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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한 소경의 믿음(요 9:1~1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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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경의 믿음(9:112)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몇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사람은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무엇을 질문하느냐는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질문의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 헬라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작이 무엇이냐, 즉 만물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대단한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미련한 사람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일 일을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이란 어떤 것입니까? 원인에 관한 질문입니다. 특별히 원인을 묻되, 경제학적인 원인이나 사회학적인 원인, 심리학적인 원인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원인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본문에는 중요한 질문이 있고 또 중요한 대답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된 사람을 놓고 제자들은, 그가 장님된 이유가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습니다(9:2). 이것은 도덕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고 종교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만약, 제자들의 신앙이 좀더 깊었더라면,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님께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질문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주로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왜 병이 있으며, 왜 늙어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 또는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내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이런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편안하고 배가 부르면 생각이 몽롱해져서 잠잘 생각만 하지만, 고독하고 억울하고 병들었고 실패하게 되면 자연히 생각은 깊어집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역경을 많이 지낸 사람들의 생각이 밝고 명랑하며 깊은 생각을 해서 발견도 발명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남쪽과 북쪽이 대결하여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 남북 대결이라고 하는데, 세계적으로는 동서의 대립이라고 합니다. 남북의 대립이란 없는 자와 있는 자의 대립인데 대체적으로 북쪽이 있는 자이며 남쪽이 없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남쪽이 자연 조건이 좋고 여러 가지 이점이 많아 연구하거나 노력하려는 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문화의 발달은 추운 지방에서 시작합니다. 추웠다, 더웠다 변동이 심하면 추위도 이겨야 하고 더위도 이겨야 하므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을 하는 데도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의 생각을 깊게 만드는 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은 사색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의 질문도 장님이라는 고통에 대한 문제입니다. "왜 장님으로 태어났느냐?" 물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하는 배후에는 어느 정도 해답을 가지고 물은 듯합니다. 장님에 대해서 사회학적, 심리학적, 경제학적인 측면에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또는 이 사람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며 사회가 장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도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도덕적으로, 누구의 죄 때문에 장님이 되었는가를 묻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서 철저하게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도덕적이요 또 하나는 종교적입니다.

우선 도덕적인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당하는 고난은 모두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형통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환자에게도 불쌍히 여기기 보다는 오히려 업신여겼습니다. 얼마나 죄가 많아서 그런 병에 걸렸을까 하고 부정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멸시한 것도 죄인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멸시했습니다.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면 그와 같이 당당하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당시로는 젊은 사람이 부자인 것은 그가 곧 의롭다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부자에다 의를 겸하는 것이 그들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걸핏하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 말 역시 같은 뜻으로 죄 지으면 망하고 의로우면 복 받는다는 뜻으로 문제가 있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고난은 다 죄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등식이 성립되면, 결국 부자는 다 의인이요 가난한 자는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 시간에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물론, 부자라고 해서 다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해 못할 짓을 많이 했고 죄도 많이 졌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되어 과거에 지은 죄를 정당화하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 받는다라는 말속에는 모든 죄가 다 사해진다는 말입니다. 부에다가 의까지 더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가장 괴로워할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10년이나 20년을 믿었어도 밤낮 이렇게 가난한 것은, 그 동안 어떻게 믿었느냐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어는 권사님이 계셨는데,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어느 신도가 "왜 그렇게 어렵고 가난이 연속되느냐"고 목사님께 물었답니다. 목사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잘 믿는 것 같지만 우리가 모르게 무엇인가 잘못 믿는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궁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정말, 위험한 대답입니다. 여기서 율법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도덕적 대답은 율법주의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에게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성경에 보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또는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라는 좋은 말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아주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하는 것들이 일단은 죄 때문이라고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큰 모순입니다.

