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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의 주권(롬9:1~18)
오늘의 본문은 여러분이 읽어보셔서 아신 바와 같이, 비교적 어렵게 기록되어 있어서 좀 이해하기가 힘든 대목입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 가운데서 긍정적으로,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이 말씀을 대하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고, 또 우리의 깊은 신앙 간증에서 대하면 더욱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혹은 추상적, 철학적 이론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말고, 신앙으로 받고, 우리의 신앙간증과 함께 실제적으로 생활 속에서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먼저 선교적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당신의 일을 위하여 필요한대로 쓰신다-그런 의미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또하나, 구원적 선택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 용어로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적인 의미의 선택을 '예정'이라고 하고, 사명적인 선택을 '선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이것은 선행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았다'하는 말은 인간인 우리의 모든 공로와 우리의 선행, 우리의 의, 우리의 선을 향한 의지… 이것을 다 부정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그런 얘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할 때에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용하는 그릇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응답은 믿음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응답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큰 착각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랑을 사랑으로 응답한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이미 진실한 의미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자, 부모가 나를 사랑했습니다. '좋아, 나도 사랑할 테다. 부모님이 나를 많이 사랑했으니까 늘그막에 나도 부모님을 많이 사랑해야지'-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랑의 가치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일대일, 장군 멍군하니까 사랑의 의미가 부도나는 거예요. 진실한 의미의 사랑이란,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란, 믿음뿐인 것입니다. '사랑합니다'하면 '나는 믿습니다'-이것이 옳아요. '사랑합니다'할 때에 '나도 사랑합니다' '두고봅시다'-이러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심지어 조금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해요. 어느 쪽이 더 사랑하나 두고보세요'-이렇게 맞불질을 해요. 그럴 때에 이미 사랑이 병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정말로 큰사랑이 여기 있어요. 내가 어찌 그것을 사랑으로 보답한다고 하겠어요? 어찌 사랑으로 응답하겠어요? 결국은 '사랑한다'할 때에 '믿습니다'-사랑을 그대로 믿어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다 할 때에 그대로 믿어요.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때렸어요. 때리면서 부모는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그러면 자식은 그대로 믿어요. 옳습니다, 내가 맞은 것은 사랑입니다-이것이 사랑에 대한 응답이에요.
때로는 우리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나 쉽게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그 사랑의 본 뜻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신학적으로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 큰사랑에 대해서는 우리가 믿는 도리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멘, 감사합니다'-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사랑에 대한 진정한 응답이에요. 사실은 믿을 때에 사랑이 사랑되는 것이에요. 주는 자의 사랑은 있는데 받는 자가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랑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받는 자가 사랑을 믿을 때에만 진정만 의미에서 사랑이 되는 것이에요.
가끔 심리학에서 하는 얘기입니다마는 좀 돈이 많은 집 딸들이 연애하기가 어렵다고 해요. 어떤 남자가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할 때에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그래요? 감사합니다"하고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믿습니다"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예요. '우리집에 돈이 많은 줄 아는 모양이야. 또 내가 우리집 외동딸인 줄 아는 모양이야. 이 시커먼 남자가 아무래도 돈을 탐내고 이러지?'-저쪽에서는 진실하게 하는 말인데 이쪽에서는 의심을 해요. 그러면 진짜로 하는 말도 이쪽에는 아무 소용도 없는 말이 돼버리고 말아요.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믿음,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어요. 믿을 때에만 사랑이 실제적으로 사랑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지금까지 그것을 믿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깨닫지도 못했어요. 그런고로 느끼지도 못했어요. 감사함도 없었어요. 행복도 없었어요. 무릇 믿으면서부터 깨달아지고 감격되고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인간의 입장에서 되어지는 모든 선행과 공로를 다 부정한다는 것이에요. 그저 오직 믿음으로 그 사랑을,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라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릇이 있는데 이것마저도 문제가 있어요. 이것도 내 것이 아니예요. 이 소중한 믿음마저도 내 것이 아니예요. 사실 이 믿음은 내 마음대로 안돼요. 안 믿어지는데 어떡합니까? 엄청난 일에 대해서도 믿어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전혀 안 믿어질 때도 있어요. 저쪽에서는 열심히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믿어지지 않아요. 도리가 없잖아요?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을 무엇으로 고치겠어요? 설명한다고 되겠어요? 그런고로 이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참 오묘한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세요. 선물로 믿음을 주세요. 그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랑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어차피 모든 것은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거예요. 은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그런고로 모든 일은 하나님 스스로 하시는 일이에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결정적으로는 말씀을 주셨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오늘도 또 말씀으로 역사 하세요. 이것은 객관적 계시예요. 그리고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감동해주사 믿음을 가지게 하세요. 이것은 주관적 계시예요. 그런고로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합쳐서 비로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은혜가 내게 은혜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이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절대적 진리로, 우리는 이것을 예정이라고 풀이합니다. 예정-다시 말하면 은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방적 은혜요, 내가 받은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에요.
