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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도권(요 12:36-5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위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한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며, 그 길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숨으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 12:36하반절) 말씀으로 오신 분이 왜 숨으셔야 했는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비밀로 붙인 일들이 군데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령, 병을 고치신 다음에는 대부분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 이런 사실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복음을 비밀의 복음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역사를 이루실 때마다 비밀로 붙여 주기를 주님은 당부하고 계십니다.
이미 공부한 것입니다만 요한복음 6:15에 보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 때도 예수님은 저들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들어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요 6:15)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가운데로 다니시지 아니하고 떠나 빈들 가까운 곳으로 가셨다는 대목도 있습니다.(요11:54) 이렇게 피했다 또는 숨었다는 말씀이 여기저기서 쉽게 발견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어려운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배신과 오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무엇이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이해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생각하는 것만큼 말하지도 못하고, 말하는 것만큼 전달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느 교육자가 말하기를 자기 생각을 17%만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 성공적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이미 자기가 가진 생각에 붙들리어, 즉 자기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기적 이해 때문에 상대방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유대인들과 너무나 소통이 어렵게 되자,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은 폭발력이 있기 때문에 낡은 부대에다 넣으면, 그 부대는 터져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나 병 고치신 일 등 행하신 모든 사역은 새로운 진리로써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치시자 의사로 오해했고, 오천 명을 먹이시면 경제 해결자로 우러러보았으며,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보면 재판관으로 오해하여 재산을 가지고 다투던 형제가 예수님께 가져와서 해결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마술사로, 정신병자로까지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해 중에 제일 무서운 오해는 정치적인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역사를 자기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역사 하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인기가 높아지자 그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이와 같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본 정치하에 있을 당시, 애국을 한다는 일부의 사람들이 예수는 믿지 않으면서 교회 조직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 당시에서는 교회가 유일한 단체, 유일한 조직으로써 교회를 제외하고는 어떤 조직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공산주의자들까지도 교회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 믿는 체하며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이나, 사업하는 사람 등 그 외 각자 자기 나름대로 교회를 이용 가치로 생각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에도 그 분의 능력을 보고 그것을 자기의 정치적인 소망을 이루려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숨어야 했고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때를 잘 맞추어야 하는 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1년도 전도하시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기에 여러 가지 의미로 예수님은 피하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순교하신 분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순교하셨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복음을 위한 순교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붙들려 가서 돌아가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와 정치적인 문제가 엇갈리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이유로 저들이 악용할 것을 염려하셔서 잠깐씩 숨으신 것입니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일단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나타나야지 그대로 치닫다가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숨으셨다는 것은 신학적인 의미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제한이해」라고 하는데, 칼빈은「제한 속죄」라는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복음은 예나 오늘이나 드러나기도 하지만 숨겨지기도 합니다. 즉, 믿으려는 자에게는 드러나 있고,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사람에게는 항상 숨겨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누구에게나 알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이해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만 그들 모두가 깨닫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흔히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서 믿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왜 진작 믿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좀더 빨리 시작했더라면 내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일찍 알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과연 일찌기 복음을 듣지 못해서 몰랐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많이 있었지만 내 마음이 진작 문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내 마음대로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져 있는 진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음 본문 37절에서 사도 요한은 다시 한번 더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요 12 : 37) 요한의 생각으로는 저들이 믿을 수밖에 없는데, 왜 믿지 않을까 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생각했지만, 표적이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당시는 예수님이 직접 계셨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고, 오천 명을 먹였고, 장님이 눈을 떴고, 바다를 고요하게 하는 등 많은 표적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많은 표적들 속에서 또 다른 표적을 계속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믿지 않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지 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느 표적으로도 저들을 믿게 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저들은, 표적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표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함께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표적 속에서 살았습니다. 믿음은 마음의 문제요, 진실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실증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적이 부족하거나 말씀이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을 수 없는 완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할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말씀이 분명치 않으며, 교인들이 교인답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이런 이유들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저들이 믿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얻어야 합니까? 사도 요한은 이 문제의 해답을 인간적인 지식으로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성경에서 구하는 태도를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 사건입니다. 하필이면 창피하고 부끄럽게도 예수님은 12제자 중 한 사람에게 팔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제자에게 팔렸으니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베드로는 성경을 인용하여 해답을 얻습니다. 