가 누군가를 동정하여 돈을 꾸어다가 빌려주었습니다. 사흘만 쓰고 갚는다는 사람이 영 소식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돈을 제가 갚았는데도 그 사람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돈 잃고 사람을 잃은 격이 되어 여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틈을 내어 제가 한번 찾아갔더니 그 분의 생활이 어렵게 보여 쌀을 한 가마니 넣어주며 "우리 서로 잊어버리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분에게는 더 괴로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그날부터 마음이 개운해졌습니다. 정말 괴로운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지우겠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보상으로써만이 지워짐을 알아야 합니다. 미운 사람에 대해 미움을 주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적극적인 방법만이 유일한 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로마서 1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루터의 십계명 해석을 보면 아주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등의 계명이 있는데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살인하는 입장이 아니라 살인 당하는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 하시어 그가 이 계명을 지키면, 결국은 내 목숨이 보전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보전하시기 위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만드셨습니다. 즉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 가운데 나타났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사유재산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또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인격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남을 속였을 때는 혹시 기분이 좋을는지 몰라도 내가 속고 나면 인격이 침해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법을 주셔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명들을 무겁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살인하지 않겠다. 미워하지 않겠다는 정도에서 벗어나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넓은 마음, 적극적인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다음으로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말씀은 형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들은 한 하나님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고 욕하면 무서운 죄가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한다는 것은 자제력을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조금 전에도 보았지만 가인은 자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고 해서 분노했습니다. 이 분노가 살인을 일으키게 했으니 화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만 모든 동물은 얻어맞거나 화를 내면서 죽게 되면, 눈이 빨개지고 온 몸에 독기가 돈다고 합니다. 이 때에 그 죽은피를 사람이 마시면 독이 온 몸에 퍼져 미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이렇게까지 무섭습니다. 어쨌든 분노는 자기에게나 남에게 큰 죄가 됨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전기공학적으로도 맞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아주 미워한다면 나에게서 특수한 전파가 발생하여 저쪽으로 전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긴 전파는 기록이 되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편안한 것이나 화를 내는 것이 모두 전파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기들도 어머니 젖을 먹을 때에 왼쪽 젖을 먹으면 잠이 잘 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왼쪽 가슴에서 들려오는 심장소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많이 듣던 친숙한 소리이기에 안정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머니가 누구하고 싸워서 화난 상태에서 젖을 먹이면 애기는 빨리 뛰는 심장소리의 변화 때문에 울거나, 또는 설사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노하면 피가 변하고 젖이 변하고 심장 고동소리가 변하며, 분노가 며칠간 계속되면 얼굴 색깔까지 변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살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노하는 자제력을 잊어버리는 지나친 분노 그 자체가 살인인 것입니다. 분노하는 순간에는 정말 죽이고 싶은 생각도 일어나므로 분노 그대로가 살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본문에서 "라가"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을 하면, "헛된 놈"이라는 뜻입니다. 헛된 놈이란 필요 없다는 뜻으로 남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비웃는 말입니다. 시편 140:3에 보면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 역시 "저주받은 자"의 뜻으로 하는 욕설입니다. "라가"라는 말도 "하나님 앞에 천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갓댐(God damn)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천벌을 받았으니 너는 필요 없다는 욕설이므로 이것은 살인과 같은 것입니다. 축복도 말이요, 저주도 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망하라고 저주하면 정말 망합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 귀에 들린대로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광야에 엎드려질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이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하여 "우리 형제들이 죽을 때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하니,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하시며 다 죽여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빈말이라고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소망이 없다고 상대방을 저주하는 말은 언어 그 자체로써 살인임을 알아야겠습니다.
본문의 "미련한 놈"이란 뜻은 패역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민수기 20:10에 나타나는데, 모세와 아론이 가데스에서 백성들로부터 물이 없어 원망을 받을 때에 모세가 그 백성들을 향하여 "이 패역한 놈들아" 하고 호령을 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책망하시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패역하다, 미련하다, 소망없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무서운 책망을 하십니다. 분노, 저주, 욕설등은 살인과 같은 무서운 행위이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이 수준까지 지켜야 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 본문 23절 이하에는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사야서 1장에서도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였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라고 하시며 12절에 가서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중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2-15), 책망의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도 많이 하고 손도 내밀지만 하나님은 들어주실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에 피가 묻었다고, 즉 남을 억울하게 하고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화해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도 내가 남을 원망했거나 남이 나를 원망한 일이 생각나면 제물을 두고 먼저 가서 화목하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 소원보다 먼저 하나님의 소원을 살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화목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정결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먼저 화목하고 먼저 정결하고 먼저 사랑한 다음에 그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사랑도 정결도 화목도 없이 "믿습니다. 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듣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간구하거나 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서로 다투어서 형이 집을 나가고 동생이 아버지를 잘 모셨습니다. 세월이 지나 아버지의 환갑날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슬픈 얼굴로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님, 제가 형님 몫까지 다할 테니 슬퍼하지 마세요, 이렇게 잔치도 해 드리고 앞으로도 잘 모시겠어요"하며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좋은 음식이나 회갑잔치가 아니라 형제 간에 화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형제 간에는 불화하면서 "주여"하고 밤새도록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먼저 화목하고 오라, 즉 네 뜻보다 내 뜻부터 먼저 이루라고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본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 : 25) 화목은 미루지 말고 급히 서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화해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목과 회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때가 늦으면 화목하고 싶고 회개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미루지 말고 급히 사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5:13-14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의미상으로 다시 옮겨 보면, "안개와 같은 사람들아, 선한 일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1년 뒤에 하겠다니 무슨 소리냐 오늘밤 네 영혼을 취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바꾸어서 번역하고 싶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 연기하면 죄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1년을 연기할 수 있습니까? 내일을 알지 못하므로 바쁩니다. 그러므로 화해와 회개의 문제는 절대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만은 언제나 해결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는 상태라야 합니다. 예물을 가지고 오다가도 화해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가서 먼저 화해하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해 없이 하는 기도는 듣지 않으시겠다는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남을 미워한 그 사실을 마치 살인한 죄를 회개하는 것처럼 뼈아프게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랑만이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완성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화해가 먼저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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