보세요. 그러면 나한테는 아무 것도 없잖아요? 나라는 것은 다 사라졌어요. 오직 은혜만이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을 뿐이에요.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한 일이 있다면 고작 어떻게든 안 믿으려고 버둥거렸지요, 교회 안나오려고 도망다녔지요, 은혜를 배반하려고 계속 곁길로 도망다녔지요… 그것밖에는 없어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전부가 다 하나님의 은혜예요.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간증할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이것입니다. 이런 예정의 교리, 이런 절대적 은혜, 이것을 칼뱅은 '불가항적 은혜'라고 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 은혜가 여기에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큰 은혜를 놓고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첫째는 불공평하다, 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예정이 있다면, 한쪽은 구원이 예정됐지만 한쪽은 버림받았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한쪽은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한쪽은 버리시는 것으로 예정하셨다, 그러면 이것 불공평하지 않느냐, 그 말이에요.
이에 대한 유명한 비사가 있습니다. 모두가 지금 죄를 지었어요.
이것을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자, 부모가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자라고 있어요. 저들은 지금 고아원에서 자라 혈혈단신, 혼자의 몸으로 사회에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에요. 자기를 돌보는 부모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마음씨 착한 분이 고아원을 찾아와 그 아이 중의 하나를 양자로 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데리고 갔어요. 아주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공부를 시키고 그랬지요. 자, 몇 년 후에 이 아이가 고아원에 놀러 왔어요. 막상 와보니, 이제 이 아이와 고아원 아이들이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얼굴에 윤기가 흐르지요, 좋은 옷을 입었지요. 좋은 차를 타고 왔지요, 명랑하지요…… 다른 아이들은 굉장히 기분 나빴습니다. 그래,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말을 합니다.
자, 이제 묻습니다. 이게 불공평한 것입니까? 말 그대로 '공평'하려면 고아원에 다 그대로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은혜를 입었어요. 이것이 불공평이냐 그 말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은혜에는 언제나 그런 의미가 있어요. 은혜로 선택됐기 때문에 선택 못 받은 자에 대해서는 버림받았다고 하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불공평이 아니예요. 은혜란 언제나 공의를 무너뜨리는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사랑에는 언제나 그런 의미가 있어요. 여러분, 누구나 은혜 안에 살아요. 그러나 은혜 안에 살면서도 은혜를 깨닫지 못했어요. 결국은 구원받지 못한 자가 불평을 해요. 왜 나는 구원하지 않았느냐, 왜 내게는 은혜를 주지 않았느냐-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려 합니다. 불공평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다같이 멸망 받는 것이 공평이에요. 그런데 그 중에 내가 은혜를 입었어요.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나가는 일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또하나 생각할 것이 있어요. 이것을 불합리하다,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자, 합리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다 멸망 받아야지요. 그것밖에는 도리가 없어요. 은혜의 합리성은 언제나 신비로운 것이에요. 가끔 보면 우리는 불평을 많이 합니다. 꼭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불평을 해요.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불평을 해요. 은혜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불평을 해요. 재미있는 것은, 사랑 받는 자는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이해가 돼요. 그런데 사랑 받지 못한 자, 구원받지 못한 자는 모든 것이 불공평해요. 오늘도 가만히 보세요. 실제적으로 보면 은혜 받은 사람은요, 은혜 안에서 생각해보면 다 공평해요. 보아하니, 참 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은 건강하고, 부자인 사람은 병들었더라고요. 그런 경우가 많아요. 돈 많은 사람은 다 건강하고, 가난한 사람은 다 병들고…… 이것은 불공평하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건강에 관한 한 돈이 있고 없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돈 많은 사람이 병원에 더 많이 다닙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한평생 병원에 안가도 건강해요. 여기에 공평이 있지 않아요? 