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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화평케 하는 자(마 5: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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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이란 화목 또는 평강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잘 아는 대로 '샬롬'이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영어로는 피스(peace)입니다. 샬롬은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지고선으로 생각하는 가치의 덕입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화평케 하는 자"라고 화평케 하는 자를 지적해서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쟁이나 병이나 기근이나 재난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지고선의 실천을 의미하며 최고의 희락과 만족과 행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념으로는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샬롬" (peace be with you)이라고 복을 비는 인사를 합니다. 화평하면서도 동시에 축복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유대사람들을 가리켜 "호전적이다, 딱부리 같다"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가 전쟁의 연속이었고, 그로 인해 세계 도처에 흩어져서 악착스럽고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계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말을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유대인(jew)하면 인색한 사람의 대명사로, 베니스의 상인의 이야기에 나오는 지독한 상인을 연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대 로마제국을 쳐부수고 온 세계를 뒤집어 놓을 것을 기대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보자, 그들이 기다리던 혁명이 곧 성취될 것 같아서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한 평화와 번영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평화의 왕이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는 혁명가로서의 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너무나도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메시아 대망사상과는 아주 반대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화평케 한다는 이 복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먼 가르침입니다.

이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심리적으로 큰 축복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3P를 이야기하는데, 인내(patience), 실천(practice), 평화(peace)입니다. 사실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다가 중지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일하는 자로서의 첫째 조건이 인내입니다. 둘째는 실천(practice)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만 하고 공상만 하다가 그만두면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흔히 머리가 좋은 사람은 생각이 많아 실천력이 부족하고 오히려 우직한 사람이 추진력이 있고 용기가 있습니다. 셋째,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평화(peace)입니다. 인내도 있고, 실천력도 있어야 하지만 마음의 평화 없이는 안 됩니다. 이것이 화평케 하는 자의 복입니다. 질투와 정욕으로 분한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마음의 평화 없이는 고도의 두뇌를 필요로 하는 요즈음의 세상에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운전하는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위험 수위가 그만큼 높아지며 특히 술 마신 뒤의 운전을 조심해야 합니다. 서양사람의 통계에 의하면 자동차 사고의 40%가 알콜 때문이라 합니다.

술만 조심하면 40%의 차사고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가서 특히 창작 작업에는 번민이 있으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무슨 일이든 마음의 평화가 우선입니다. 걱정과 조심은 두 마음으로 분열되어 있기에 무엇이든 불가능하지만, 정리된 마음, 화평한 마음은 단순하고 하나된 마음이므로 무슨 일이든지 가능합니다.

물론 평화라는 것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12 : 18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평화가 중요하지만 누구와든지 평화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인은 사랑하되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죄와 불의와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화해는 그대로 완전한 보편적 진리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도 가룟 유다와 화해하지 못했고, 빌라도와도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도 화평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화해만이 능사가 아니라, 할 수 있거든 최대의 희생을 지불해서라도 화해하지만, 언제나 무슨 일에나 화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화해는 많은 훈련과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값싸게 한 마디의 말로 화해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별로 잘못했다는 생각이 없으면서 한마디해서 상대방이 받아주면 그만이고, 아니면 내가 먼저 화해를 제의 했는 데도 불구하고 저쪽에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구실을 대며 아주 돌아섭니다. 화해가 그렇게 쉽게 되어지는 일입니까? 전기 스위치를 켜고 꺼듯이 말 한마디에 마음이 돌아선다면 얼마나 간단합니까? 화해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술적으로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과 함께 인격적으로 이루어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전에 결혼 주례를 부탁하려고 젊은 남녀가 필자를 찾아 왔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발랄하고 솔직하여 듣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귀에 거슬리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또는 "" 하는 말버릇입니다. 친하고 가깝다는 뜻으로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이래 가지고서는 화해하기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례한 단어들이 난발 되는 한 언제까지 화해가 지속될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필자는 신랑 신부에게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 의지, 두뇌 등 모든 것을 50%는 꺾어 버리고 결혼하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적어도 50%는 양보할 생각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어려운 문제들이 이 50%를 양보하지 않는 데서 생긴 문제들입니다. 양보는커녕 남의 것까지 더 보태어서 200%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이니 무슨 화해가 있겠습니까? 가정에서부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철나는 것입니다. 화해란 적어도 양보라는 희생을 지불하고서야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불한 희생만큼 화해가 이루어짐을 알아야겠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말에는 대단히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헬라 원문으로는 '에이레노포이오스'라고 하는데, 에이레네는 '평화'이고 포이오스는 '행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peace maker라는 좋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평화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자세를 말하거나, 평화를 사랑하는 자, 또는 평화예찬론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자, 즉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평화가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바라거나, ()이나 요가 등의 수도생활 내지는 명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 행동으로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화해를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화해에는 언제나 중재자(peace maker)가 필요합니다. 팽팽한 두 사람 사이에 중재자가 나타나서 완전히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예를 허다하게 봅니다. 필자는 상담을 통하여 몇 년씩 서로 불화 한 사이가 해결되는 것을 볼 때마다 목사가 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혼 직전에 있던 원수 된 부부도 좋은 중재자로 인해 행복하게 재결합하는 것을 보면, peace maker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곤 합니다. peace maker는 화해를 만드는 사람으로,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화해를 원하고 기다리면서도 먼저 화해를 청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없단 말입니다. 이 때에 누군가가 나서서 중간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몇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낮은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혹 누구에게 화해를 청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죄인이 아니라도 죄인처럼 자세를 낮추어야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높은 자세로 명령해서 화해되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왜 말구유에 오셨습니까? 그보다 더 낮은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시어 화해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는, 온유한 마음이라야 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화를 내어도 내가 유순하게 대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때로는 바보같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이 바로 화해를 만드는 자입니다. 상대가 화를 낸다고 같이 화를 내어 장군 멍군하면 언제 화해가 됩니까?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자세히 보면 모두가 쇠덩어리입니다. 여기에 부드러운 기름이 있기에 기계들이 마찰 없이 잘 돌아갑니다. 만약 기름이 떨어지면 당장, 차는 굳고 굳은 쇠끼리 부딪쳐서 불이 나거나 쓸모 없는 쇠덩어리가 될 뿐입니다. 모터오일이라고 하는 좋은 기름이 모든 기계를 잘 돌아가게끔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얇은 종이와 종이 사이도 부드러운 풀이 없으면 절대로 붙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드러운 중간 역할이 있으므로, 분리되고 마찰이 있는 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해자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라야 합니다.