둘째는, 종교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녀들을 양육할 때, 잘못하면 때립니다. 이 매는 아프라고 때리거나 죽이기 위해서 때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람되고 바로 깨달으라고 훈련하는 목적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 귀로 듣고 눈으로 보도록 말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손을 대서 사건을 통하여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 사건들은 모두 말씀이요 훈련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만일에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전도사님에게 아들이 네 명 있었습니다. 그 중 큰아들은 동생 세 명과는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이 큰아들은 어머니가 낳자마자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새 어머니가 들어와서 정성껏 키운 아들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젖까지 물리면서 내 아이와 조금도 다름없이 키웠습니다. 형제들 사이에서도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동생들이 자라면서 불평하기를, 왜 우리들은 때리고 형은 때리지 않느냐고 무슨 특권이 형에게 있느냐고 항의했다고 합니다. 새 어머니의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식처럼 키우느라고 노력을 했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가차없이 때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지 않은 것은 참 자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매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욥기 23:10에 보면,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훈련이 있은 뒤에는 찌꺼기를 다 제하고 정금같이 되겠다는, 즉 고난을 시련으로 받아들이는 종교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난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로 인하여 장님이 된 것입니까?"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제해 놓고, 누구의 죄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장님된 본인에게는 대단히 억울한 일이고 또한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므로 자신의 죄 때문만은 더욱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에 살아가는 도중에 장님이 되었다면 혹 본인의 죄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냐 하는 것은 심각한 질문입니다. 이 장님은 나이가 40세로서 긴 세월을 어둠 속에서만 살아 왔습니다. 그의 불행한 삶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습니까? 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 해도 해피 앤드로 끝날 수만 있다면, 좋게 소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님은 나면서 소경이었고, 만일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소경으로 세상을 끝마쳐야 했습니다. 이 괴로운 삶을 어떻게 무엇으로 보상할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이 있습니다.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본인에게나 부모에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장님이 된 이 사건이 꼭 죄 때문은 아니다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것, 죄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하게 사는 것,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병든 것이 죄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구체적인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이 꼭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이 사람이 장님이 되었다는 구체적인 사건도 반드시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죄 때문에 장님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몽고에 그런 예가 많았습니다. 특히, 인류 역사를 문화사적으로 보면, 도덕적으로 타락할 때 옛날에는 약도 없었으므로 많은 성병이 유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병을 가진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기들은 장님으로 태어나는 확률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필자도 심방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태어난지 일주일도 안 된 아기의 눈이 고름투성이가 되어 고생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분명히 부모의 죄입니다.

종교적인, 심리적인 어떤 문제가 아니고 구체적인 부모의 부정한 행위로 태어난 애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병자로 태어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말해 주고 또한 오늘 현실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장님은 아버지가 부정한 사람이었는지, 어머니에게 잘못이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어떤 생리적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의학적인 차원에서, 도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주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의미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답에는 초월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에 대한 생리학적, 사회학적인 문제 이전에 더 깊이 감추어진 의미가 있습니다. 사건이 생기면, 남편 때문이냐 아내 때문이냐, 아버지 때문이냐 어머니 때문이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 사건 뒤에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뜻이 있고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뜻은 인간이 미처 생각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깊고 높은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뜻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바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장님이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어디까지나 만일입니다), 감추어진 뜻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감추어진 신비로운 의미가 나타나게 되고, 또한 의미를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과거적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원인을 과거에 둡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오늘 위병이 났으면, 어제 무엇인가 잘못 먹었다고 원인을 과거에 둡니다. 또 오늘 가난하면 어제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언제든지 과거가 원인이고 현재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원인을 찾다가 궁색해지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말해 버립니다. 이것은 불교적인 인과율로써 전생이 원인이고 현세가 결과입니다. 또한 현세가 원인이 되어 내세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가령, 젊었을 때 빈둥거리고 놀면, 나이 많아서 고생한다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의 고통의 원인이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학생이 밤을 새며 일하고 열심히 일하는데, 이것을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고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나 미래 때문입니다. 앞날을 위해서 지금 고생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바로 옆방에 구 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밤 한 시 두 시까지 모두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데, 머리가 아파오고 몸이 뒤틀리면 우리 방으로 건너와서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 고생이냐"고 푸념을 하곤 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의 고난은 미래를 위해서 하는 고생이지 과거 때문이 아닙니다. 쉬운 예로, 해산의 고통도 이와 같습니다. 고통을 당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 미래적인 의미가 있는 고통입니다. 이 고통을 아담과 하와 때문이라고 하겠습니까? 고난의 원인이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 때문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여기 어느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간 것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간 사실로 인해서 앞으로의 생활 자세에 변화가 오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감옥의 고난이라는 것은 과거 때문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장님은 40년간을 장님으로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미래지향적 사역을 이루기 위하여 장님이 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다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선교 사업을 의미합니다. 