또,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아주 어려운 가운데서 공부해서 잘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좋은 여건에서도 공부 못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돈 있는 대로 다 공부 잘하고, 돈 없으면 다 못하고… 이렇다면 정말 억울하고 분해서 못살아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불평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돈 있는 사람은 다 할 수 있고, 돈 없는 사람은 못한다, 불공평하다-이렇게 말해요. 그러나 은혜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공평하신지 몰라요. 똑같이 공평해요. 있고 없고는 상관없어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일이 참 공평하시다-이렇게 느껴집니까? 심리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왜 이렇게 하시나, 못마땅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뭐든지 그래-자꾸만 이렇게 느껴지면 문제가 좀 있는 것입니다. 무릇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하는 것은 어느 쪽에 중점을 두고 생각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객관적 이론에 있는 게 아니예요. 사랑 받은 사람은, 사랑 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이해한다, 또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다-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예정의 또하나의 문제점은 만인득구설(萬人得求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영원한 지옥을 만드실 수가 있느냐, 만일에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잠시 머물렀다 가는 대합실일 것이다, 혹은 유치장 정도쯤 될 것이다, 분명히 다 구원받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 구원받을 것이다-이것이 만인득구설이에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인득구설이 정설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어요.
제가 옛날에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한번은 이런 신학토론이 있었어요. 한 50명이 저녁에 모여 가지고 신학 특강을 들은 다음에 토론을 하는데, 교수님들이 열변을 토하며 서로 자기의 의견을 내놓습니다. 문제는 지옥입니다. 한 사람은 지옥이 있다, 한 사람은 지옥이 없다, 그래요. 지옥이 없다는 사람이 '만인득구설'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는고 하니, 나는 천당을 믿기 때문에 지옥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요. 또 한 사람은 나는 천당을 믿기 때문에 지옥을 믿는다.
라고 말하고요.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지옥 없는 천당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지옥이라는 개념이 없는 천당은 있을 수 없어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천당이 있기 때문에 지옥도 있고, 지옥이 있기 때문에 천당이 있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이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개념에서 이해한다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까지도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다 구원받는 게 아니예요. 분명히 구원받을 사람들은 따로 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고 하는 얘기도 조심해서 해야 돼요. 그 얘기는 구원받은 사람의 간증이에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한 것이 아니예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놀라운 것도 아니예요. 내가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요? 내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이것도 구원받은 자의 간증일 뿐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주권적 은혜다-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16절)"-원한다는 것은 소원을 말씀함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사람이 있어요. 교회 나와야겠다, 하면서 안나와요. 기도해야겠다, 하면서도 못해요. 어떤 분은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10년 동안 별러왔는데 아직도 못나온다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정말 힘들어요.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면 왜 그렇게 꼭 일이 터지는지……" 이런 일 저런 일, 이런 핑계 저런 핑계가 생겨 가지고 그 많은 세월을 그냥 사는 거예요. 너무나 원하면서도 못나오는 사람 참 많습니다. 특별히 수요일 저녁예배는 더더욱 그래요.
아침에는 나와야겠다 생각했다가도 막상 그 시간에는 또 못나와져요.
그것을 반복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는 계속. 이렇게 한평생을 지내요.