셋째는, 관용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초조하고 성급한 사람은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안티오코스가 전쟁 중에 자기들의 막사 안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막사 밖에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들이 왕이 그 안에 있는 사실을 모르고 왕에 대해 갖은 욕을 다했다고 합니다. 안에 있던 왕은 그 욕을 듣다못해 천막을 들추고 하는 말이, 듣기가 거북하니 조금 멀리가서 욕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참을성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까? 원래 관용이란 강자가 베풀 수 있는 것이지, 약자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약한 자가 참는 것은 힘이 없어 참을 수밖에 없어서 참는 것이지 관용이 아닙니다. 언제나 힘의 여유가 있을 때에 참는 것이 진정한 관용입니다. 어른과 어린 아이중 누가 더 관용을 베풀겠습니까? 큰 사람일수록 너그러움이 있고 긴 안목으로 관용을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인내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조금 성격이 급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말씀을 전파하다가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 당시 두 사람은 마가 요한 때문에 의견이 분열되어 상당한 기간동안 격렬하게 논쟁을 하였고, 바울은 한 번 실수한 마가와의 동행을 끝까지 거부합니다. 이에 비해 바나바는 마가에게 관용을 베풀어 함께 구브로로 전도 여행을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길리기아 쪽으로 갔습니다. 위대한 바울이었지만 인내심이 부족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내가 베풀었던 인내가 상대방의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인생을 살다보면 인내는 모든 승리의 기초임을 쉽게 깨닫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화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화해자의 반대는 어떤 사람입니까?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람의 죄목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 당 짓는 것, 분쟁하는 것, 수근 수근 하는 것, 비방하는 것, 교만 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trouble maker입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trouble maker가 많습니다. 이 말 저 말 옮기며 분열을 일삼고, 평화롭게 사는 곳에 불을 지르며, 가는 곳마다 좌충우돌하여 말썽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남은 일생을 나쁜 말 안 하기로 결심하고 살면 얼마나 평화로운 삶이 되겠습니까? 소극적인 말입니다만 peace maker는 못되더라도 제발 trouble maker는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교회에서도 가끔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사람 때문이 아니고 한 두 사람의 trouble maker 때문입니다. 미꾸라지 하나가 온 연못을 흐려놓는다는 말처럼 한 두 사람이 말썽입니다.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불화한 가운데 peace maker가 들어가면 화해가 되어 좋은 관계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여러 가지 요구되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는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고, 둘째는 평화를 위해서 내가 먼저 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의가 있어야 그 의를 통해서 화평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희생을 지불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댓가를 지불하고서야 화평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물론이지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도 반드시 희생은 지불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향해서 진노하시며 죄인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평화롭게 하는 peace maker는 누구입니까? 신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는 자는 정말 복된 자요, 보화로써,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좋은 중재자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출애굽기 32 장에 모세의 유명한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잠깐 없는 틈을 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이 백성은 진멸하고 너(모세)와 네 후손으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이 되게 해서 가나안 땅에 가게 하겠다", 이스라엘 백성은 멸하되 모세는 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어찌하여 구원하신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하며 간절히 매달리다가 32절 마지막에 가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자기 백성이 망하는데 혼자 살아남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백성을 사랑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진노의 채찍을 거두십니다. 모세야말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peace maker입니다. 죄송한 상상입니다만 만일에 모세가 "하나님, 잘 됐습니다. 이 백성은 도대체 목이 곧아 희망이 없사오니 그저 저만이라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다행히도 이 백성을 멸하시려거든 나를 먼저 생명 책에서 지워주세요 라고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매달렸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또한 민수기 16 : 47-48에 보면 아론이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쳤습니다.(16 : 41)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이 회중에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리라"(16 : 45)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모세는 급히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16 : 46)고 아론에게 중보자의 임무를 주었습니다.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고, 아론은 이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쳤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백성들을 진멸할테니 떠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염병이 걸려서 죽은 자가 있는 그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했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진노를 막은 peace maker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잘 아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생각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의인 10명만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만 살 수 있다고 도망간다면 남은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의로운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죄인들 속에 들어가 있어야 죄인들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의인들이 죄인들 속에서 떠나서 죄인들만 남으면 그 날로 죄인들은 다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다소 얼마간의 의를 가진, 생각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죄악된 사회 속에 들어가서 요소 요소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할 때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진멸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입니다.

본문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먼저 자신이 화평케 하는 자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고로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 : 13-14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를 화평케 하기 위해 희생하며 죽음까지 내어놓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아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후사요 축복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귀한 생애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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