구속 사업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구속의 사역을 이루고, 계시적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장님이 되는 그런 사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장님이었으므로 그가 눈을 뜨므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도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사람들이 계획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일로써 구속 사업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고난을 볼 때마다 선교적인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시련으로, 시련을 축복으로, 축복을 사명으로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병들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전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남달리 외롭습니까? 이제 외로운 사람에게 전도해야 합니다. 부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전도하기 어려우며,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에게 전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건강한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한다해도 위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고난 당하는 것은 고난 중에 받는 위로로써 위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처지 이대로가 문화적 위임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칼추럴 맨데이트(Cultural mandate)라고 합니다. 내가 당한 처지, 경험 그 자체가 하나의 위임장이란 말입니다. 내가 무식하면 무식한 사람에게 전도하라는 위임장이요, 지성인이라면 지성인에게 전도하라는 위임장을 내게 주신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 자체가 선교적 위임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장님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장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또 다른 일을 기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는 기회입니다. 기회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직선적 관계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회란 중요합니다. 고난은 진실의 기회, 사랑의 기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 복음을 받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던 고난이, 뒤늦게라도 깨닫고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상실이 아닙니다. 고난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선교적 차원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병이 들고 아프고, 일도 할 수 없고, 돈이 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로운 점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의 차원으로 보면 겸손하게 되었고, 진실하게 되었으며, 전도하게 만들었고, 천당가게 했으니,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육체적인 정욕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니 성공이다 실패다, 행복이다 불행이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높은 차원인 구속 사역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고난이 절대로 부정적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사실을 가지고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가 감옥에 갇힐 때는 사실 좋은 마음으로 갇힌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재주를 부렸지만, 실패하고 결국 로마까지 갑니다. 잡힌 몸으로서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히어 전도할 수 없어서 답답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고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가서는 친위대 사람을 만나고, 고관들을 만나서 전도의 기회가 주어지자, 빌립보서 1:12에서 "나에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당한 일이란 감옥에 갇혔던 일로써 그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픈 것이 복음에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또는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이 하나님의 사업에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데, 악보를 모두 외워서 지휘하기로 유명합니다. 그가 악보를 외우는 이유는 선천적으로 눈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는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인데, 눈이 아주 나쁘니까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이 어려워 자기 파트를 다 외우고 그리고 남의 파트도 외워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무슨 파트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알아야 자기 파트에서 실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많이 와서 연습 시간에 지휘자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지휘자 없이는 연습이 불가능하므로 단원 중에서 다른 사람의 파트까지 다 외우는 사람은 토스카니니밖에 없으니, 지휘자를 대신해서 지휘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악보도 보지 않고 훌륭하게 지휘를 하자 그 이후로 지휘자를 바꾸어 버렸고 이것이 그가 지휘자가 된 이유입니다. 어쨌든 그는 평생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유명한 지휘자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외우지 않으면 연주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보다 몇 배의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고난이 지휘자 토스카니니로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의 눈이 좋았더라면 악보는 외우지 않았을 것이고 더우기 지휘자는 못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고난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침을 땅에 뱉으시어 진흙을 이겨서 장님의 눈에 발라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9:6-7). 예수님의 이 평범한 민속 요법을 어찌 생각하면 저항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장님의 눈이지만 흙을 바르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나, 그는 순종합니다. 사실, 민속 요법으로 상처가 나면 시골에서는 침도 바르고 흙도 바릅니다. 흙 속에 곰팡이가 있어서 페니실린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만, 눈에 바른다는 것은 좀 심한 듯합니다. 어쨌든 진흙을 눈에 바르고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믿고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오리 길을 간다고 상상을 해보십시다. 가는 도중에 아마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원망도 하고 의심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실로암까지 갔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고 순종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만약에 장님이 실로암에 가서 씻으면 눈을 뜰 것이다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면, 가기 전에 미리 감사하다고 예수님께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감사했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의심하면서도 순종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순종을 해서지팡이를 짚고 실로암까지 걸어가 자기 손으로 씻고 눈을 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굉장한 휴머니티가 있습니다.

장님의 순종, 이 믿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런 순종이 있고서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만일, 장님이 실로암으로 가다가 돌아섰다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던 일도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불합리해도 순종하고, 모순이라고 생각되어도 순종하고,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순종하면, 결국에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장님은 후에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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