원하면서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해요.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해요. 은혜 바깥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달음박질한다는 것은 노력을 말씀함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이 노력을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참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이 율법주의로 빠져요. 은혜가 없어요. 이미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선행을 해서, 적선을 해서 계단을 올라가듯이 하나님 앞에까지 갈 생각을 해요. 그래서 별 방법으로 노력을 다해요. 그러나 거기에도 구원이 없어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수고해서 이것이 하나님이다, 하고 찾고 보아도 그실 우상이었다'-정말 그래요. 인간의 노력이란 아무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아도 이룰 수 없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아도 되지 않는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말미암아야 합니까?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절)"---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되는 거예요. 이런 재미있는 비유가 있습니다. 물에 빠져서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든 빠져 나오려고 허우적거리다가 자기 머리카락을 자기가 잡아 끌어올린다고 합시다. 그런다고 해서 자기가 올라갑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지요. 밖에서 손을 내밀어줘야 해요. 그리고 자기가 그 손을 잡아야 하는 거예요.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끼리 아무리 붙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자기 머리카락을 자기가 끌어올린다고 해서 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이렇듯 인간 자체의 노력이라는 것은 소용없어요. 이것도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도 실천해보신 분은 아마 아실 거예요.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고…… 아무리 그래보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가 없어요. 절대로 불가능해요.
일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하는 것을 듣고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분은 심장이 나빠 가지고 고생을 했는데 3년을 엎드려서 사는 거예요. 누워서 자지도 못해요. 숨이 차서 헐떡헐떡해요. 그런데 이러면서도 예수를 믿습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믿어야겠다, 믿어야겠다, 하면서도 믿지 않았답니다. 부인은 믿는데 남편인 자기는 안 믿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정말 믿어야겠다, 할 때에 그만 병에 걸린 거예요. 그 분이 저를 붙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교회 한 번 나가보고 죽는 게 소원입니다. 나 좀 데려다 주세요." 그런데 그럴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모시고 가는 도중에 꼭 죽을 것 같거든요. 객사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허락치 않았어요. 그리고 "조금 나으면 갑시다"라고 말씀드렸지요. 이렇게 3년을 지내시다가 그냥 돌아가셨어요. 그 때에 제가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생각해보았지요. '참 그렇게도 노력을 했는데,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는데 교회 한번 나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다니……'
여러분, 이 한 시간 교회에 나오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가만히 보면 나오겠다 하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 중간에 새버리고 맙니다. 이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자꾸만 그런 일이 생겨요. 알고 보면 한 시간 한 시간이 큰 은혜예요. 오직 긍휼로-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생 후회하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일생 원하면서도 이루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해요.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뿐이에요. 신학적으로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란 오직 긍휼로, 오직 긍휼로란 오직 은혜로를 말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데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하는 보상을 받을만한 이유가 있느냐 그 말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 거예요. 자, 지금 막 어린아이가 하나 태어났어요. 그 조그마한 핏덩이, 아무 볼 것도 없지요. 그러나 어머니가 사랑해요. 가족들이 그를 사랑해요. 여기 무슨 이유가 있어요? 제가 고맙게도 인사를 하나, 뭘 알아보기를 하나… 그러나 그를 사랑해요. 이것은 철저하게 일방적이에요.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거예요. 만일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자의 일방적 은혜입니다. 저쪽이 긍휼을 받을만한 자격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니예요. 그런고로 내 노력이나, 내 수고나, 내 공로나, 특별히 내 의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다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 것뿐이에요. 또 긍휼을 입은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항상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무자격합니다. 나는 긍휼을 입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 하나님과 원수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셨다'라고 로마서 5장에서 이미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긍휼을 입은 까닭은 다만 하나님께 이유가 있을 뿐, 내게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함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4, 5)"---참 중요한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신'-이것은 예정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왜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과 생명으로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내가 구원받았나?'하고 걱정이 됩니까? 제가 이 말씀만 드릴 테니 여기에 비추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것은 병에 걸리든가, 어려운 일을 당하든가, 아무튼 고통을 당할 때에는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사람은 그 동안에는 좀 나쁘게 살았더라도 고통을 당하든다, 병들든가 하면 기도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곧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매를 맞으면 하나님께 돌아와요.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매를 맞으면 점점 더 악해집니다.
병들면 약해집니다.