즉, 성경에 가룟 유다가 그렇게 하도록 예언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악인이 왜 잘 사는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알았나이다"(시 73 : 17)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만나고서야 그 일이 왜 있어야 했는지 그 뜻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하고, 성경으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요한은 성경을 들어 설명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요12:38, 사53:1) 또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2:40, 사6:10) 이상 두 구절을 이사야서에서 인용하면서 성경에 믿지 않게 되어 있다고 해답을 얻습니다. 위의 두 요절이 나타내는 뜻은, 저들이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악해져서 믿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도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전도한다고 누구나 다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전한다고 다 믿고, 내가 설득한다고 다 이해되고, 내가 봉사한다고 다 잘될 것 같습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고 그리고서는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잘 되었다고 내가 봉사하고 애쓴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필자는 늘 설교를 합니다만, 제가 말을 잘 해서 여러분들이 잘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할 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저는 설교가 끝난 다음에 반드시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제가 한 오늘 설교에서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이면 성도들로 하여금 다 생각나서 깨닫게 해 주시고, 혹 합당치 않은 것이 있으면 교회 문을 나가기 전에 다 잊어버리게 해주십시오"라고, 설교 끝에 저 혼자 하는 기도입니다. 할 일은 다 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했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다 열매가 맺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태복음 13 : 14-15이나 마가복음4 : 10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불신은 하나님께서 문을 닫았기에 믿을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심령이 노예 상태가 되어 굳어져서 강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기는 들어도 들려지지 않습니다. 이 마음을 씨 뿌리는 비유로 보면, 돌짝밭과 길가와 같은 마음 상태입니다. 이들 마음 밭은 황폐하기도 하고 길과 같이 닳고 닳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도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도권(先導權)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므로 누구에겐가 전도하고 설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심판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에는 이 세상 끝에 오는 종말적 심판과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현재적 심판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지 못합니다. 계속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변질되고 타성이 되어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닫혔으며 불신앙의 체질이 된 것입니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한계를 넘어 때가 지났으므로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고, 가룟 유다, 바로 왕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어느 한계를 넘어서고 나니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할 수가 없는 심판받은 심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유대 사람들이 믿지 않은 것을 조금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깊은 신앙을 다음 말씀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관원 중에서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12:42) 여기서 잠깐 사도 바울이 가진 유대인에 대한 신앙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9장에서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믿지 않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은 대단히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깊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고 있다가 먼 훗날에 믿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지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는 점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필자가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본래 믿음이 전혀 없었고 아내는 진실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 문제로 다툼을 많이 했고 심지어는 폭력까지 사용하며 아내를 교회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강한 설득력에 드디어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후에 신학까지 하여 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목사가 된 뒤에 아내의 신앙이 약해진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만 겨우 참석할 정도로 희미해졌다고 오히려 목사님이 염려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합니까? 아마도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약간 팽팽하게 핍박이 있어야 잘 믿어지고, 오히려 편안하고 감사한 조건 속에서는 뒤로 후퇴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 신앙에 대해 오묘한 진리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하신 능력과 지혜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불 신앙이 완전한 불 신앙이 아니라 언젠가는 믿게 될 것이다라고 멀리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믿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특히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겉으로는 믿지 않지만 비밀리에 속으로는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안 믿는 척 했지만 내적으로는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엘리야가 고독해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혼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알에게 아직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가 칠천이나 있다고 혼자가 아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숨어 있는 칠천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안 믿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남편들 중에서도 가끔 그런 분이 있습니다. 아내 앞에서는 핍박도 하고 안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제 삼자에게 가서는 전도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감추어진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이유로 인해서 시원치 않지만 깊숙한 곳에서는 신앙이 자라고 있으므로 영적인 안목으로 그들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신문에 나타난 어두운 사건들을 보고 나쁜 사람만 많다고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법이란 원래 몇 사람의 나쁜 사람 때문에 있는 것이지 착한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도 요한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의 동기가 어디 있나를 지금 심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 : 43)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으므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 동안은 내 왕의 보좌를 내어놓아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사랑, 자기 교만이 무너져야 비로소 예수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자기 교만, 자기 욕망, 자기적 이해, 자기 주관, 자기 자랑이 완전히 무너져야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 욕망들을 그대로 두고 예수의 이적, 능력만 바라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이제 요한은 이 장의 결론으로서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과 심판의 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 : 47-48)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과 진리가 바로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는 대로 감사하고 받아들이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신의 요소를 마음속에서 다 제거하고, 언제나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면서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으로 믿어 나갈 때, 그의 크신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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