저는 언젠가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찾아갔다가 심방간 것을 후회했었어요. 그 사람, 모든 것을 얼마나 원망하는지 몰라요. 심지어는 목사까지 원망하는데, 왜 지금 왔냐고 따지더라고요. 지금이라도 온 것을 고맙다고 생각은 안하고, 왜 지금에서야 왔냐고, 나를 뭘로 아느냐고, 내가 집사인데 목사가 집사를 사람으로 아는 것이냐고 재차 말하는 거예요.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참 난처했지요. 내가 가난하고 어려우니까 나를 무시한다는 거예요. 그래 저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어쨌든 이것만은 사실이에요.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생기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마치 무엇과 같은지 아세요? 참 미안한 얘기지만 낮에는 고아나 부모가 있는 애나 다 똑같아요. 고아원에서 나와 노는 아이나 부모 있는 아이나 함께 어울려 놀 때에는 똑같아요. 그러나 해가 딱 지면 집이 있는 아이는 엄마 아빠를 부르면 집으로 갑니다.
하지만 고아는 갈 데가 없어요. 여기서 다른 거예요. 이렇듯 우리의 영혼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석양을 맞고, 고통을 당하게 되면 아버지를 찾게 됩니다. 탕자를 보세요. 막상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내 아버지 집은 먹을 것이 많은데, 내 아버지 집은 머슴도 많은데…"하며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그런데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더더욱 원망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꾸 원망을 하게 돼요. 이것은 다 누구 때문이고, 남편 때문이고, 그래, 내가 결혼을 잘못한 거야, 이것은 도대체 역사적인 실수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요. 나중에는 자식도 원망하고 교회까지 원망을 해요. 하나님을 원망해요. 그렇다면 지금 문제가 있는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 거예요.
또 생각해보세요. 사랑이라는 것도 사랑을 받을 때에 착해지는 것이 사랑이예요. 사랑 받으면 또 감사합니다. 사랑 받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 이렇게 좋은 일이 있군요'-이렇게 사랑 받을 때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일만 생기면 꼭 못된 길로 가는 사람이 있어요. 아주 준비 해놓았다는 듯이 꼭 나빠지기만 하는 거예요. 용서받으면 그것을 방탕의 기회로 삼고, 성공하면 그것을 타락의 기회로 삼아요. 이것은 구제불능이에요. 이것이 타락한 자가 가는 길이에요.
자,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바로를 예로 들어서 말씀합니다. 바로는 버려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18절)"-마음이 굳어지는 거예요. 원망하는 거예요.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점점 더 원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재앙을 한 두어 번 받았으면 됐지, 열 번까지 다 받을 것은 뭐냐? 또 쫓아가다가 홍해까지 가서 빠져죽을 것은 뭐냐? 참 지독하게 못난 사람이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타락한 사람이에요. 기적도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은혜를 보면서도 약해지고, 재앙을 받으면서 더 악해지는 거예요. 강팍'해져요. 마음이 자꾸 굳어지는 거예요. 이건 버림받았다는 증거예요.
본문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은 굳어진다, 강팍해진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17절에 보면 이 강팍한 자를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그러나 강팍한 자가 당장 벼락을 맞아 죽는 게 아니예요. 이런 악한 사람, 구원받지 못할 사람도 잠깐동안 집행유예로, 형유예로 살아요. 그 기간이 또한 중요해요. 그래서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17절)"-참 오묘한 말씀이에요. 바로가 강팍하게 놀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게 됩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는 이 엄청난 기적은 바로가 따라왔으니까 보게 된 것이 아닙니까? 바로가 안 따라왔으면, 강팍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겠습니까? 그런고로 악한 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하게 쓰십니다. 선한 목적으로 쓰십니다. 성경은 악한 자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다고 말씀해요. 여러분, 이 세상에 이렇게 악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원망하지 마세요. 분명히 선교적으로 그 사명이 있어요.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 속에서 그들도 하나님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이루고 있는 것이에요. 놀라운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때때로 악한 자에 대해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에 대해서 원망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쓰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은혜요, 그 은혜는 절대적이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택함을 받았고,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 하는 이 많은 은혜 속에서 항상 새롭게 성장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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